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정책이 1930년대 대공황을 심화시켰다
잘못된 정책이 1930년대 대공황을 심화시켰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19 14: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후버의 고임금정책과 관세법, 연준의 임금인상, 루즈벨트의 계획경제 등…

 

1929~1939년의 대공황은 경제학과 경제정책의 실험실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 경제학계를 지배했던 아담 스미스의 시장경제이론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금본위를 유지해야 물가를 잡고 성장을 이룬다는 금본위적 사고(Gold Standard Mentality)는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했다.

진단에 오류가 생기면 잘못된 처방이 나온다. 미국에선 대공황 기간 10년 동안에 초기는 공화당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이, 중반부 이후는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집권했다. 두 정권의 공황 해결책은 상당수 실패로 귀결되었고, 어떤 정책은 불황과 디플레이션을 악화시키기조차 했다. 경제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 경제보다 정치를 앞세운 처방, 자국이기주의적 입법의 연속이었다. 세계경제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는 시기의 국제적 지도력 부족도 공황을 장기화한 요소다. 결국엔 2차 세계대전이란 경제외적 변수에 의해 공황이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국제질서는 대공황 이전부터 삐걱거렸다. 선진국들이 금본위제로 복귀하기로 합의한 이후에 영국은 1925년 파운드의 금 교환비율을 시장가치보다 높게 정했고, 프랑스는 3년 뒤에 프랑화를 시장가치 이하로 절하해서 복귀했다. 게다가 미국 달러와 영국 파운드를 금의 교환수단으로 인정함으로써 프랑스와 유럽소국들의 투기성 금 태환을 조장했다. 금본위제 복귀를 둘러싼 각국이 이기주의는 공황이 발발하면서 대응력을 무력케 했다.

 

대공황기의 미국 산업생산 추이 /위키피디아
대공황기의 미국 산업생산 추이 /위키피디아

 

후버 행정부의 수습 정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공황 초기에 후버 정부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법에 서명해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율을 적용함으로써 유럽 각국의 보복 관세를 초래한 것도 공황을 가속화시킨 요인이다. 각국의 관세율 인상 경쟁은 국제교역을 위축시켰고 교역 감소는 국내 실물경제를 후퇴시키고 금의 수요를 확대시켰다. 각국의 관세 경쟁은 자국 가격을 유지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가속화시켰다.

 

또 후버 행정부의 고임금정책은 실업자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후버는 192910월말 뉴욕증시가 폭락하고 경제가 침체로 상공인을 불러 임금은 낮춰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경제가 어려울 때 기업이 높은 임금을 지급하면 노동자들이 기업의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능력을 갖게 되고, 경제를 선순환시킨다고 생각했다.

공황초기에 미국 기업들은 후버 정부에 협조에 임금을 삭감하거나 근로자들을 대량해고하는 일을 자제했다. 미국의 노동자 임금은 과거 불황 때와 달리 초기 2년 동안에 놀라울 정도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물가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실질임금은 상승하고, 기업들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다. 1931년부터 기업들은 임금 삭감에 나섰다. 경기 위축이 장기화하고 깊어지면서 직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게 되었고, 실업률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1929년에 3.2%로 추정되던 미국의 실업률은 193324.9%까지 치솟았다. 초기에 기업들의 임금삭감과 해고를 인정했더라면 불황은 짧고 깊게 지나갔을 것인데 고임금정책과 고용유지 정책이 대공황을 장기화하고 대량실업사태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대공황기 미국 GDP 추이 /위키피디아
대공황기 미국 GDP 추이 /위키피디아

 

금융정책상의 결정적인 오류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이 1931109일부터 1주일 사이에 이자율을 1.5%에서 3.5%로 가파르게 올린 일이다. 디플레이션 상태에서 금리를 내려야 했다. 그런데 연준은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금리를 올렸다.

1931921일 국제공동통화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영국 파운드화가 금 본위제에서 이탈하자 미국 달러만이 금과 함께 교환되는 유일한 국제통화로 남게 되었다. 파운드를 보유하던 프랑스와 유럽 중소국가들은 영국에 속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국 달러도 결국엔 금본위에서 이탈할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금본위를 유지하는 나라는 미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뿐이었다. 4개국 중앙은행은 미국도 금본위제에서 떨어져 나갈 것으로 예상하고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 나갔다. 193110월 한달에 미국에서 유츌된 금은 72,500만 달러로, 이는 2년간 유입된 금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당시는 디플레이션 상황이어서 물가가 9월과 10월에 각각 1%씩 하락했는데, 금리가 인상되면서 실질금리는 두 배로 증폭되었다.

