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뉴딜정책④…반기업-친노동으로 선회하다
실패한 뉴딜정책④…반기업-친노동으로 선회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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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증세, 대기업 사내유보금에 과세…사회보장제도 확립, 노동우호정책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지향했던 뉴딜 정책은 대법원의 잇따른 위헌 판결로 좌초되었다. 초기 뉴딜의 두 축인 국가산업부흥법(NIRA)와 농업조정법(AAA)이 무력화되면서 기업 투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내구재 생산이 늘고 뉴욕증시가 단기 반등했다. 재계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책을 비난했다. 대통령은 재계의 비난에 격노했다.

 

루스벨트의 최대 정적은 대법원이었다. 1935년 봄부터 대법원이 연이어 뉴딜 법안에 위헌판결을 내리자, 루스벨트는 부자와 대기업들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경제사학계에서는 1933~1934년을 제1기 뉴딜, 1935~1936년을 제2기 뉴딜이라고 구분한다.

2기 뉴딜의 첫 번째는 부자 증세였다. 1935년 루스벨트는 상속세와 증여세 세율을 올리고 고소득자에 대한 누진세율을 급격하게 인상했다. 연간 소득 100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자에겐 세율 75%를 적용하고, 500만 달러를 넘은 사람에겐 79%를 적용했다. 이 세법은 부유세(wealth tax)라는 별명이 붙었다.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사람은 단 한사람, 스탠더드 오일의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였다.

부유층이 크게 반발했다. 그들은 루스벨트를 자기 계급의 적이라 부르며, 그 과세를 부자들을 빨아먹는 세금”(soak the rich tax)이라며 비난했다. 루스벨트는 뉴욕주 허드슨강 변에 대저택을 보유한 부유층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계급을 적대시했고, 현대 한국에서 지칭되는 일종의 강남좌파였다.

루스벨트가 부()에 대해 취한 두 번째 타깃은 대기업이었다. 루스벨트는 계획경제가 무산되자 대기업의 권한을 축소히고 중소기업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반독점론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밀러 타이딩스 법, 체인점금지 법, 로빈슨-펫먼 법등이 제정되었다.

반독점론자들은 1936년에 미배당이익세(undistributed profits tax)를 추진했다. 경영진들이 기업 이익을 임금이나 배당으로 적게 지출하고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두게 되면 부의 집중이 심화된다는 게 반독점론자들의 생각이었다. 기업의 미배당 이익에 세금을 매기면 기업들이 임금과 배당으로 더 많이 지출하고, 투자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본시장을 활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법안은 기업 이익단체와 공화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소기업들은 과세대상에서 면제되었으나 중견 이상 기업의 유보금에 7~27%의 세율이 적용되었다.

1938년에 반독점국장에 지명된 서먼 아놀드(Thurman Arnold)는 대기업 해체론자였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반독점 업무를 시작했을 때엔 유럽에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전운이 감돌고 전시체제에선 대기업의 군수물자 생산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신의 구상을 실천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루스벨트의 2차 뉴딜은 부자와 대기업을 공격하는 한편으로, 노동계의 권력과 이익을 보장하고 가난한 국민들에게 복지혜택을 나눠주는데 초점을 맞췄다.

1935년 루스벨트 행정부는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을 입법했다. 이 법의 골자는 실업보험, 노령연금, 취약계층 지원 등 세 가지다. 실업보험은 연방정부가 기업에서 자금을 조달해 기금을 조성하고, 운영은 각주에서 하도록 했다. 노령연금은 은퇴 또는 장애로 직장을 그만 두었을 때 수입을 제공하는 보험으로,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균등하게 납부하는 매칭펀드로 조성되었다. 또 신체장애인, 시각장애인, 극빈층 자녀에게 제도적으로 보조금이 지원되었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사회보장법 홍보용 포스터 /위키피디아
루스벨트 행정부의 사회보장법 홍보용 포스터 /위키피디아

 

노동조합의 권한을 강화하는 입법은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로버트 와그너(Robert F. Wagner)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에 와그너 법(Wagner Act)이라고 한다. 1935년 와그너 의원의 발의로 입법된 국가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은 미국 노동입법의 대헌장으로 간주되는데, 노동조합 결성권, 집단교섭권, 집단행동권, 파업권 등을 보장했다.

