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내전③…체코 군단의 멀고도 험난한 귀국길
러시아내전③…체코 군단의 멀고도 험난한 귀국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2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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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해제 요구에 봉기…조국독립 명분 아래 이익에 따라 백군-적군에 협력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후 6개월쯤 되는 1918514,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1,700km 떨어진 우랄지역 제2의 도시 첼랴빈스크(Chelyabinsk).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6만여명이 동쪽으로 가는 시베리아 열차를 기다렸다. 그때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포로들을 태운 열차가 정전 협정에 의해 첼랴빈스크 역에 정차했다. 포로들을 본국에 귀국시키던 중이었다.

체코인과 헝가리인들은 원수지간이었다. 헝가리는 오스트라아에 붙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왕국을 형성해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했는데, 체코슬로바키아는 헝가리의 속국이었다. 1차 대전에서 나라를 잃은 체코인들은 독립을 시켜준다는 약속을 믿고 러시아군에 소속되어 연합군측에서 전투를 벌였고, 헝가리인들은 독일, 오스트리아와 동맹국에 가담해 러시아에 대항했다.

시비는 먼저 헝가리인들이 걸었다. 헝가리 포로들은 마주 오던 열차의 체코인들에게 돌을 던져 여럿이 다치고 한명이 죽게 하게 했다. 체코 군단 병사들이 헝가리인들이 타고 있는 열차에 올라타 헝가리 포로 몇 명을 끌어내 총으로 쐈다. 민족 감정이 폭력사태로 돌변한 것이다.

 

그러자 그 지역의 볼셰비키 정부가 체코 병사를 체포하고, 체코 군단에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체코 군단 병사들은 분개해 철도역을 점거하고 잡혀간 동료를 석방시키고, 이어 첼랴빈스크시를 점령했다. 이 사건으로 체코군단과 볼셰비키는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러시아혁명사에서 체코 군단 스토리를 빼면 적군과 백군의 잔혹사만 남는다. 돌발적인 사건처럼 터져 나온 체코 군단의 활약으로 혁명사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사태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무장 열차 /위키피디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무장 열차 /위키피디아

 

체코 군단이 반란은 러시아 내전을 극적으로 전환시킨다. 볼셰비키들은 퇴위한 차르(니콜라이 2) 가족을 서둘러 처형했다. 볼셰비키들은 체코 군단이 백군과 협력해 차르를 구출한 다음 반혁명 세력이 기세를 올릴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차르의 처형은 연합군의 개입을 불러일으켰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톡에 입항해 이르쿠츠크까지 진출하며, 우드로 윌슨의 미국이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게 된다. 아울러 볼셰비키가 광활한 시베리아 지역의 통제권을 잃어 백군이 장악하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황제군에 소속된 외인 부대에서 출발한다. 그후 헝가리군에 편입되었다가 탈출한 체코인 포로들이 합세하고 러시아 땅에 살던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입대하면서 군단의 규모는 6만여명으로 불어났다. 19177월 체코 군단은 우크라이나 서부 갈라시아의 즈보리프에서 벌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전투에 참여한다. 이 전투에서 체코 군단은 혁혁한 공을 세워 러시아의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2월 혁명후 집권한 러시아의 케렌스키 정부는 이 전투에서 6만여명의 사상자를 낸 후 국민들의 신망을 잃고 10월 혁명으로 물러나게 된다.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 정권은 독일, 오스트리아의 동맹국들과 정전협정을 맺고 전선에서 발을 뺐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겐 조국의 독립이 목표였지, 공산혁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연합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서유럽 전선으로 가겠다고 주장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육성한 것은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 토마스 마사리크(Tomas G. Masaryk, 1850~1937)였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사리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 제네바, 런던, 파리를 거쳐 러시아, 미국, 일본을 주유하며 해외에 거주하는 체코, 슬로바키아인들을 교육시키고 조직화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체코 군단을 조직하고 확대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58월 러시아 최고군사위원회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해 러시아 3군에 배속시켰다. 마사리크는 처음부터 이 러시아 외인부대에 큰 희망을 걸었다. 그는 이 군대를 키워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군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사리크는 우선 헝가리군에 소속되어 러시아와 전투를 벌이다 포로가 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을 석방해 체코 군단에 배속시킬 것을 러시아에 요구했다. 러시아는 마사리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후 대대에서 시작한 부대는 연대, 군단으로 커져 나갔고 1918년에는 병력이 6만여명으로 불어나 러시아군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체코군단의 장갑 열차 /위키피디아
체코군단의 장갑 열차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휴전으로 전쟁터를 잃은 체코 군단은 해외에 머물던 독립운동 지도자 마사리크와 뜻을 같이했다. 그들의 목표는 내전중인 러시아에서 누구의 편에 서지 않고 오직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위해 유럽전선에 참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서유럽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했다.

