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의 수렁②…美 관세법, 무역 위축 악순환
대공황의 수렁②…美 관세법, 무역 위축 악순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06 13: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후버, 농업보호 위해 스무트-홀리법 서명…보복 관세-무역 급감 초래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다음 단추도 잘못 꿰게 된다. 대공황 초기에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의 공화당 정부는 잘못된 정책으로 일관했다. 공장 노동자를 위해 고임금 정책을 밀어붙여 기업의 도산을 확산시켰고, 농민들을 위해 관세를 인상해 무역을 후퇴시켰다. 후버의 정책적 오류는 경제전문가들의 견해를 존중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후버는 유권자인 노동자, 농민, 그리고 표밭에서 사는 정치인들의 주장에 지나칠 정도로 휘둘렸다. 질병은 의사에게, 경제위기는 경제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데, 후버는 그러하지 못했다.

 

미국 농업의 침체는 대공황보다 앞서 시작되었다. 농업의 불황이 대공황을 초래한 것은 아니지만 공황이 전개되면서 농업의 침체는 함께 격류에 휘말렸다.

당시 농업이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미국의 경우 1929년에 농업이 총고용의 4분의1을 차지하고 농산물 수출이 농업소득의 28%를 차지했다. 캐나다, 아르헨티나, 우르과이 등 아메리카 대륙의 나라들에서는 농업 비중이 미국보다 높았다. 세계무역에서 농산물이 5분의2, 광산물이 5분의1을 차지하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의 농업이 침체의 늪에 빠진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1차 대전 중에 유럽에서 농사가 중단되면서 식량과 농산물이 미국, 캐나다, 남미국가들에서 증산되어 유럽에 공급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유럽이 농업을 재개하면서 국제적인 농산물 과잉 현상이 빚어져 곡물가가 급락했다. 1920~1921년 사이에 국제적인 곡물가격이 53.3%나 폭락했다.

둘째는 전기와 석유의 시대를 맞아 자동차, 트랙터가 보급되면서 말의 수요가 줄고 말 먹이를 생산하는 농가에서 생산 과잉이 발생했다. 도시에서 농산물 과소소비가 진행되어 생산된 농산물이 넘쳐나게 되었다.

미국 농업지대의 의원들은 과잉 농산물을 처리하기 위해 수입을 줄여야 하며, 그 수단으로 관세율을 인상할 것을 주장했다. 1922년 미국 의회는 포드니-맥컴버(ordneyMcCumber) 관세법을 통과시켰으나, 곧이어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가 상응하는 보복 관세를 물려 미국 제조업이 타격을 받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에 의원들은 곡물가 안정을 위해 또다른 관세법 맥나리-호건(McNaryHaugen)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대통령이 세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해 좌절되었다. 쿨리지는 관세는 보복관세를 유발해 결국 미국의 교역이 위축되며, 농업을 보호하려다 제조업이 피해를 입는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1927년 국제연맹이 주최한 세계경제회의(World Economic Conference)에서 회원국들은 세계교역량 확대를 위해 관세의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의정서를 채택했다. 하지만 회원국들은 원론에는 합의했지만 제 나라에서는 농민들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1928년 프랑스가 먼저 관세를 인상했다.

1928년 미국 대선에서도 관세가 주요 이슈였다. 관세인상을 주장하는 공화당이 행정부와 의회를 장악했다. 19295월 오레건주 출신의 공화당 의원 윌리스 홀리(Willis C. Hawley) 주도로 관세법이 하원을 통과했고, 19303월 유타주 출산의 공화당 상원의원 리드 스무트(Reed Smoot) 주도로 법안이 상원을 통과했다. 법안 통과에는 농촌 출신의 민주당 의원도 참여했다. 상하 양원의 조정을 거쳐 스무트-홀리 관세법안(SmootHawley Tariff Act)은 재의결되어 후버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이 때는 미국경제가 공황의 수렁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리드 스무트 상원의원(오른쪽)과 윌리스 홀리 하원의원 /위키피디아
리드 스무트 상원의원(오른쪽)과 윌리스 홀리 하원의원 /위키피디아

 

