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원자폭탄에 희생된 조선의 왕자 이우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희생된 조선의 왕자 이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1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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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날에 장례식…조선의 자존심 지키며 한국 여인과 결혼, 야스쿠니에 합장

 

허진호 감독의 영화 <덕혜옹주>에 배우 고수가 잠깐 등장한다. 고수는 영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화속 스토리의 사실 여부는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고수가 분장한 이우(李鍝)는 대한제국의 왕자였다. 그는 왕족 중에서 가장 조선인으로 살고자 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다 갔다. 덕혜옹주는 그의 고모이고, 1912년생으로 이우와 동갑이다.

이우(1912~1945)19121115일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人)이다.

경성유치원과 종로소학교를 졸업하고 192210살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유년육군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급우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일본사람을 병적으로 싫어하고 경쟁의식도 남달라 공부뿐 아니라 운동 등 모든 면에서 일본급우들보다 우수했다고 한다. 또한 민족자부심이 대단해 술자리에서는 늘 조선 노래인 황성옛터를 불렀다.

 

영화 ‘덕혜옹주’에서 이우 왕자로 분한 배우 고수 /네이버영화
영화 ‘덕혜옹주’에서 이우 왕자로 분한 배우 고수 /네이버영화

 

이우는 꽃미남 왕자로 알려져 있다. 2000년대에 이우의 사진과 일화가 소개되면서 네티즌들의 사이에 얼짱 황손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우가 일제의 조선왕실 관리부서 이왕직(李王職)과 크게 마찰을 빚은 것은 결혼문제였다. 그는 일본 황실가와의 결혼 요구를 끝까지 반대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박찬주(朴贊珠)라는 조션 여인이 있었다.

박찬주는 갑신정변의 주역 금릉위 박영효(朴泳孝)의 손녀딸이다. 박영효는 이우의 아버지 의친왕 이강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자연히 집안의 왕래가 있었다. 박영효의 부인은 강화도령 철종이 후궁에게서 낳은 영혜옹주였다. 박영효는 왕실의 부마로 일제 강점기에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의 거두로 변질되었다.

어쨌든 박찬주는 그 무렵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이우와 박찬주는 일본 유학시절뿐 아니라 장충단공원에서도 데이트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왕직(李王職)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끝내 결혼을 했다. 조선에서는 주로 운현궁 안에 있는 서양식 양관에서 생활했다. 이우와 박찬주와의 사이에서 이청, 이종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이우와 박찬주 (1935년) /위키피디아
이우와 박찬주 (1935년) /위키피디아

 

이우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후에 중국에 파견돼 군생활을 한다. 그곳은 중국 팔로군과 조선 의용군이 합세해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가 연일 계속되는 곳이었다. 조선의용군을 자주 만날 개연성이 큰 환경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그들을 지원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이곳에서 그의 육사 동료에게 조선인으로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치욕스러워 했다고 한다. 전쟁 막바지, 일본의 패색이 깊어질 때 일본 본토 귀환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조국 조선군 사령부의 근무를 희망했다. 심지어는 설사약을 먹고 귀대일자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매일신보'의 사망 기사 (1945년 8월 9일자) /위키피디아
'매일신보'의 사망 기사 (1945년 8월 9일자) /위키피디아

 

그러던 중 194586일 히로시마(廣島), 출근길이었다.

비운의 왕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원인모를 육중한 물체가 무엇인지 바라보다가 온몸에 화상을 입고 길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 물체는 다름 아닌 원자폭탄이었다. 출근이 늦어 전속부관이 찾아 나섰다가 길바닥에 거꾸러진 이우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87일 절명했다. 꽃다운 나이 33세에 조선의 왕자는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죽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장례식은 일제의 압제가 풀리던 1945815일 오후 1시에 열렸다. 장례식은 그 순간에도 권력을 놓지 않았던 일본의 조선육군사령부 주관으로 치러졌다. 장례식장이었던 경성운동장은 1925년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상징적 공간이었다.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이다.

장례는 원래 정오에 예정이었으나 태평양전쟁에서 무조건 항복한다는 천황의 항복방송으로 늦춰진 것이다. 조선왕가의 비운의 왕자 장례식이 하필 천황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공간에서 항복 방송을 하는 엇비슷한 시간에 이뤄진 것이다.

 

사관학교 동기생인 일본 황족 아사카 다케히코는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이우는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운현궁의 가정교사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 했다고 증언했다.

영친왕비 이방자는 이우 공은 평소 성격이 활달하면서 명석한데다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인들에게 말썽꾸러기였다.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만큼 싫어하였고, 특히 일본 음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혼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태평양전쟁 전몰자 240만여명의 위패가 있고, 그중 2만여명이 조선인이다. 이우의 자손들이 끊임없이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 명단에서 삭제해 주기를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조선왕실에서 태어나 원치 않는 일본 유학을 떠나 일본학교를 나와 일본군복을 입고, 적이 아닌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다가 일본 땅에서 죽었다. 그리고 혼마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일본인들의 절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우 왕자 /위키피디아
이우 왕자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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