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뉴딜정책②…“시장 역행” 자애로운 독재자
실패한 뉴딜정책②…“시장 역행” 자애로운 독재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12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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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A 통해 생산-가격-임금 통제…기업투자 위축, 대법원 위헌판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 가운데 대표적인 입법이 국가산업부흥법(NIRA: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과 농업조정법(AAA: Agricultural Adjustment Act)이다. 두 법의 공통 목표는 국가가 개입해 산업과 농업 부문의 과잉 생산을 통제하고 가격을 올리는 것이다. 업종의 특성에 따라 규제의 방법과 수단이 다르지만 국가만능주의, 국가자본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법안들이다.

법안의 입법자와 집행자들은 시장의 기능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laissez faire)이 과당경쟁에 의해 과잉생산을 초래해 가격을 떨어뜨리고, 탐욕적인 기업인이 원가 절감을 위해 고용을 줄이기 때문에 국가경제를 불황의 나락에 떨어뜨렸다고 믿었다. 이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국가가 시장을 통제해 생산을 조절하고, 분배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칩권 초기의 브레인이었던 레이먼드 몰리(Raymond Moley) 컬럼비아대 교수는 1차 대전 때의 전시산업위원회를 산업통제의 모범으로 보고 이를 부활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 기간에 이 위원회의 육군 대표였던 휴 존슨(Hugh S. Johnson) 예비역 준장을 천거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야심작인 국가산업부흥법을 수행할 국가부흥국(NRA: 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의 책임자에 존슨을 임명했다. 루스벨트는 NRA를 출범시키면서 기업의 자발적인 협력으로 일자리를 되찾겠다면서 이기적인 이해관계에 빠지느냐, 공동의 위험에 굳건하게 대항하느냐가 관건이라 말했다.

NRA2년 단위의 한시조직으로 출발해 성공하면 수명을 연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존슨은 전 산업을 업종별로 세분화하고, 업종별 단체를 통해 자율 규약을 맺도록 했다. 업종별로 상대기업을 죽이는 파괴적인 과당경쟁을 지양하고, 기업인들이 협조해 적정 생산과 가격을 찾도록 하는 이른바 산업 자치(industrial self-government)를 추구했다.

아울러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주고 소년노동을 금지하는 노사 협력도 동시에 추진했다. 정부와 기업, 노동자가 서로 양보를 통해 생산과 노동 댓가의 적정선을 찾는다는 전략이었다. 노사정 협력의 차원에서 기업에 노조탈퇴를 강요하는 황견계약(yellow dog contract)을 금지하고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설립을 보장하도록 했다. 또 동일 업종에 동일 임금을 적용하도록 업종별 규정(code)에 넣도록 강요했다. NRA는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해 업종별로 시간당 20~45센트로 정하도록 했고, 노동시간도 주간 35~45시간으로 제한하도록 했다. 노동시간을 단축해 일자리를 늘리자는 시도였다.

 

NRA 기념우표 /위키피디아
NRA 기념우표 /위키피디아

 

존슨이 이끄는 NRA는 업종별 단체에 막강한 힘을 부여했다. NRA는 단체를 매개체로 활용해 업종별 생산량 할당, 적정원가 산출을 통한 가격 협정, 시장 진입 규제를 규약화할 것을 요구했다.

존슨과 몰리는 효율적 산업 통제를 위해 반독점법을 폐기할 것을 건의해 받아들여졌다. 루스벨트 정권내 반독점 지지자들은 불만을 드러냈지만 대통령의 위압에 목소리를 죽였다.

단체들은 동종업종의 기업인들을 불러 공정경쟁 규약을 작성하고 가격 유지를 위해 생산량을 할당했다. 각 단체가 업종별 규약을 만들어 NRA에 보고하면, 그 자체가 법률적 효과를 가졌다.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시달리던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서도 NRA의 집산주의에 동참했다. 기업들은 경쟁하기보다 통제를 통한 안정을 바랐다.

기업의 생산을 제한하기 위해 공장가동 시간을 정하거나 생산량이 할당되었다. 재고를 통제하고, 공장 건설과 확장, 폐쇄된 공장의 재가동 등도 업종별 규정에 의해 통제되었다.

업종 단체들은 가격경쟁을 제한하기 위해 최저가격제를 도입하고 끼워팔기, 보상판매, 복합판매 등 비가격 경쟁요소도 통제했다. 이윤을 줄여 가격을 하락시키지 않도록 최저이윤제도 제안되었다.

기업간, 노사간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업종에는 NRA가 직접 개입해 합의점을 도출했다. 이렇게 해서 19337월말에 209개의 산업규정이 NRA에 제출되었다.

