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의 수렁⑥…루스벨트, 금본위제 포기하다
대공황의 수렁⑥…루스벨트, 금본위제 포기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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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런으로 은행 도산 급증…전면적 은행구조조정으로 회복의 단초 형성

 

1932118일 미국 선거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후보가 공화당의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를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다. 루스벨트는 총선거인단 531명 가운데 472(89%)을 확보했고, 48개주 중 42개주에서 승리했다. 그가 후버의 실패한 경제정책을 공격하며 뉴딜(New Deal) 정책으로 경제를 회복시키겠다고 공약한 것이 미국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민주당 역사상 전례 없는 대승이었다.

선거일에서 취임일인 193334일까지 미국 경제는 루스벨트 신정부에 대한 기대감과 정책변화에 대한 우려로 대혼란에 빠졌다.

 

1932년 11월 미국 선거의 대통령 지지도 분포 /위키피디아
1932년 11월 미국 선거의 대통령 지지도 분포 /위키피디아

 

가장 큰 우려는 다가올 루스벨트 행정부가 금본위제를 유지할 것인지 여부였다. 루스벨트는 선거 공약으로 금본위제의 유지를 밝혔지만 시장의 분위기는 새 정부가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고 달러를 절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18331월 미 하원은 재건금융공사(RFC)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전체 은행의 명단을 발표했다. 정부기관에서 돈을 빌린 은행은 예치금이 부족한 부실은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예금자들은 서둘러 명단에 포함된 은행에서 예금을 빼냈다. 더욱이 달러를 절하할 경우 금에 대한 교환비율을 높이는 것이므로, 예금자의 입장에서는 달러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금으로 바꿔 놓는 것이 유리했다. 이런 심리적 작용이 예금자들로 하여금 은행으로 달려가게 했다. 은행이 돈이 떨어져 파산하기 전에 내 돈을 먼저 빼야겠다는 집단 심리는 은행의 연쇄 도산 위기로 몰아 넣었다.

뱅크런(bank run)이 미국 전역에서 발생했다. 은행들은 예금자들이 요구하는 충분한 금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방 연준들도 은행들의 빗발치는 요구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은행들은 보유하고 있는 채권과 유가증권을 팔아야 했다. 물량이 한꺼번에 나오는 바람에 유가증권은 헐값에 팔렸다.

결국은 은행 문을 닫는 길 밖에 없었다. 이미 선거전인 19321031일에 네바다주는 은행휴업(bank holiday)를 선언했다. 네바다주의 사례가 여러 주에서 검토되었다. 19331월 아이오와주가 은행 휴업에 돌입했다. 2월초에는 루이지애나, 미시건주에도 은행 휴업이 이어졌고, 2월말에는 메릴랜드, 아칸소, 인디애나, 오하아이주도 은행휴업에 들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증권거래소가 있는 뉴욕과 상품거래소가 위치한 시카고였다. 두 도시는 미국의 금융중심지다. 낙선 이후 집권말기에 대미를 장식하려던 후버 대통령은 뉴욕주와 일리노이 주지사에게 은행휴업을 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루스벨트 당선인은 금본위제 유지와 달러 절하 여부에 대해 일절 언급을 자제했다. 그러나 새정부 출범후 정책 설계와 내각 구성 과정에서 그의 의도가 조금씩 흘러나갔다. 그는 달러 평가절하를 적극 옹호하는 조지 워렌 교수와 면담했다. 루스벨트는 카터 글래스에게 재무장관직을 요청했지만 글래스는 루스벨트가 달러 평가절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루스벨트가 약속을 거부하자 카터 글래스는 재무장관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농민 단체들은 수출경쟁력 회복을 위해 달러 절하를 요구했다.

이런 정보들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가면서 루스벨트가 달러를 절하하고 금본위제를 흔들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은행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고, 은행 창구는 예금인출과 금 태환으로 혼란스러웠다. 국내 수요보다 외국의 수요가 더 많았다. 영국의 금본위 이탈에서 파운드 가치폭락을 경험한 유럽인들은 달러를 포기하고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외국인들의 집단 금 태환 요구로 뉴욕 연준이 가장 타격이 심했다. 193321일에서 34일까지 뉴욕 연준 지하창고의 금이 61%나 유출되었다. 시카고 연준도 221일에서 31일 사이에 금보유량이 15% 감소했다. 보스턴, 필라델피아 연준에도 금이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금본위제도 하에서 금의 부족은 통화공급 축소를 의미한다. 193212월부터 미국 산업생산은 감소세로 돌아섰고 실업률은 20%대로 치솟았다.