이후 1938년에는 미성년자 노동을 금지하고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주40시간 이상 노동에 대한 초과근무수당을 제공하는 근로기준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으로 노동자의 이익이 대폭 신장되었다.

와그너 법은 노동계를 분열시켰다. 1886년에 설립되어 기득권을 행사하던 노동총연맹(AFL: 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은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AFL은 미숙련노동자들이 와그너 법에 의해 노조에 가입해 조합을 장악할 것을 두려워 하며 미숙련노동자의 가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에 미숙련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가입시키려는 세력들이 산업별노동조합(CIO: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의 설립을 추진했다. AFLCIO의 설립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새 단체에 가입하려는 조합을 축출했다. 이의 반발로 CIO1936년에 AFL과 별도의 전국단위 노동단체를 설립했다.

CIO는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연대파업을 주도하고, 광산, 섬유, 자동차, 철강 등 산업별 조합을 결성해 산하에 두었다.

 

미국 연간 GDP 추이 /위키피디아
미국 연간 GDP 추이 /위키피디아

 

반기업-친노동 노선을 강화한 제2기 뉴딜 정책은 대공황의 늪에 빠져 있는 미국 경제를 회복시키는데 장애가 되었다. 미국 경제는 19375월부터 19385월까지 대공황기간 중 세 번째 불황에 빠졌다.

1937~1938년의 불황내 불황은 대공황 초기보다 심각했다. 19375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내구재 생산은 67% 하락하고, 19378~12월 사이에 주가는 41.5% 하락하고, 이듬해에 10% 추가로 하락했다. 실업률은 이 기간에 12%대에서 20%대로 상승했다.

 

이 불황은 2기 뉴딜 정책의 부작용에서 기인했다. 뉴딜 말기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기업들이 돈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2기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만든 미배당이익세였다. 대기업들은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물리자 유보금을 줄이는 대신에 임금과 배당을 늘렸다. 루스벨트 행정부가 의도한 바의 결과였다. 기업들의 유보금은 줄자, 당연히 투자가 급감했다. 투자 위축은 불황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인플레이션 요인은 새로 만든 노동법의 결과였다.

노동쟁의가 합법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임금인상투쟁이 벌어졌다. 전미자동차노조(UAW)는 사측과 협상을 벌여 초과수당을 1.5배 지급을 얻어냈고, 이에 따라 완성차업체들과 부품업체들의 인건비가 대폭 상승했다. 철강노조도 1936년 협상에서 11.7%의 임금 인상을 쟁취했다. 다른 대형 산업체들도 노조와의 협상에서 연쇄적으로 임금인상을 결정했다. 그 결과로 25개 대표제조업체의 명목임금이 19371월 시간당 63.8센트에서 7월에 71.1센트로 11.4% 인상되었고, 또다시 반년후에 10% 이상 올랐다. 이외에 초과임금수당, 각종 수당등이 신설되면서 기업의 인건비가 급증했다.

인건비 상승은 생산성 상승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기업들은 투자를 줄이고 인력을 절감하는 방향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기업 수익감소는 주가 폭락을 유발했고, 인력 감축은 실업률 증가로 이어졌으며, 투자 위축은 경기를 하방으로 이끌었다.

기업들이 임금과 배당으로 지급한 돈이 시중에 돈이 풀려나자 인플레이션이 나타났고, 연준은 지급준비율을 상향조정했다. 연준의 긴축 선회는 유동성 부족을 야기해 불황의 또다른 원인이 되었다.

1937~1938년의 불황은 혹독하지만 짧게 지나갔다. 중앙은행이 금리정책을 잘 운용했다거나, 루스벨트 행정부가 적극적인 부양정책을 취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 미국 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것이 그 이유였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을 합병하려 시도하면서 유럽 대륙에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유럽 각국은 전쟁에 대비하면서 군수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고 그 수요가 위축된 미국의 경제를 끌어올렸던 것이다.

 

샌프란스시코의 베이브리지. 대공황기에 만들어졌다. /위키피디아
샌프란스시코의 베이브리지. 대공황기에 만들어졌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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