법안 반대론자들은 전임 쿨리지처럼 후버도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19305, 미국의 경제학자 1,028명이 서명한 관세법 반대 청원이 백악관에 전해졌다. 서명한 경제학자에는 폴 더글러스(Paul Douglas), 어빙 피셔(Irving Fisher), 제임스 우드(James T.F.G. Wood), 프랭크 그레이엄(Frank Graham) 등 당대의 저명 학자들이 포함되었다. 후버 대통령은 경제학자들과 기업인들을 만나 그들의 얘기를 들었다. 포드자동차의 창업자 헨리 포드(Henry Ford)관세법은 바보같은 짓이라며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설득했다. 그 회의에 참석한 J.P. 모건의 CEO 토머스 라몬트(Thomas W. Lamont)거의 무릎을 꿇고 거부권을 행사해달라고 읍소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해 615일 후버는 스무트-호건 관세법을 서명하고 말았다. 그는 경제원리보다는 공화당 정치인, 거부권을 행사하면 사퇴하겠다는 장관들에게 굴복한 것이다.

 

물론 세계대공황기에 관세 인상은 미국이 먼저 시작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 인도, 호주가 미국에 앞서 관세를 인상했지만, 각국은 최대 최대 경제국인 미국의 관세법 입법 여부를 눈여겨 주시하고 있었다. 후버가 법안에 서명을 하자 즉각적으로 보복이 들어왔다. 30여개국이 미국의 조치에 항의했다.

미국과 가장 가깝고 우호적인 캐나다가 미국의 수출품 16개 종목에 대해 30%의 관세율을 부과했다. 이후 캐나다는 미국 경제권에서 떨어져 나가 영영방 회의에 참석하며 새로운 블록에 가담했다.

스페인은 그해 7월 와이스 관세법을 제정했고, 스위스는 미국 수출품을 배격했다. 이탈리아는 630일 미국산 자동차에 대해 보복 조치를 취했고, 멕시코, 쿠바,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등도 새로운 관세법을 만들었다.

 

미국의 관세율 추이 /위키피디아
미국의 관세율 추이 /위키피디아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2만개 수입품을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적 보호무역주의였다. 미국 통계국의 조사에 따르면, 1932년 미국의 관세율은 최고 59.1%까지 올라갔다.

처음에는 고관세의 효력이 발생한 것처럼 보였다. 일자리가 늘어나고 건설계약과 산업생산이 증가추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바로 무역상대국의 보복 관세를 당한데다 오스트리아에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무역규모는 위축되었다. 특히 밀, 귀리, 옥수수, 호밀, 면화, 땅콩, 쌀과 같은 농산품은 미국이 수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호무역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후버 행정부는 관세 인상과 별도로 과잉 농산물을 정부가 비축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정부 수매제도다. 밀 협동조합에 1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주어 밀과 여러 곡물을 수매했다. 정부가 곡물을 수매하자 농민들은 더 많은 곡물을 생산했다. 연방정부가 수매량을 늘렸지만 가격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결국은 수매제도가 농업 불황을 악화시키고 재고량을 늘리는 결과만 초래했다.

 

스무트-홀리 법안 통과 이후 미국의 교역량은 급감했다. 1929년에서 1933년 사이에 미국의 수입액은 44억 달러에서 15억 달러로 66% 내려갔고, 수출은 이 기간에 54억 달러에서 21억 달러로 줄었다. 미국의 GNP(국민총생산)은 같은 기간에 1,031억 달러에서 758억 달러로 가라앉았다. 유럽과의 교역에서 미국의 수입액은 192913억 달러에서 193239,000만 달러로, 수출액은 23억 달러에서 78,400억달러로 각각 주저앉았다.

경제학자 제이컵 매디슨(Jakob B. Madsen)의 분석(2002)에 따르면,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주요 17개국의 교역량은 33% 하락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물론 대공황기의 국제교역량 위축은 관세율 인상 때문만은 아니다. 국내소비 위축, 디플레이션 등도 국제교역을 위축시켰다.

경제학자들은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무역보복을 유발해 세계교역을 위축시켰고, 대공황을 악화시켰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한다. 화폐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관세율 상승이 대공황에 미친 영향은 부차적인 요인이며, 주요 요인은 통화량 공급에 있다고 보았다.

 

후버 행정부의 관세정책은 정적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32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선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관세법이 재화로 채무를 지불할수 없게 함으로써 금을 소모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했다면서 관세가 가격 인상효과가 아니라, 가격 인하효과를 발휘했다고 맹공격을 퍼부었다. 금본위제도가 무너지는 시기에 실물교역을 위축시켰기 때문에 금의 수요를 늘려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선 직후 1934년 호혜관세법(Reciprocal Tariff Act)을 위회를 통과시켜 관세율을 대폭 인하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