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의 수렁⑤…미국에 공산당 준동, 유혈사태
대공황의 수렁⑤…미국에 공산당 준동, 유혈사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0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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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운동, 재향군인 보너스 행진 등 시위 잇따라…후버 재선에 치명타

 

대공황이 진행되면서 미국 사회에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생겼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형성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제 막 조직된 소련과 적대관계는 아니었다. 미국에서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19198월에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앞서 1901년에 사회당이 창당되었으나 1차 세계대전에 반전운동을 벌이다가 탄압을 받아 위축되었고, 공산당은 무정부주의자, 급진좌파들을 흡수하며 조직을 확장했다.

대공황은 그들에게 활동에 좋은 토양을 형성했다. 미국 사회에도 자본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공산주의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창당 당시 75백명에 불과하던 공산당원들은 1930년대말에는 55천명으로 급증했다.

 

미국 공산당의 대중투쟁은 1920~1921년 짧은 경기침체기에 시작되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1921년 뉴욕에서 당대회를 열어 실업문제 해결을 주요 투쟁과제로 채택했다. 이 이슈는 비공산계 노조인 미국노동총동맹(AFL)과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을 비롯해 35개 단체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대뉴욕 실업자회의이고, 이 조직의 서기장에 지하에서 공산당활동을 한 유태계 이스라엘 암터(Israel Amter)가 지명되었다. 공산당은 노조와 결합해 인민전선을 형성하고 투쟁에 나섰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본주의 세계를 타도하는 것이었고, 대중적 구호로 투쟁하며 살자”(Fight and Live!), “노동이 아니면 보상을 달라”(Work or Compensation!)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 조직은 본격적인 투쟁에 앞서 뉴욕시의 폭발물 사건으로 지도부가 체포되고, 연방정부가 실업자 대책을 수립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공산당이 이끄는 실업자동맹(Unemployment Council)1929년말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재개되었다. 대량의 실업자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공산당은 외곽 노동단체인 노동조합단결동맹(TUUL: Trade Union Unity League)을 앞세워 실업자들을 조직화했다. 이들의 전술은 러시아 혁명 당시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조직된 실업자 소비에트를 모방했다고 한다. 공산당은 굶어 죽겠다, 투쟁하자”(Fight Don't Starve!)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빵 배급에 줄을 선 실직자들, 무료급식소를 찾은 이들을 포섭대상으로 삼았다.

공산당은 국제공산당(Communist International)이 제창한 193036일 세계 실업자 투쟁일에 맞춰 미국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워싱턴 D.C., 뉴욕, 보스턴, 시애틀에서 실업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뉴욕에서는 경찰 전원이 투입되었고, 워싱턴에서는 최루가스가 발사되었다. 1만명이 채 되지 않는 공산당은 전국적인 시위를 주도한데 고무되어 보다 적극적인 실업자 조직화에 나섰다. 329~20일 뉴욕에서 열린 전국실업자대회에서 공산당원인 암터와 윌리엄 포스터(William Z. Foster), 로버트 마이너(Robert Minor)가 지도부로 선임되었다.

 

193074~5일 시카고에서 전국실업자동맹 창립대회가 열렸다. 공산당과 외곽조직 TUUL이 파견한 1,320명의 대의원들은 행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정치투쟁에 나섰다. 8월 실업자동맹은 실업자에게 1인당 매주 35달러의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부양가족에겐 1인당 5달러의 부양수당을 주며, 실업보험기금을 신설하는 내용의 실업자보험법의 제정을 연방정부에 요구했다.

19301016일 실업자동맹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뉴욕시청에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5~1천명의 시위대가 공산당의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행진을 해 뉴욕시청을 포위하고, 경찰과 충돌했다. 시위 주동자가 지미 워커(Jimmy Walker) 뉴욕시장을 사악한 정치인이라고 규탄하자, 시장은 더러운 빨갱이들, 얼굴을 짓뭉겨버리겠다고 분노했다고 한다. 물리적 충돌 과정에서 기물이 파괴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뉴욕시는 경찰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물리적으로 해산했으나, 곧바로 1백만 달러의 실업구제기금을 내놓았다. 시위의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1830년 3월 뉴욕 실업자의 날 집회를 주도한 공산당 지도자 포스터, 마이너, 암터가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1830년 3월 뉴욕 실업자의 날 집회를 주도한 공산당 지도자 포스터, 마이너, 암터가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대공황기에 미국 공산당의 가장 유명한 투쟁은 포드 기아 행진’(Ford Hunger March)이다.

미국 최대 자동차메이커 포드자동차는 판매가 급감하면서 직원을 대규모로 해고했다. 포드의 자동차 생산은 1929132만대에서 193240만대로 감소했고, 일부 공장은 가동을 중단했다. 포드 노동자의 임금능 7달러에서 4달러로 떨어졌다. 당시엔 사회보장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직장을 잃으면 바로 굶주려야 했다. 굶주림에 지친 빈민들은 죽음을 선택했다. 디트로이트의 자살자는 1927113명에서 1931568명으로 늘어났다. 공산당은 디트로이트에서 굶주림(hunger)을 기치로 내걸었다.

