대공황의 수렁①…고임금정책이 부른 고실업률
대공황의 수렁①…고임금정책이 부른 고실업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0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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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버 고임금 정책 2년간 유지…저항선 무너지며 대량해고 촉발

 

192910월말 뉴욕증시가 폭락하고 미국경제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자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조업, 건설업, 공공사업의 리더들을 백악관에 소집한 것이었다. 그는 1118일부터 27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소집한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경제가 어려워 져도 임금은 낮춰선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불가피할 경우 물가 하락률보다 더 낮게 임금을 인하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후버는 협동조합주의(corporatism) 또는 계획경제를 신봉했다. 그는 불경기에 노동자의 임금을 하락시키고 실업률이 높아 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캘빈 쿨리지 대통령 시절에 상무장관을 7년간 역임했는데, 1920~1921년 불황기에 경험한 임금 하락과 실업률 증가가 경기를 더 악화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대통령이 되어 다시 경기 불황을 맞게 되자 그는 기업인들을 다그쳐 임금의 현상유지를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후버 대통령의 종용에 상공회의소는 임금을 유지하고 투자를 늘리겠다고 선언하고 회원사들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당시 미국 노동자의 임금은 영국은 물론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높았다. 앞서 1920~1921년의 짧은 불황기에 미국 노동자의 임금은 9~10% 하락했다. 기업들이 적자를 메우는 수단으로 임금 하락과 배당 축소를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상무장관이던 후버는 산업별 조합을 통해 임금 감축을 중지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다행히 빠르게 경기가 회복하면서 그 시도는 일단 중단되었다.

후버의 고임금 정책은 기업이 높은 임금을 지급하면 피고용인이 기업의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능력을 갖게 되고, 경제를 선순환시킨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불황기에도 기업이 임금을 유지하면 경기 회복에 탄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은 한국의 소득주도성장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수 있다. 후버는 상무장관 시절에 임금을 깎는 기업을 맹비난했다.

취임 직후에 경기침체가 닥쳐오자 후버 대통령은 과거 기업들의 관행에 쐐기를 박았다. 기업들은 불황이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손해를 감수하면서 임금을 유지했다. 고용도 최대한 유지하려 노력했고, 생산량을 줄여야 할 경우에는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덕분에 공황 초기 2년 동안에 미국 노동자의 임금은 유지되었다.

 

1929년 3월 4일 허버트 후버 대통령 취임식 /위키피디아
1929년 3월 4일 허버트 후버 대통령 취임식 /위키피디아

 

중앙은행인 연준(Fed)도 순발력 있게 대처했다. 192911월에 두 차례 재할인율을 인하한 후 이듬해 19306월까지 네차례에 걸쳐 인하를 단행해 재할인율이 6.0%에서 2.5%로 하락했다. 증시 붕괴에 대처해 중앙은행은 콜 시장 대부자들에게 유동성을 공급하라고 종용하고 공개시장에서 증권을 매입하는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1930년초 주식시장은 상당히 회복해 안정세를 보였다.

연방정부는 SOC 건설을 서둘러 시행하고, 주 정부들도 토목사업을 앞당겼다. 의회는 소득세율을 1% 포인트씩 낮추는데 동의했다. 노동조합 대표들도 파업을 하지 않고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않기로 합의했고, 의회도 공공사업비를 늘리는데 협조했다. 반년만에 급격한 추락이 진정되고 섣부른 선순환의 기대감이 생겨났다. 일시적인 착시현상이었다.

후버 대통령은 193051난국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최악의 사태는 넘긴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의 예단은 절반만 맞았다. 최악의 사태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 본질은 증시 붕괴가 아니라 디플레이션이었다.

 

주가하락으로 부()가 축소된 투자자들은 소비를 줄였다. 특히 내구재 소비가 심한 타격을 받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소비를 더욱 위축시켰다. 물가는 1928~1929년에 소폭으로 내려가다가 1930년엔 큰 폭으로 하락했다. 상품도매물가지수는 1930년에 9.6% 하락했고, 1931년엔 17.2%, 이듬해엔 11.25% 하락했다. 소매물가지수도 같은 기간에 2.9%, 9.2%, 10.9% 하락했다. 물가하락은 생산자를 위축시켰다. 기업이 원가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적자를 보는 요인이 되었다.