혁명 후 우크라이나 동쪽으로 철수해 있던 체코 군단은 서쪽이나 북쪽으로 갈수 없었다. 서쪽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점령지역이었고, 북쪽으로 가자니 내전지역을 지나야 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내려 연합군 함대를 타고 서유럽 전선으로 가는 멀고 험난한 길이었다. 볼셰비키 정권도 이를 수락했다. 그들이 극동러시아로 가기 위해 시베리아철도의 기점인 첼랴빈스크에 도착해 열차를 기다리던 중에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폭력사태가 빚어지자, 볼셰비키군을 지휘하던 트로츠키는 체코 군단에 조국으로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보장할 터이니,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하지만 체코 군단은 이에 응하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순식간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했다. 체코 군단은 시베리아철도의 주요 도시들을 점거했다. 첼랴빈스크, 페트로파프로프스크, 쿠르간, 마린스크, 칸스크 등 볼가강 일대를 선으로 장악했다.

체코 군단이 궐기하자 볼셰비키에 저항하는 백군들이 페트로파프로스크와 옴스크의 볼셰비키 정권을 붕괴시켰다. 한달 사이에 백군들은 바이칼에서 우랄산맥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볼셰비키의 시베리아 권력은 완전히 해체됐다.

체코 군단은 그해 6월초 사마라에서 적군을 패퇴시키고, 그 지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68일 러시아 혁명이후 처음으로 사마라에서 반혁명 정부를 수립했다. 닷새후인 613일 옴스크에서 백군의 시베리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그 자체가 이동하는 정부였다. 열차는 중무장한 포대와 기관총으로 무장했고, 화물칸에는 막사와 빵공장, 병원도 꾸몄다. 그들은 열차 내에서 신문도 찍어 내 정보를 교환했다. 그들은 애국 열기로 가득찼고, 애국 영웅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독립가를 부르며 열차로 이동했다. 해외에 머물던 마사라크는 체코 군단이 지나가는 역으로 전보를 보냈고, 그들은 마사리카의 명령을 수행했다.

 

흥미로운 건, 체코 군단은 볼가강 중심도시 카잔에서 차르가 보관하던 금괴를 확보해 알렉산드르 콜차크(Alexander Kolchak)의 백군에게 넘겨줬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체코 군단이 금괴 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금괴를 볼셰비키에게 념겨 주는 댓가로 볼셰비키가 블라디보스톡행 기차의 안전을 보장했다고 주장한다. 또 군단이 금 일부를 가지고 귀국했다는 주장도 있다.)

 

체코 군단이 볼가강 일대 시베리아 철도를 점거하며 니콜라이 2세 가족들이 억류되어 있는 예카테린부르크로 이동하자 볼셰비키들은 당황했다. 만일 체코 군단이 차르 일가를 구출해 백군에 넘겨준다면 중립을 지키던 농민등이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백군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그러면 혁명군은 반란군이 되고, 해외 제국주의의 개입을 초래할수도 있다. 볼셰비키는 서둘러 황제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717일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처형했다.

 

체코 군단은 어쩌다가 백군의 동맹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무기를 소지하고 체포된 체코 군단 병사들을 즉결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볼셰비키 군대를 투입해 체코군단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 길목에 이미 정부를 세우고 서진하고 있던 콜차크의 백군이 버티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봉기는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길 꺼려하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체코 군단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미군을 파견하기로 했고, 영국, 프랑스도 이들을 대독일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적극 나섰다. 시베리아에 욕심을 내던 일본군은 한술 더 떠 7만명의 병력을 보냈다..

