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 왕국 실직국②…철기 제작
사라진 고대 왕국 실직국②…철기 제작
  • 아틀라스
  • 승인 2019.04.2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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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후 반란 일으켰으나 신라에 제압당해…사민정책으로 실직국 고유문화 상실

 

실직국은 포항의 실직곡국을 차지하기 위해 2년후인 파사이사금 25(104)에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신라는 병사를 보내 실직국을 토벌하고 평정했다. 그리고 삼척, 울진등지에 살고 있던 실직 국민을 남쪽 변경으로 옮기도록 사민(徙民)정책을 취한다.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실직국이 2세기초인 파사이사금 25년에 멸망한다.

실직국 백성들은 고향땅을 등지고, 아마도 신라와 금관국과의 경계지역인 부산 또는 경상남도 일대로 보내져 가야와의 전투에 동원됐을 것이다. 고대에 나라 잃은 백성들은 노예나 다름없다. 실직국인들은 슬플 겨를도 없이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남부여대(男負女戴). 삼척에서 부산까지, 그들은 마치 6.25 때 피난행렬처럼 아이와 가재도구만 이고지고 쫓겨갔다.

이에 비해 압독국은 처음엔 신라에 고분고분했다. 실직국이 멸망한지 2년후인 106년 정월에 파사임금은 압독에 행차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해주는등 유화정책을 취했다. 파사 임금이 3월에 돌아왔으니, 두달 동안 압독에 머물며 점령지의 반란세력을 소탕하는 한편 백성들을 신라로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압독국 사람들은 40년후인 일성이사금 13(146)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는 병사를 일으켜 평정하고, 실직국인들에게 취했던 것처럼 남은 백성들을 남쪽지방으로 쫓아냈다.

정복국가 신라의 이중적 모습을 보여준다. 고분고분하면 도닥거려주고, 저항하면 말살시키는 정책이다. 고대나 현대나 전쟁은 가혹한 것이다.

 

실직국 본거지 위치 /김현민
실직국 본거지 위치 /김현민

 

삼척에는 실직군왕릉, 실직군왕비릉이 있는데, 신라에 패망한 실직국과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 오히려 실직국을 멸망시킨 신라 왕족의 비석이며, 삼척 김씨의 시조묘로 모셔지고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실직군왕릉은 삼척시 성북동에 위치하고, 왕비릉은 왕릉에서 2km 떨어진 사직동에 있다.

실직군왕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제8자인 김추(金錘)의 아들 김위옹(金渭翁)의 무덤이다. 고려 왕건은 마의태자가 무리를 이끌고 강원도 산간에 숨어버리자 유화책으로 경순왕의 여덟째 왕자 김추(金錘)에게 문하시중(門下侍中) 자리를 주고, 삼척군(三陟君)으로 책봉(冊封)하고, 관향(貫鄕)을 삼척(三陟)으로 삼게 했다. 왕비릉의 주인공은 밀양 박씨다.

실직국을 다스리던 왕조는 전설 속에 사라지고, 실직국을 멸망시키고, 그 강역을 지배한 경주김씨의 후손이 실직군왕에 임명돼 오늘날에도 그 무덤이 보존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실직국에 대한 공식 기록은 삼국사기 파사이사금조의 짧은 스토리 밖에 없어 실체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최근 영동지방에 개발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철기시대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영동지방의 유물들을 분석해 본 결과,

강릉 중심의 예국과 삼척 중심의 실직국이 동해안을 활동무대로 한 예족 계통이며,

실직국은 북쪽으로는 지금의 강릉시 옥계면 지역, 남쪽으로는 경북 동해안 일대(울진, 평해, 영덕, 청하)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동해시 송정동 유적은 1996년 관동대 발굴팀이 처음으로 조사한 이래 지금까지 20여차례나 여러 조사기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송정동 마을 유적은 기원 무렵부터 4~5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600호 정도의 대규모 마을로 평가되고 있다.

동해시 망상동, 삼척 증산동, 삼척 하맹방리, 삼척 호산리등지에서도 철기시대의 유적지와 유물들이 연이어 발굴되고 있다.

 

2,000년 동안 숨겨진 실직인들의 삶이 타임캡슐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동해와 삼척 일대의 철기시대 유적지를 조사한 내용을 간추려 본다.

마을이 하천과 동해가 만나는 사구지역에 형성돼 있다. 한강, 임진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주거형태인 자형, 자형 주거지가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나타난다. 영동의 예족과 영서의 맥족이 같은 형태의 주거 형태를 운영한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예족과 맥족이 동일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동해 송정동 유적은 영동지방에서 발굴된 최대 규모의 마을 유적지인데, 다양한 모양의 토기, U자형 삽날, 철촉, 철모, 은제 귀걸이, 관옥, 유리구슬, 동경의 재가공품인 파경등이 출토돼, 실직인들의 생활 형태가 파악되고 있다.

특히 송정동 유적에서는 송풍관, 철기 부산물이 출토됐는데, 여기서 발굴된 철기들을 조사하면 단야공방지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기원 1세기말, 늦어도 2~5세기 무렵까지 운영됐을 것으로 보이는 단야공방지는 이른바 대장간이다. 철에 열을 가해 모양을 변형시키고 담금질해서 가공하는 작업을 하는 곳이다.

실직국이 철기시대에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실직국의 유적지에서 대장간이 있었다 함은 어디서인가 쇳덩어리를 수입했을 것이다. 그 곳이 바로 금관국이었을 것이다. 파사이사금조의 실직국-음집벌국의 영토분쟁은 동해 송정리에서 가공할 쇠를 거래하기 위해 멀리서 기항지를 찾던중 벌어진 사건이었던 것이다.

송정리 유적에서는 한식계 토기, 유리옥 제품, 파경(破鏡)의 재가공품, 청동 소환등이 외래 문물이 발견되는데, 실직국이 외부와의 접촉이 잦았음을 보여준다. 실직국은 해상을 통해 변한, 진한, 마한은 물론 낙랑까지 문물을 교역했던 것이다. 고대엔 태백산맥을 넘어 한강 또는 대동강 유역까지 거래하기 어려웠고, 해상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강원도 영동지방의 철기시대 유적에서는 무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발견되는 무덤은 신라의 지배를 받은 후의 것이고, 실직인들의 무덤은 아직 발굴된 게 없다. 마한, 변한, 진한, 강원도 영서지방의 맥족등 고대 부족국가들에게서 무덤이 발견되는 것과 상이하다.

고고학계에선 옥저(沃沮)의 세골장(洗骨葬) 풍습을 실직국이 공유한게 아닌가 해석하고 있다. 유해를 일정 기간 보존한 후 남은 뼈만 씻어서 납골해 다시 장사지내는 장례법을 말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옥저에는 세골장을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옥저와 예국, 실직이 동일 계통의 종족이어서 비슷한 장례법을 운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공중에 만들어 놓은 대형 목곽에 뼈를 추려 안치할 경우 2,000년의 세월을 지내며 남아있기 어렵다.

 

영동지방의 유적 발굴지에서 실직국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과 유물은 3세기 후반부터 사라지고 신라의 유적으로 전환된다. 2세기초 파사임금에 의해 실직국이 멸망하고 유민이 남쪽으로 이주한후, 실직국의 고유문화가 소멸하고, 신라의 것이 이를 대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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