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의 수렁③…흔들리는 금본위제, 영국 이탈
대공황의 수렁③…흔들리는 금본위제, 영국 이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0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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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크레디트안슈탈트 파산위기…독일, 영국으로 예금인출 확산

 

192910월 뉴욕증시 대폭락으로 촉발된 미국의 대공황은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공황이 글로벌화하면 가장 약한 나라에서 금융시스템이 붕괴한다. 당시 구미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나라는 1차대전의 패전국 독일과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나라로, 패전 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발칸반도가 독립해 영토가 6분의1로 줄어들었고, 공업지대였던 주데텐란트와 트리에스테를 상실했다. 수도 빈의 금융기관들은 독립한 지역에서 받아야 할 채권을 회수하지 못했고, 정부의 재정능력은 취약했다.

1930년 오스트리아 토지은행인 보덴은행(Beden-Kreditanstalt)이 파산 위기를 맞았다. 오스트리아의 재무장관은 로스차일드가의 루이스 남작(Louis Nathaniel de Rothschild)을 찾아갔다. 로스차일드가 대주주인 크레디트안슈탈트(Credit-Anstalt)로 하여금 토지은행을 매입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루이스는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보덴 은행은 자본금 8천만 실링에 누적 결손이 14천만 실링이었다. 크레디트안슈탈트는 거대한 부채를 떠안고 은행위기를 일단 틀어 막았다. 하지만 이 오스트리아의 최대은행은 헝가리와 체코의 지점들이 떨어져 나가고 거래기업들이 연이어 파산하는 바람에 손실이 불어나 휘청거리고 있었다.

1931년 봄, 네덜란드의 한 은행이 크레디트안슐탄트에 대여금의 만기를 연장하면서 이자를 0.25%에서 0.37%로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로스차일드의 자존심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대여금의 만기를 연장하지 않았다. 두달후 영국의 한 공인회계사가 크레디트안슈탈트의 재무상태를 검토해 공개했다.

그 무렵 오스트리아 정부와 로스차일드는 크레디트안슈탈트에 대한 구제금융을 논의했다. 곧이어 국가가 13천만 실링, 로스차일드가 2,250만 실링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투자자와 예금자들이 일시에 크레디트안슈탈트 창구로 몰려들어 금으로 환전해 달라고 요구했다. 은행이 파산하면 돈을 받지 못할 것이기에 안전한 금을 달라고 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은행 간부들은 각국에 투자 지원금을 요청했다. 이것을 방해한 나라가 프랑스였다.

 

2차세계대전 이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위키피디아
2차세계대전 이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위키피디아

 

당시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관세동맹을 추진하고 있었다. 두 나라는 공동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교역을 늘리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했지만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게르만족의 두 나라가 다시 통합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프랑스 정부는 자국 은행에 오스트리아 은행의 대출을 회수하라고 요청했다. 프랑스 은행들이 정부의 요청에 응해 오스트리아 은행에서 돈을 빼내지는 않았지만 대출금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만 크레디트안슐탈트의 입장에서는 해외 자금조달의 길이 막히게 된 것이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서 예금자들의 뱅크런(bank run)은 더 격화되었다. 1931511일 크레디트안슈탈트는 파산을 선언했다. 대공황 이후 유럽에서 대형은행 파산으론 처음이었다. 이 은행의 영업규모가 당시 오스트리아 예산에 맞먹는 거대은행이었고, 이 은행이 쓰러져 오스트리아는 물론 유럽 은행들이 연쇄 도산으로 이어질 위기에 놓였다.

 

오스트리아의 로스차일드를 이끄는 루이스 남작은 런던과 파리의 친척들에게 자금 지원을 을 부탁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로스차일드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런던과 파리의 은행은 별개의 회사였고, 빈의 가문과 공유할 사업도 없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는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가문의 전통을 발휘했다.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는 오스트리아의 혈육이 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두 은행은 빈의 크레디트안슈탈트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덕분에 크레디트안슈탈트는 간신히 살아났다.

이와 별도로 오스트리아 정부는 19317월 금의 해외유출을 막기 위해 외국환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시행했다. 국내 예금자들도 금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 달러와 파운드로 교환할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예금인출 사태가 가라앉게 되었다.