19188월 연합군은 9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극동 블라디보스톡을 점령하고 체코 군단이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오기를 기다렸다. 여기에는 일본군이 가장 많았고,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병력을 보냈다.

 

블라디보스톡의 체코군단 /위키피디아
블라디보스톡의 체코군단 /위키피디아

 

체코군단 선봉대의 일부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배를 얻어 타고 귀국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볼셰비키와의 전투를 위해 나중에 오기로 한 부대원들을 기다렸다.

체코 군단이 볼셰비키를 무찌른 소식은 서방국가들에게 충분한 감동을 주었다. 체코군단이 승전보를 보내 오면서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는 191810월 연합국의 지지를 얻어 독립을 선언하고, 마사라크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곧 무너질 것 같았던 볼셰비키는 서서히 힘을 얻어 백군의 공격을 격퇴해 나갔다. 콜차크의 백군이 몇차례 패전하자, 체코 군단의 반볼셰비키 열정도 약해졌다. 누구를 위해 싸우나. 그들의 적()은 적군(赤軍), 백군(白軍), 그 외의 러시아 세력도 아니었다. 더 이상 병력 충원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볼셰비키와의 전투는 힘만 소모할 뿐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을 선언한 이후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이동중이던 체코인들의 반볼셰비키 정서는 더욱 약해졌고, 내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1919년 여름과 가을을 보내면서 콜차크의 백군은 볼셰비키에 밀려 빠르게 시베리아 동부로 쫓겨갔다. 19191114일 적군은 콜차크 백군의 수도 옴스크를 점령했다. 극동으로 가는 일부 도시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빨치산의 공격을 받았다.

향수병에 걸린 체코군단 병사들은 더 이상 볼셰비키와 싸우지 말고 중립을 선언하고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이때 볼셰비키는 교활한 음모를 꾸몄다. 볼셰비키는 체코인들에게 남의 나라 내전에 끼어들 이유가 무엇이냐. 콜차크를 체포해 넘겨주면 블라디보스톡까지 안전하게 이동하도록 보장하겠다고 제의했다. 체코 군단은 이제 오직 조국으로 가는 게 소원이었다. 그들은 볼셰비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콜차크가 이르쿠츠크로 가기 위해 체코 군단이 장악한 시베리아 열차를 탔다. 그는 체코인들이 자신을 체포할 것이라고 조금도 상상치 못했다. 체코인들은 콜차크에게 이르쿠츠크의 영국군 부대로 안전하게 이동시켜 주겠다고 속였다. 하지만 콜차크는 동지라고 믿었던 체코인들에게 붙잡혀 볼셰비키에게 넘겨졌고, 19202월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돼 강물에 던져졌다.

이제 체코인들의 적은 적군이 아니라 백군으로 바뀌엇다. 극동지역으로 밀려난 백군은 체코군단을 반역자라고 규정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연합군들도 체코 군단의 귀향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체코군단의 귀국길 /김현민
체코군단의 귀국길 /김현민

 

192031일 마지막 체코 병력이 이르쿠츠크에서 열차를 탔을 때 일본군과 그리고리 세묘토프 추장의 코사크족 백군이 열차 통과를 저지했다. 하지만 백군 연합세력은 더 이상 체코 군단의 열차 행군을 저지할 힘과 명분을 잃었다. 그들은 체코 군단이 탄 열차를 통과시켰다.

체코의 마지막 대원들은 3월에 이르쿠츠크에서 열차를 타 그해 9월 블라디보스톡을 출항했다. 길고도 먼 귀국 행군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한 체코군단은 인도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유럽으로 들어갔다.

체코 군단이 러시아를 떠난 총 인원은 67,739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여기에 병사 56,455, 장교 3,004, 그리고 시민 6,714, 그사이에 결혼한 부인 1,716, 자녀 717, 외국인 1,035, 기타 198명이다. 이들은 조국으로 돌아가 새로 창설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러시아 내전에서 죽은 군인 4,112명에 행방불명된 자를 포함하더라도 초기 6만명에 이르던 군단 병력이 고스란히 2년여 기나긴 시베리아 여정을 거치고 귀국한 것이다.

그들은 귀국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의 혼이었다.

 

프라하의 토마스 마사리크 상 /위키피디아
프라하의 토마스 마사리크 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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