후에 화폐경제학자들은 이 시점에서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지 않고 대신에 금본위를 포기하거나 유예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 재무부와 연준의 리더들은 금본위 신앙자들이었고, 그들은 금본위에서 이탈하면 통화량이 증가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했다.

연준의 금리인상으로 미국 경제는 1931년말과 1932년에 급격하게 위축되었고, 실업률은 1931615%에서 1016.7%, 1220% 가까이 올라갔다. 이에 비해 금본위에서 탈퇴한 영국은 1931년 가을 이후 파운드화 절하와 유동성 공급 덕분에 살아나기 시작했으니, 금본위에 대한 맹신이 큰 오류를 낳은 셈이다.

이후 미국의 기업과 은행 도산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주정부들은 불기피하게 은행의 문을 일제히 닫고 휴일(bank holiday)을 선포하게 된다.

 

대공황시 각국의 금본위제 폐기와 회복시점 /위키피디아
대공황시 각국의 금본위제 폐기와 회복시점 /위키피디아

 

미국의 금본위제는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이듬해인 1934130일 정화준비법(Gold Reserve Act)에 의해 폐기된다 .이 조치로 달러와 금의 교환비율을 1온스당 20.67달러에서 35달러로 70% 절하되었다. 달러의 금 태환이 포기되자 해외에서 금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93312월에서 19347월 사이에 미국의 금 보유량은 494천만 달러에서 79억 달러로 96%나 팽창했다. 금이 쌓이자 연준은 통화량을 늘렸다. 통화량 증가는 경제회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미국은 대공황의 수렁에서 벗어나 회복력을 갖게 된다.

 

일각에서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New Deal Project)이 미국 경제를 대공황의 늪에서 건져낸 것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뉴딜 정책은 자본주의 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제시된 정책이다. 뉴딜 정책은 대통령 본인의 신념에다 전문가그룹의 좌파적 이론을 뒷받침으로 해서 형성된 것으로, 자유방임의 시장경제에 메스를 가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시장주의의 무질서함이 기업의 과당경쟁과 기업인의 탐욕을 유발하고, 이 제도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실업자와 극빈층으로 전락해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뉴딜 주창자들은 이 제도를 고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해야 하며, 국가가 산업의 생산과 유통(공급)을 조절하고 노동자와 극빈층의 최소생계비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딜정책의 대표적인 입법은 국가산업부흥법(NIRA: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과 농업조정법(AAA: Agricultural Adjustment Act)이다. 두 법의 공통 목표는 국가가 개입해 산업과 농업 부문의 과잉 생산을 통제하고 가격을 올리는 것이다. 업종의 특성에 따라 규제의 방법과 수단이 다르지만 국가만능주의, 국가자본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법안들이다.

입법자와 집행자들은 시장의 기능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laissez faire)이 과당경쟁에 의해 과잉생산을 초래해 가격을 떨어뜨리고, 탐욕적인 기업인이 원가 절감을 위해 고용을 줄이기 때문에 국가경제를 불황의 나락에 떨어뜨렸다고 믿었다. 이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국가가 시장을 통제해 생산을 조절하고, 분배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부흥법에 의한 산업통제의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업종별 동일임금과 동일가격은 대기업에게 유리했다. 대기업은 대량생산 설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신생기업이나 성장과정에 있는 기업들에 비해 원가경쟁력에 앞섰다. 또 표준화되지 않은 제품을 생산하는 업종과 진입이 쉬운 업종에서는 규약 코드는 합의를 이끌어 내기 어려웠다.

뉴딜 정책의 산업통제는 오히려 대기업을 육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NIRA1935527일 미국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 결정이 내려져 파기된다.