 

루스벨트 취임일인 193334일 토요일, 뉴욕주와 일리노이주는 마침내 은행 휴업을 선언했다. 그때까지 은행 휴업을 선언한 주는 48개주 가운데 30개에 이르렀다. 두 금융중심지의 휴업은 사실상 미국 금융시스템의 마비를 의미했다. 은행 문이 닫히자 현금이 부족해지고, 임시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다.

 

1931년 뉴욕 뱅크오브유나이트드스테이츠 주변에 집결한 시위대 /위키피디아
1931년 뉴욕 뱅크오브유나이트드스테이츠 주변에 집결한 시위대 /위키피디아

 

루스벨트는 최악의 상황에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35일 일요일, 루스벨트는 취임후 첫 조치로 전국의 모든 은행에 대해 휴업하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그는 의회에 특별회기를 요청해 긴급은행법과 대통령의 법안발의권을 제의했다.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는 대통령이 요구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통령은 금융위기를 헤쳐 나갈 전권을 위임받았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전면 휴업에 들어간 은행들을 단계적으로 풀면서 옥석을 가렸다. 부실한 은행을 우량 은행에 통폐합하고 재건금융공사(RFC)로 하여금 합병은행에 출자지분을 갖게 했다. 대대적인 은행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이다. 또 중앙은행(연준)이 국채를 담보로 은행권을 발행하도록 했다. 이에 연준은 유동성을 늘려 은행에게 자산을 빌려줄수 있게 되었다.

 

루스벨트 정부는 은행 자산을 불려 주면서 동시에 은행들에 대해 까탈스런 심사를 했다. 심사를 통과한 은행들은 일주일후인 313일부터 영업을 재개했다. 처음엔 연방준비은행이 문을 열었고, 그다음엔 재정상태가 좋은 은행이 순차적으로 영업을 재개했다.

루스벨트의 긴급처방은 은행의 재정상태를 건실하게 했다. 부실은행은 정리했다. 이런 조치들은 은행의 신뢰를 회복시켰다. 예금자들은 은행에 돈을 맡겨도 떼일 염려가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한달후 은행들이 완전하게 영업을 재개했을 때 10억 달러 이상의 달러가 은행에 예치되었다.

은행들의 지급불능 사태는 빠르게 진정되었다. 영업을 중단한 은행이 19312,294, 19321,484개나 되었지만, 1934~1940년에 걸쳐 448개에 불과했다. 루즈벨트 집권 이후 은행 도산수가 연평균 60개 정도로 줄어 들게 되었다.

 

취임 한달쯤 되는 45일 루스벨트는 행정명령 6102(Executive Order 6102)를 발동했다. 근거는 전시법인 적성국교역법(Trading with the Enemy Act)였다. 지금이 전쟁중이라나 다름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 것이다.

이 명령은 개인이 금화(gold coin), 금괴(gold bullion), 금증서(gold certificate)를 소지하지 못하게 했다. 다만 수집용 희귀금화와 1인당 100달러(5온스)의 금에 한해 개인소지를 허용했다. 이를 어긴 경우 1만 달러의 벌금 또는 최고 10년형을 때리겠다고 선포했다. 달러 절하를 기대하고 금을 축적했던 미국인들이 금을 내놓았다. 연방정부는 1온스당 20.67달러의 비율로 금을 교환해 주었다.

이 금 강제환수 조치로 연준의 금이 축적되었고 통화량이 늘어났다. 개인들은 1년후에 닥칠 달러 절하의 차익을 놓치게 된 것이다.

 

1934년 F.D. 루즈벨트 대통령이 금본위제 이탈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34년 F.D. 루스벨트 대통령이 금본위제 이탈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루스벨트는 이제 금본위제도를 유지하겠다는 공약을 파기할 단계에 이르렀다. 1934130일 루스벨트는 대통령령으로 정화준비법(Gold Reserve Act)을 발령했다. 이 조치로 미국은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달러와 금의 교환비율을 1온스당 20.67달러에서 35달러로 70% 절하했다.

달러의 금 태환이 포기되자 해외에서 금이 미국으로 쏟아졌다. 1934년의 황금사태(gold avalanche)로 비어가던 연준의 금고를 가득채웠다. 마침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해 전운이 감돌자 유럽의 금이 전쟁터가 되지 않을 미국으로 이동해 왔다. 193312월에서 19347월 사이에 미국의 금괴는 494천만 달러에서 79억 달러로 96%나 팽창했다.

금이 쌓이자 연준은 통화량을 늘렸다. 통화량 증가는 경제회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미국은 대공황의 수렁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1933년 5월 1일, 루즈벨트의 행정명령 6102호 /위키피디아
1933년 5월 1일, 루스벨트의 행정명령 6102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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