공산당 지도자 윌리엄 포스터는 19323월초 디트로이트의 실업자들을 조직해 외곽 디어본(Dearborn)에 있는 포드자동차 본사까지의 행진을 추진했다. 37일 공산당과 디트로이트 실업동맹은 3천명의 남녀 실업자들을 이끌고 디트로이트를 출발해 디어본으로 향했다. 실업자들은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 “부스러기가 아니라 빵을 달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디어본의 경찰은 시위대의 행진을 시 경계에서 멈추라고 경고했다. 포드자동차의 창업자이자 CEO인 헨리 포드(Henry Ford)가 조직한 구사대도 경찰과 함께 보조를 맞췄다.

경찰과 구사대는 최루가스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시위대가 시 경계를 넘어서자 실탄을 발포했다. 4명이 즉사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는 그 자리에서 행진을 취소하고 퇴각했다. 경찰은 과격시위자 전원을 체포했다. 부상자들은 병원 침대에 꽁꽁 묶어 놓았다. 뉴욕타임스는 디어본 거리가 피로 물들었다고 전했다. 그후 디트로이트에서 몇차례 시위가 더 발생하고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공산당의 대중 투쟁은 디트로이트의 유혈 충돌 이후 대중적 지지를 잃었다. 그후 국제공산당은 파시즘과의 대항하기 위해 인민전선 전술로 전환하면서 미국 공산당도 그 지령에 따라 사회당과 기타 제정당 및 사회단체 연합 전술로 전환하게 된다.

 

농민들도 대중투쟁에 나섰다. 전미농민연맹(NFU: National Farmers Union)1932년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집회를 열어 농민 파업을 결의했다. NFU의 밀로 레노(Milo Reno) 회장은 농산물 가격이 내려가는 것을 막고 보상받기 위해 농민들이 생산한 가축과 농산물, 특히 우류를 시장에 내놓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농민휴일연대(Farmer's Holiday Association)라는 운동을 주창하며 농민들이 집단으로 휴일에 들어가 집에서 쉬면서 아무것도 사지도 팔지도 말자. 우리는 우리가 생산한 밀과 햄, 달걀만 먹자. 그들은 금을 먹고 산다.”고 주장했다.

그해 8월부터 아이오와, 미네소타, 위스콘신 등 중부 농촌지대에서 농민들은 도로를 봉쇄하고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충돌 과정에서 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농민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농산물을 팔지 않으면 농민들이 생계를 이어나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레노와 농민단체는 곧이어 은행에 담보로 잡힌 토지의 유질처분을 저지하는 운동으로 전환했다. 파산 위기에 몰린 은행들은 농민들에 대출하고 저당 잡은 농지를 매각했고, 농민들은 토지에서 떠나가야 했다. 농민단체의 이 운동으로 일부의 유질처분이 유예되기도 했다. 곧이어 1933년에 아이와와주에서 유질처분유예법이 통과되고, 미네소타 등지로 확산되었다.

 

1932년 보너스 군대의 행진을 경찰이 저지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32년 보너스 군대의 행진을 경찰이 저지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대공황기에 가장 극적인 물리적 충돌은 1932년 보너스 군대(Bonus Army) 행진 사건이다.

1924년 미국 의회는 1차 대전 참전용사들에게 보상을 지급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병사가 나라를 위해 참전하는 것에 보상을 할수 없다며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의회는 끝내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1945년까지 20년 동안 퇴역군인 1인당 1천달러를 지급하도록 했다.

대공황이 진행되면서 퇴역군인들은 보상금을 미리 줄 것을 요구했다. 의회는 1945년까지 지급할 보상금의 절반을 낮은 이자율로 융자를 주도록 하는 법안을 1931년에 통과시켰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소용없었다.

퇴역군인들은 그것도 모자라 보상금 완전 지급을 요구했고, 1932년 하원에서는 법안이 제출되었다. 후버 행정부와 공화당은 이 법안에 반대했다.

퇴역군인들은 사실상 실업자나 다름 없었다. 20대 나이에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은 이제 40대에 접어들었지만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되어 정부에 받을 돈을 미리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행동에 나섰다.

실업자가 된 한 퇴역군인이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워싱턴 D.C.까지 행진을 벌이자 수많은 퇴역군인들이 합세했다. 19325월 워싱턴에는 25천명의 시위자들이 27곳에 야영지를 설치하고 의회에 압력을 넣었다. 하원은 부랴부랴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상원이 부결시켰다.

후버 대통령은 시위자들이 집에 돌아갈 경우 차비를 주겠다며 집회 해산을 요구했다. 절반 이상이 야영지를 떠냈으나 1만명 가량이 남아 있었다.

727일 워싱턴의 경찰은 집회 해산을 요구했지만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았다. 경찰은 자체 병력으로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해 군의 투입을 요청했다. 후버 대통령은 전쟁부(국방부)에 지시해 병력을 투입했다. 그 때 지휘자는 6·25전쟁에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었다.

맥아더는 탱크를 앞세우고 보병부대를 투입해 신속하고 무참하게 과거의 전우들을 진압했다. 야영장의 임시막사를 불태우고 보너스 군대를 해산했다. 이 작전에는 2차 대전에서 공을 세운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장군도 참여했다.

맥아더의 강경진압은 후버의 인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해말에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후버를 낙선시키는데 맥아더가 결정적인 공을 세운 셈이다.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미군이 퇴역병사들의 야영지를 소각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미군이 퇴역병사들의 야영지를 소각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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