 

처음에는 NRA의 산업통제가 먹혀들어가는 것 같았다. 19333월부터 7월까지 산업생산성이 빠르게 상승하고 실업률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존슨은 NRA 코드를 전산업에 확산시키기 위해 블루이글(Blue Eagle) 캠페인을 추진했다. 독수리는 미국의 상징이다. 존슨은 푸른 독수리가 한쪽 발에 기계산업의 상징인 기어, 다른 발에 신산업인 전기를 잡고 날아가는 그림을 그려 NRA 코드에 수락한 기업들에게 회사 정문에 부착하도록 했다. 블루이글을 게시한 기업은 애국 기업이요, 게시하지 않은 기업은 비애국기업으로 지목되었다. 소비자들은 블루이글 딱지가 붙은 제품을 선호했다.

이런 정치성 캠페인을 통해 19355월에에 NRA 코드에 동참한 기업의 노동자들은 전체 산업노동자의 95%에 이르렀다.

 

타임지의 휴 존슨 /위키피디아
타임지의 휴 존슨 /위키피디아

 

대다수 기업들은 NRA의 요구를 아무런 불만 없이 따랐지만, 포드자동차의 헨리 포드는 합류를 거부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알리스테어 크룩(Alistair Cooke)은 루스벨트의 NRA를 빗대 자애로운 독재”(benevolent dictatorship)이라고 꼬집었다.

NRA의 책임자 휴 존슨이 이탈리아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숭배한 기업국가론(Corporate State)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존슨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제치고 1933년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NRA의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조직이 설립된 그해 하반기 들어 미국 경제는 다시 위축되었고, NRA 코드의 문제점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전체 산업을 통제한다는 시도 자체가 모순이었다.

업종별 동일임금과 동일가격은 대기업에게 유리했다. 대기업은 대량생산 설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신생기업이나 성장과정에 있는 기업들에 비해 원가경쟁력에 앞섰다. 또 표준화되지 않은 제품을 생산하는 업종과 진입이 쉬운 업종에서는 NRA 코드는 합의를 이끌어 내기 어려웠다. 목재의 경우 치수에 따라 각각 가격이 따르고 산지와의 근접성에 따라 원가가 달리 산정되었는데 동일 가격을 설정하는 게 어려웠다. 제품의 크기와 소비자 계층에 따라 다른 가격을 획일적으로 통일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NRA의 산업통제는 오히려 대기업을 육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독점론자들도 숨죽였던 목소리를 높였다. 보다 급진적인 계획경제론자들은 업종별 산업자치보다는 정부가 직접 통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계의 불만도 컸다. 노조 설립을 보장해 가입률이 높아지긴 했지만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 사이에 동일임금 적용을 놓고 대립이 격화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에게 경쟁을 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는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기업의 입장에서 정해진만큼 생산하면 적당한 가격이 보장되는데 굳이 생산성을 높이거나 인력을 충원할 필요성이 없었다. 시장 진입을 막아 놓았기 때문에 신상품으로 도전하는 기업인의 진취력도 사라졌다. 1933년 하반기부터 미국 경제의 성장이 둔화하고 실업률은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NRA가 경기회복의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루스벨트와 그의 집행자 존슨의 판단은 오류로 드러났다. 1930년대 대공황은 산업의 과잉생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경기 회복을 위해 유휴화된 자원을 다시 사용해야 했다. 루스벨트와 그의 지지자들은 기업의 과잉생산을 막으면 경기가 회복될줄 알았지만 경쟁억제는 오히려 투자를 위축시켰다.

 

뉴욕 루스벨트 기념관의 NRA 표시물 /위키피디아
뉴욕 루스벨트 기념관의 NRA 표시물 /위키피디아

 

NRA의 몰락은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 시장이 정부 통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NRA 코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코드 위반사례들이 나타났다. 코드가 모든 생산과 거래를 제한하지 못했다.

뉴욕 부르클린에 닭을 생산하는 쉑터(Schechter)라는 유태인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병든 닭을 팔았고 구매자가 닭을 선택해 사갈 수 있도록 했다. 경쟁업체들은 쉑터 형제의 회사(A.L.A. Schechter Poultry Corp)가 청정 닭을 팔아야 하고 고객이 닭을 선택할 수 없도록 한 가금류 업종의 NRA 코드를 위반했다고 고발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이 사건을 시범사례로 보았고, NRA는 쉑터 회사를 법원에 제소했다. 재판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1935527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쉑터 형제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원일치였다. 대법원은 NRA 코드가 연방정부가 규제할 사항이 아니라며 NRA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루스벨트는 기자회견을 열어 격분하며 대법원을 규탄했지만 더 이상 NRA를 지속시킬수는 없었다. 이로써 NRA는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산업통계를 담당하는 조직으로 축소되었다.

곧이어 193616일에 후삭 밀스(Hoosac Mills) 사건에서 대법원은 농업조정법(AAA)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루스벨트가 야심차게 밀어붙인 두 법안은 힘을 잃게 되고 뉴딜정책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NRA가 무력화되면서 기업들은 규제의 족쇄에서 벗어나 서서히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고, 느리지만 회복의 기력을 되살리게 되었다.

 

NRA의 불루이글 /위키피디아
NRA의 불루이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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