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기사단 몰락시킨 장궁…백년전쟁서 위력 과시
중세기사단 몰락시킨 장궁…백년전쟁서 위력 과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1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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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장궁으로 프랑스 제압…프랑스, 대포 개발로 장궁에 대응

 

유럽 박물관 어디에서나 중세 기사들의 철모와 갑옷을 전시한 것을 보게 된다. 중세 기사들은 쇠로 만든 무거운 모자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면 보병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보병이 칼로 베어도, 화살로 쏘아도 철갑옷을 뚫지 못했다. 프랑크 왕국의 카를 마르텔(Karl Martell)732년 아랍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유럽을 침공했을 때 패퇴시킨 조직도 중세 기사단이었다. 중세 영주들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 기사들을 양성했다. 철모와 갑옷은 주로 독일에서 제작되었는데,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면 독일 대장간이 번성했다고 한다. 기사는 중세의 상징이었고, 봉건제도를 유지하는 군사력의 근간이었다.

그러면 유럽의 중세를 마감시킨 원인은 무엇일까. 칼 마르크스는 계급이론에서 부르죠아지가 등장하면서 토지를 소유한 귀족세력과 계급투쟁을 벌여 승리하면서 중세가 끝나고 근대에 접어들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중세를 무너뜨린 것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장궁(長弓, longbow)이라는 활이었다.

 

장궁의 위력을 보여준 첫 전투는 1346826, 북부 프랑스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크레시 전투(Battle of Crécy)였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병력은 대략 12,000명이고,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은 대략 3~4만명으로 추산되었다. 숫적으로 프랑스군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영국군에겐 적진이었다. 전투는 쉽게 결말날 것 같았다.

26일 아침,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연합군을 이끌고 크레시 근교 낮은 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방어적인 진형을 짠 후 모든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령했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군 중앙에 3개의 보병대를 배치했다. 완만한 경사에 역V자형으로 구성된 양익에 장궁병부대를 배치하고, 전방에 장애물들을 깔아 놓았다.

 

크레시 전투도 /위키피디아
크레시 전투도 /위키피디아

 

정오쯤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도착했다. 프랑스군 기사는 숫적으로 우세한데다 꾀죄죄한 잉글랜드 군을 무시했다. 필리프 6세는 즉시 전투준비를 명령했다. 제노바 용병들로 구성된 석궁병들에게 전열을 맡기고, 후방에 기사들을 배치했다.

선제 공격은 석궁병으로 구성된 제노바 용병이 맡았다. 15,000명의 석궁병이 일제히 잉글랜드군을 향해 화살을 소나기처럼 쏘았다. 필리프 6세이 이끌고 온 악단의 우렁찬 음악이 울려 퍼졌다.

조금후 잉글랜드군에 편제된 웨일스 농민군이 장궁을 응사했다. 이날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석궁은 처음으로 무용지물임이 확인되었다. 구식 석궁(crossbow)1분당 3-5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는데 비해 잉글랜드의 신식 장궁(longbow)1분에 10-20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게다가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숙련도가 높아 정확하게 과녁(프랑스병)을 맞췄다. 나무 방패도 뚫었다. 제노바 용병으로 구성된 석궁병은 엄청난 사상자를 낸 채 퇴각했다.

 

잉글랜드 군의 장궁 /위키피디아
잉글랜드 군의 장궁 /위키피디아

 

대결은 활의 대결을 넘어섰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보병들이 진군하는 동안에도 장궁을 쏘며 프랑스 기사들을 쏘았다. 장궁이 기사들의 철제 갑옷도 뚫었다.

프랑스 기사들이 줄을 맞춰 돌격했다. 하지만 프랑스 기사들은 경사와 진흙탕, 잉글랜드군이 미리 뿌려둔 장애물들 때문에 헤메다가 장궁병들이 쏜 화살 세례를 맞았다. 프랑스 기사들은 무려 16번이나 돌격 시도를 했지만 잉글랜드군의 전열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못했다. 밤이 되자, 필리프 6세는 총퇴각을 명했다. 결과는 프랑스군의 처절한 패배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제노바 용병들의 사상자는 1~3만명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왕자들은 물론 필리프 6세도 중상을 입었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 사망자는 150~250명에 불과했다.

 

크레시 전투는 1356년 푸아티에 전투, 1415년 아쟁쿠르 전투와 함께 백년전쟁(1337~1453)에서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이긴 3대 전투로 꼽힌다.

이 전투를 계기로 중세를 주름잡던 기사의 위력이 상실되고 보병의 중요성이 확인되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중세의 질서가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중세 군주들의 군비경쟁은 기사 양성이었다. 기사의 무용성은 기사계급을 몰락시켰고, 결국은 중세의 계급질서를 변화시켜 근대로 넘어가는 길을 열게 된다.

장궁으로 무장한 잉글랜드 군의 연전연승을 중단시키고 116간 지속된 백년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프랑스의 대포 개발이었다.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장궁을 이기는 무기 개발에 나서 마침내 화약을 장착한 대포 개발에 성공했다. 그 대포가 잔 다르크(Jeanne d'Arc)가 이끄는 민중 군대와 합쳐져 프랑스군은 잉글랜드 군을 물리칠수 있었다.

 

제노바 석궁병 /위키피디아
제노바 석궁병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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