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팽창 중단시킨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로마제국 팽창 중단시킨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1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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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패배 후 엘베강으로 진출 포기…헤르만, 독일민족의 상징으로 부각

 

고대 로마제국은 왜 독일을 점령하지 않았을까.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발해 현재의 프랑스, 스페인, 영국, 발칸반도, 소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를 영토로 만들어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하지만 유럽대륙에서 유독 독일에서 막혔다.

그 까닭은 로마군이 서기 9년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그 전투가 바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서기 9년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지역 베들레헴에서 어린이로 성장하고 있을 때다. 그해 99일 로마군 3개군단, 병력수는 2만만명 쯤으로 관측된다. 당시 세계 최강의 로마 군단이 아르미니우스(Arminius)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군에 몰살되었다. 이 전투로 로마는 더 이상 엘베강으로 진출하지 않고 라인강을 국경선으로 정하게 된다. 세계사의 큰 획을 긋는 전투였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전한다. “들판 한가운데에는 하얗게 빛바래 가는 인골들이 온통 흩어지거나 더미로 쌓여 있었다. 근처에는 무기의 파편과 말의 사지가 놓여 있었고, 사람의 머리가 나무줄기에 박혀 있었다."

숲속에서 벌어진 이 대살육전은 전투에서 군사력이 강한 쪽이 반드시 이긴다는 진리를 무너뜨리는 사건이다. 전술과 전략, 집단의 전투 의지, 지형·지물 이용 등이 전투를 판가름내는 요소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로마와 게르마니아 /위키피디아
로마와 게르마니아 /위키피디아

 

전쟁은 로마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로마 초대 황제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세계 정복을 꿈꾸며 게르만 지역을 정복하려 했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가 벌어질 때 아르미니우스의 나이는 25세였다. 그는 게르만족의 하나인 체루스키(Cherusci) 부족의 부족장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로마에 호의적이었다. 로마군에 입대해 로마 시민권을 얻었고 하급귀족인 기사계급(에퀴타스)에 올랐다. 이후 게르마니아로 돌아왔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을 따라 반란 진압에 투입되어 전투를 하면서 로마군의 잔학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트의 로마는 게르만 지역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그는 비밀리에 게르만 부족들의 연합을 결성했다.

서기 4, 로마의 장군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아에 진략해 여러 부족을 복종시켰다. 이어 서기 6년 로마군은 다시 중보병 65,000 , 1~2만의 기마병, 궁수 등 13개 군단 10만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했다. 그해 말 게르만 지역의 로마군 통수권은 푸블리우스 바루스( Publius Quinctilius Varus)에게 넘어갔다.

이 무렵 아드리아해 동쪽 일리리움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마군이 대거 이동하고, 게르만 지역엔 3개 군단만 남았다. 아르미니우스에겐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바루스는 3개 군단으로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 지역을 정벌할 채비를 갖춘다. 게르만 부족들은 로마의 지배에 곧 순순히 따를 것처럼 보였다. 앞서 바루스가 3개 군단을 이끌고 작전에 들어갔을 때, 아르미니우스는 토착민들을 이끌고 지원하기도 했다. 아르미니아의 철저한 속임수였다.

 

토이토부르크 숲 /위키피디아
토이토부르크 숲 /위키피디아

 

서기 9년 가을, 로마 군단이 라인 강 쪽으로 향했다. 로마군은 원시림 환경에서 전투 경험이 없었다. 로마군은 깊은 숲속을 헤쳐 나가기 위해 전투 진영을 풀었다. 비전투원인 군속들이 섞여 난장판이었다. 오스나브뤼크 북동쪽 숲 속에 진입하자 길이 매우 좁고 길어졌다. 게다가 강한 돌풍에 비까지 내렸다고 한다. 로마군은 15~20 킬로미터 정도의 긴 행렬을 이룬 채 행군했다.

어느 순간, 가벼운 검과 장창, 날이 좁은 단창(프레마에)으로 무장한 게르만 전사들이 뛰쳐나왔다. 게르만 복병들이 로마군을 완벽하게 포위했고, 투창이 비처럼 쏟아졌다.

로마에서 교육을 받은 아르미니우스는 적의 전술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곳곳에 흩어진 로마 군단병들을 각개격파했다. 로마군은 간신히 숙영지를 만들고, 일부가 포위를 뚫고 탈주했다. 그 과정에서도 상당한 손실이 발생했고다. 포위를 뚫고 탈주한 곳도 울창한 숲이었다. 폭우가 계속되면서 활의 줄이 젖어 로마군은 활도 사용할 수 없었다. 방패도 물을 흠뻑 먹어 무거워졌다. 로마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밤이 되자 로마군은 탈주를 계속했지만, 이번엔 아르미니우스가 함정을 판 곳에 이르렀다. 숲과 늪 사이의 좁은 길에만 걸을 수 있었다. 게르만족은 숲 속 가장자리에 쌓은 흙 벽에 숨어 로마군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벽을 무너뜨리려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대살육전이 벌어졌다. 게르만 전사들이 숲에서 뛰쳐나와 로마군을 마구 살육했다. 바루스는 자살했다.

로마군의 사망자는 15,000~2만명으로 장교들은 대부분 자살했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로마군 장교들이 게르만족의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져 솥에 삶겨 죽고 그 뼈를 게르만족이 의식에 사용했다고 한다. 장교들은 몸값을 지불받고 풀려났고, 사병들은 노예가 되었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그림 /위키피디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그림 /위키피디아

 

토이토부르크 숲의 승리 이후 라인 강 동안의 로마군 요새와 주둔지, 도시는 모두 게르만족에 점령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3개 여단을 잃어버린 충격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그후에도 로마는 게르만 지역을 침공했지만, 결국엔 게르마니아를 속주화하는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 전투 이후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의 내분으로 살해된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를 게르만의 민족적 영웅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후 400여년의 세월이 흘러 로마는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쇠약해 진다. 서로마제국은 서기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다.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로마의 라틴어 표현이로 독일어로 헤르만(Hermann)이다. 헤르만은 독일 제국과 제3제국(나치) 시절에 독일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독일이 2차 대전에 패한후 헤르만의 상징성이 다소 약해졌지만, 아직도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겐 독일민족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다. 지금도 토이토부르크 전투지로 추정되는 독일 데트몰트 시 부근에 있는 그로텐부르크 산 정상에 높이 54m에 달하는 아르미니우스 동상이 서 있다.

 

독일 데트몰드 근처 헤르만 기념관 /위키피디아
독일 데트몰드 근처 헤르만 기념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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