 

중앙은행이 금융완화 정책을 취했지만 적극적이지 못했고, 그 결과로 물가하락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뉴욕 연준의 조지 해리슨(George L. Harrison) 총재는 19304월에 재할인율을 추가로 인하할 것을 요청했지만, 워싱턴의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그해 6월 뉴욕 연준은 공개시장을 통해 연방증권을 대량 매입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사회는 41로 또 부결시켰다.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같은 후대의 화폐경제론자들은 그때 연준이 보다 적극적으로 금융완화정책을 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공황 때 연준의 미온적인 정책에 대한 반성으로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서 벤 버냉키, 2020년 코로나 위기에 제롬 파월 의장에 의해 전격적이고 적극적인 금융완화정책이 나타난다.

금융완화 정책은 유동성만 뿌리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은행으로 하여금 투자를 자극하도록 해야 하고, 이를 통해 투자가 촉진되어야 한다. 1930년초 연준은 주가폭락에 따른 신용경색만을 수습하려 했지, 급속하게 악화하는 디플레이션을 근원적으로 타개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1930년 하반기부터 빠르게 진행한 상품가격 하락에 대해 사람들이 발 밑의 땅이 꺼지는 것을 느꼈다고 비유했다.

 

1910~1960년 사이의 미국 실업률 /위키피디아
1910~1960년 사이의 미국 실업률 /위키피디아

 

디플레이션은 기업 생산을 위축시키고 GDP를 축소시킨다. 1930년 사이에 미국의 실질 GDP11%, 1931년엔 5.4% 하락했다. 물가 하락에 따른 제조업 생산량 감축에도 불구하고 1930~1931년 사이에 노동자들의 명목 임금은 유지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기업에 요구한 지침은 이행되었지만, 그가 기대한 상황은 오지 않았다.

물가가 하락하는 사이에 명목임금이 유지되면 실질임금은 상승하게 된다. 기업들이 치르는 실질노동비용은 1930년에 7.8%, 1931년에 9.5% 상승했다. 기업들은 참다 못해 임금을 깎고 급기야 노동자를 해고하기 시작했다. 일부 기업들은 19304분기에 임금 삭감을 시작했고, 1931년에는 임금삭감으로도 힘들어 본격적으로 대량 해고를 시작했다.

후버 대통령의 고임금 정책은 기대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정책은 오류로 귀결되었다. 대공황 이전의 경기 위축은 12~18개월로 그쳤다. 기업들은 임금과 배당 삭감으로 경영 적자를 완충시켰다. 노동조합이 당연히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기업인들은 어떠한 수단을 쓰든 임금을 삭감했다. 노동시장의 탄력성을 활용했기 때문에 경기침체가 혹독할 수는 있었지만 짧게 지나가게 할수 있었다.

하지만 대공황 초기에는 2년동안 기업들이 고임금을 유지했다.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실질임금은 상승하고, 기업들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다. 정부와의 약속도 더 이상 지키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기업이 망한다고 정부가 회생시켜주지는 않는다. 결국은 기업들은 자기 살길을 찾았다.

 

대공황시기 오레건주 포틀랜드의 후버빌 /위키피디아
대공황시기 오레건주 포틀랜드의 후버빌 /위키피디아

 

공황이 시작된지 2년째 되는 1931년부터 기업들은 임금을 삭감하고 대량해고에 나섰다. GE에서는 사장이 반대하는데도 이사회가 임금삭감을 의결해 회사는 따라야 했다. 철강회사 US스틸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사회 결의에 의해 11%의 임금삭감을 단행했다. 포드자동차는 임금을 25% 깎았다. 1931년 미국 제조업체들은 평균 10% 임금삭감을 진행했다.

만약 대공황 초기에 기업들이 전례와 같이 임금삭감을 시행했더라면 디플레이션 상황에 맞게 대응할수 있었으며, 경기침체의 주기를 줄였을 것이다. 이런 반성에서 기업들과 경제학자들은 고용탄력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경기 하락이 극심해지면서 기업들은 임금삭감으로도 모자라 불가피하게 직원들을 해고하게 되었다. 실업률은 급격하게 상승했다.

후버 행정부는 실업자의 수를 정확하게 계산도 하지 못했다. 1929년에 3.2%이던 미국의 실업률은 1930년에 8.9%로 상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실업률은 평균적인 불황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후 저상선이 무너지며 실업률은 급격히 상승해 193324.9%까지 치솟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도시의 실업자들은 렌트비를 내지 못해 길거리로 나앉았다. 실업자들은 도심 그늘진 곳이나 강가에 판자집을 지어 살았고, 그 우중충한 가옥을 대통령의 이름을 빗대 후버빌(Hooverville)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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