 

농업조정법(AAA)도 소비에트식 집산주의를 강요해 농민들은 정부의 계획에 의해 높은 가격을 받았지만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 버렸다. 농민들의 대다수는 농업조정법에 반대했다고 한다. 농업 부문의 계획생산은 과잉생산물에 대해 집단 폐기를 초래해 새끼돼지 6백만 마리를 도살하고, 1천만 에이커(4)의 목화밭을 갈아 엎기도 했다. 농업조정법도 193616일 대법원에 의해 위헌판정을 받았다.

루스벨트와 뉴달 추진자들의 판단은 오류로 드러났다. 1930년대 대공황은 산업의 과잉생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경기 회복을 위해 유휴화된 자원을 다시 사용해야 했다. 루스벨트와 그의 지지자들은 기업의 과잉생산을 막으면 경기가 회복될줄 알았지만 경쟁억제는 기업의 창의력을 상실케 하고 투자를 위축시켰다.

 

대공황으로 가난해진 미국인들 /위키피디아
대공황으로 가난해진 미국인들 /위키피디아

 

대법원에 의해 연이어 뉴딜 법안이 위헌판정을 받은 후 루스벨트는 반기업-친노동 정책을 강화한다. 루스벨트의 좌파적 실험은 경기를 끌어올리는데 실패했다.

1936년 루스벨트 정부내 반독점론자들은 미배당이익세(undistributed profits tax)를 추진했다. 경영진들이 기업 이익을 임금이나 배당으로 적게 지출하고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두게 되면 부의 집중이 심화된다는 게 그들의 기업의 미배당 이익에 세금을 매기면 기업들이 임금과 배당으로 더 많이 지출하고, 투자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본시장을 활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루스벨트는 또 노동조합의 권한을 강화하는 와그너법(Wagner Act)을 제정했다. 1935년 제정된 와그너법은 미국 노동입법의 대헌장으로 간주되는데, 노동조합 결성권, 집단교섭권, 집단행동권, 파업권 등을 보장했다.

그 결과는 임금 상승과 인플레이션이었다. 대기업들은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물리자 유보금을 줄이는 대신에 임금과 배당을 늘렸다. 루스벨트 행정부가 의도한 바의 결과였다. 기업들의 유보금은 줄자, 당연히 투자가 급감했다. 투자 위축은 불황으로 이어졌다.

노동쟁의와 파업이 빈발하고 인건비가 상승했다. 인건비 상승은 생산성 상승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기업들은 투자를 줄이고 인력을 절감하는 방향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인력 감축은 실업률 증가로 이어졌으며, 투자 위축은 경기를 하방으로 이끌었다.

 

대공황기 미국의 취로사업 /위키피디아
대공황기 미국의 취로사업 /위키피디아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가운데 대규모 토목사업은 실업자 구제책으로 임시적 효과는 가져왔다. 루스벨트는 노동진흥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과 공공노동국(Public Works Administration)을 설치해 대대적인 토목건설사업을 벌였다. 수많은 실업자들을 토목사업에 끌어 들여 일자리를 만들고 급여를 주자는 생각이었다. 뉴딜 정책 수행기관들이 만들어 낸 건축물이 금문교, 후버댐, 테네시유역개발(TVA), 각종 공공건물, 예술관 등이다.

하지만 뉴딜의 공공사업이 미국의 실업률을 하락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미국 실업률을 하락시킨 것은 전쟁이었다.

 

대공황 막바지인 1937~1938년에 미국은 공황내 불황을 겪었다. 이 불황은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 미국 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극복되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을 합병하려 시도하면서 유럽 대륙에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유럽 각국은 전쟁에 대비하면서 군수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고 그 수요가 위축된 미국의 경제를 끌어올렸던 것이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촉발된 2차 세계대전은 정부의 지출을 극대로 증가시켰고, 군수산업이 모든 산업 수요를 빨아 당겼다. 교전국에서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모든 사람이 생산활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장기불황은 마침내 종식되었다.

전쟁은 미국 경제를 공황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했다. 미국이 군비가 빠르게 증가했다. 연방정부의 지출액은 1940150억 달러에서 1941362억 달러로 한해 사이에 2.4배 증가했고, 1942년에 989억 달러, 1943년에 1,478억 달러로 급팽창했다. 4년 사이에 연방정부의 지출이 1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실업률은 194014.6%에서 19431.9%로 떨어져 완전고용이 달성되었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경기불황을 극볼하기 위해 총수요 확대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주장을 입증한 것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