이 무렵, 영국 중앙은행만이 오스트리아에 1주일 기한으로 5천만 실링을 공여했다. 파운드를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프랑스의 미움을 샀다. 오스트리아-독일의 동맹을 깨려는 프랑스는 영국에 악감정을 갖게 되고, 파운드 매각에 나서게 된다.

 

빈의 크레디트안슈탈트 옛 본사 /위키피디아
빈의 크레디트안슈탈트 옛 본사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에서의 예금인출 사태는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폴란드 등 중부 유럽으로 휘몰아쳤다. 헝가리와 다른 나라들도 곧이어 외국환 거래를 규제하며 금본위제를 방어했다. 그러자 패닉의 방향은 독일로 향했다. 독일의 금과 외환 보유 사정이 오스트리아에 비해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독일 은행들은 1차 대전의 파괴에서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데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은 터라 국내자본보다 해외자본의 예치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국내 정치는 극우 나치와 극좌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어지러웠다. 대형 모직물회사 노르드울(Nordwoole)이 파산하면서 다나트은행(Danat bank)이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투자자들과 예금자들은 독일도 오스트리아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예상하고 예금을 금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중앙은행인 라이히방크(Reichsbank)에서 6월 첫째주 15,000만 마르크, 둘째주 54,000만 마르크, 619~20일 이틀 사이에 15,000마르크의 금이 빠져나갔다. 독일의 파산이 목전에 이르렀다.

미국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독일 배상금을 일정기간 유예하는 모라토리엄을 제안했다. 독일에서 들어오는 돈에 의존했던 프랑스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도하에 6개월의 배상금 유예가 결정되었고, 미국과 영국 중앙은행, 국제결제은행(BIS)의 긴급자금 공여로 독일은 간신히 파산위기에서 벗어났다.

독일의 바이마르 정부도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다른 중부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외국환을 통제했다.

 

1930년대 런던 직업소개소에 줄을 선 실업자들 /위키피디아
1930년대 런던 직업소개소에 줄을 선 실업자들 /위키피디아

 

중부유럽을 강타한 금융위기는 유럽 최대의 경제국이엇던 영국으로 확산되었다. 영국은 남미 국가들에게 빌려준 막대한 역외 차관을 회수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유럽 각국의 시중은행들은 유동성 확보를 위해 파운드로 몰려 들었다.

당시 국제결제통화는 금과 미국 달러, 영국 파운드였다. 중부 유럽에서 외국환 거래가 차단된 스웨덴,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등 중소국가의 은행들은 금을 확보하기 위해 파운드를 팔았다.

713일 영국 의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파운드화 대외잔고 규모가 드러나면서 파운드는 약세를 불러왔다. 영국은 미국과 프랑스에 차입금을 요청했지만, 두 나라는 제 코가 석자였기에 시원시원하게 도와주지 못했다. 특히 프랑스가 독일-오스트리아에 요구조건을 이끌어 내기 위해 영국에 보복했다는 견해도 있다.

영란은행은 파운드 유동성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723일 할인율을 2.5%에서 3.0%로 인상하고, 1주일 후에 다시 4.5%로 인상했다. 실업률이 20%를 넘어서는 경기침체의 상황에서 통화정책의 방향을 거꾸로 취한 것이다.

도대체 금본위제가 뭐길래, 영국은 이 제도의 유지에 집착해야 했을까. 재할인율을 10%로 올란다고 한들, 금이 생겨나지 않을 것은 분명한 상황이었다. 당시 영란은행의 노먼(Montagu Norman) 총재는 와병중이었는데, 727일자 일기에 금의 지불이 중지될 위험이 크다고 적었다.

영국의 재정적자는 12천만 파운드에 달했다. 내각은 910일 연간 8천만 파운드의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7천만파운드의 예산을 절약하는 새 예산안을 만들었다. 며칠후 독일에서 은행 도산사태가 발생하고 암스테르담 은행들은 런던에서 자금을 인출했다. 916일 해군병사들 사이에 급여가 삭감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며 소요가 일어 났다. 대영제국의 해군이 흔들린다는 소식은 파운드 매각을 가속화시켰다.

드디어 1931921일 영국 정부는 금본위제도를 포기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파운드화는 곧바로 떨어졌다. 이제 국제통화는 미국 달러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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