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뉴딜정책③…돼지 죽이고 면화밭 뒤엎고…
실패한 뉴딜정책③…돼지 죽이고 면화밭 뒤엎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13 18: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산물가격 지지 위해 농민에게 생산량 할당…대법원 위헌 판결로 종료

 

미국은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최대의 농업국이 되어 있었다. 교전국들이 경쟁적으로 미국에서 식량을 사갔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후 유럽 각국에서 농업을 재개하면서 미국의 곡물 수출이 줄고 세계곡물시장의 가격이 급락했기 때문에 1920년대부터 미국 농업은 만성적인 불황에 시달렸다.

농업 불황은 대공황 이전부터 시작되어 공황의 쓰나미가 닥치자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토지 소유자들은 은행들의 담보처분으로 고향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었다. 도시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날품팔이 생활을 하며 방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풍경을 그린 소설이 존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농업정책을 우선했다. 농업 부문의 뉴딜 정책은 1933~1940년 동안에 농무장관을 맡은 헨리 월리스(Henry A. Wallace)가 맡아 추진했다.

루스벨트가 의욕적으로 벌인 사업은 농촌 재정착운동이다. 루스벨트는 재정착국(RA: Resettlement Administration)을 신설해 도시의 유랑민을 농촌으로 보내 재정착을 도와주는 조치를 취했다. RA는 캘리포니아와 중서부 건조지대 국유지 또는 주 소유지에 95개의 캠프촌을 만들어 1억 에이커(40)를 농지를 개간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다. 캠프촌에는 상수도를 공급하고 부대시설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떠돌던 사람들이 정착촌에 들어갔지만 기초시설이 부족해 원성을 샀다.

또 청년실업을 구제하고 자연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시민자연보호단(CCC: Civilian Conservation Corps)을 조직했다. 17~28세의 젊은이들을 가입시켜 농촌지역의 자연보호활동을 하게 했다. 젊은이들에게 시킨 일은 작은 다리 놓기, 전망대 설치, 제방 쌓기, 삼림 가꾸기, 삼림 방화지역 구축에서 긴급구조사업, 모기잡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가족생계를 도와야 하는 청년들에게 한달에 30달러(지금 가치로 600달러, 70만원 상당)을 주고 이중 25달러를 보모에게 보내도록 했다. 이런 쥐꼬리 급여에도 CCC에 참여하는 인원은 많았다. 한때 30만명의 단원이 활동했고, 대공황기 9년 동안 3백만명이 이 조직을 거쳐갔다.

 

대공황 때 농촌 재정착 운동 일환으로 만들어진 주택(캘리포니아) /위키피디아
대공황 때 농촌 재정착 운동 일환으로 만들어진 주택(캘리포니아) /위키피디아

 

이런 사업은 실업자 구제책이었고, 농촌을 재건하지는 못했다. 농촌 살리기는 1920년대초에 비해 절반으로 떨어진 농산물 가격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농산물 가격이 떨어져 미네소타의 밀밭은 추수를 하지 않아 썩어 들어갔고, 오레건주의 양떼는 도살되어 버려졌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루스벨트는 취임하자마자 1933512일 농업조정법(AAA: Agricultural Adjustment Act)을 제정하고, 농업에서도 계획경제를 실시했다. 이 법을 토대로 생산량을 줄이고 농산물 가격을 지지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중가격제도가 운용되었다. 정부가 물가상승율과 농업의 이윤을 감안해 적정가격을 고시하고, 생산량을 조절해 고시가격까지 끌어올리는 패리티 가격(parity price) 제도를 시행했다. 이를 통해 농민들에게 전쟁 전의 가격대로 생산물을 팔도록 한다는 것이다.

농산물 가격을 올리기 위해 생산을 줄여야 했다. 여러 가지 방법이 도입되었다. 우선 생산을 제어하고, 할당된만큼 생산한 농민에게는 복지수당을 주며, 상환청구권이 없는 여신을 농민들에게 제공했다.

농무부는 이 규약에 동의해 서명한 농민들에게 상품신용공사(Commodity Credet Corporation)에서 대출을 받도록 했다. 농산물의 시장가격이 정부의 고시가격만큼 오르지 못할 때엔 농민은 대출을 갚지 않아도 되고, 대출자인 상품신용공사는 대신에 농산물을 가져갔다. 이에 비해 상품 가격이 고시가격보다 오르면 농민은 농산물을 판 돈으로 대출금을 갚도록 했다.

농무부는 또 농산물 과잉생산을 억제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생산할당량을 배정했다. 농무부는 생산목표를 정하기 위해 시장위원회를 신설했다. 생산량이 많아지면 잉여 농산물은 버리거나 냉동 창고로 보냈다. 잉여농산물은 정부 수매창고로 들어갔고, 정부의 비축물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문제점도 발생했다.

 

시민자연보호단(CCC) 단원들이 캠프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위키피디아
시민자연보호단(CCC) 단원들이 캠프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위키피디아

 

농업조정법은 소비에트식 집산주의를 강요했다. 농민들은 정부의 계획에 의해 높은 가격을 받았지만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 버렸다. 농민들은 정부가 시키는대로 농사를 짓기만 하면 되었다. 당시 갤럽 조사에 따르면 농민 대다수가 농업조정법에 반대했다고 한다.

정부의 할당량을 거부해 초과생산을 한 농민들에게는 중과세를 물렸다. 목화를 초과 생산한 농민에게는 시중 가격의 50%에 해당하는 세금을 물렸다. 담배의 경우 초과 생산 농민에게 판매가의 3분의1에 달하는 세금이 부과되었다.

할당량에 대한 보상 재원은 가공업체에게서 조달되었다. 농부들이 땀 흘려 생산한 농산물을 활용해 가공업체들이 손쉽게 돈을 번다는 사회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결과다. 가공업체에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고 이를 통해 확보된 재원이 할당량을 이행한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농축산물의 계획생산은 과잉생산물에 대해 집단 폐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농업조정국은 돼지값 안정을 위해 새끼돼지 6백만 마리를 도살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또 과잉 재배된 목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1천만 에이커(4)의 목화밭을 갈아 엎기도 했다. 전국 목화 농경지의 4분의1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목화밭을 갈아 엎은 소작농에게는 1에이커당 11달러의 보상금이 주어졌지만 그 돈은 결국 지주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1942년 테네시주의 농촌마을 모습 /위키피디아
1942년 테네시주의 농촌마을 모습 /위키피디아

 

하지만 농산물은 정부의 계획에 의해서만 조절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자연재해가 수시로 닥쳐왔다.

1934년과 1936년에 남부지역과 중서부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발생했다. 밀 생산량은 급격히 줄었고, 가격은 폭등했다. 곡물 1부셸 가격이 193232센트에서 193352센트, 193484센트, 1936년엔 104센트로 급등했다. 목화, , 보리, 사탕수수, 귀리, 땅콩, 건초, 감자 등 모든 농산물 가격이 올랐다. 하지만 정작 농민들은 팔수 있는 농산물이 없었다.

 

농촌에서 생산한 농산물 소비를 확대하기 위해 도시 서민들에게 푸드 스탬프(Food Stamp)를 지급했다. 사회보장제도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 제도는 정부가 구매한 농산물을 도시의 극빈층에게 제공하는 제도로, 아직도 시행되고 있다.

 

뉴딜 정책의 핵심 중 하나인 농업조정법도 1936년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정부가 농민에게 생산량을 강요하고 보상금을 주는 농업조정법의 규정이 입법부에 위임된 사항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가 농산물 생산을 할당하는 농업조정법은 폐기되고, 헌법 정신에 맞는 다른 여러 법이 제정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의 핵심으로 추진한 국가산업부흥법(NIRA)가 농업조정법(AAA) 모두가 위헌 판결이 나자 새로운 방법으로 활로를 개척했다. 기업들을 옥죄고 노동자들을 부추기는 법률이 연속으로 제정되어 1935년부터 시작하는 2차 뉴딜정책은 보다 급진적으로 변하게 된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