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지역 교두보 인천 계양산성, 사적으로 지정
경인지역 교두보 인천 계양산성, 사적으로 지정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0.05.2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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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조선까지 활용된 성터…수도 방어의 거점, 군사적·행정적 중심지

 

인천 계양구에 있는 계양산(桂陽山)은 해발 394m로 경인지역에서는 가장 높다. 산 정상에서는 부천시, 김포시는 물론 한강 건너 고양시, 서울의 강서·구로구도 보인다.

이런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삼국시대부터 계양산에 산성이 축조되었다. 게다가 계양산성은 한강 하류와 서해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에 입지하고 있어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더했다.

 

사적 제556호 인천 계양산성 /문화재청
사적 제556호 인천 계양산성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그동안 인천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던 계양산성(仁川 桂陽山城)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해 사적 제556호로 지정했다.

삼국 시대 처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산성은 삼국의 영토전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곽이다.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 이어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사용되어, 오랜 시간에 걸친 축성기술의 변천을 알 수 있는 학술 가치가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과 왜의 고니시(小西行長)군과의 치열한 싸움터였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산성은 계양산 정상부에서 동남쪽의 능선 아래를 테뫼식산성(산 정산을 둘러 쌓은 성)이다. 계양산은 옛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의 진산이며, 안남산(安南山)이라고도 했다.

이 산에 있는 만일사(萬日寺)에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의 시가 전하고, 그의 망해지(望海誌)에 있는 기문(記文)에는 이곳에서 인천과 통진이 모두 조망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계양산고성은 석축이고 둘레가 1,937()이라 하였고, <문헌비고><대동지지>에서는 안남산의 동남쪽에 있는 고성을 같은 규모로 기록하여 이것이 곧 계양산성임을 알수 있다.

계양산의 동쪽 지봉 능선부에서 부평 고읍쪽으로 석축이 무너진 상태로 군데군데 터가 있으며, 김포군과 경계를 이루는 장명이고개 남동쪽의 중심성(衆心城)과 함께 김포에서 부평으로 통하는 고갯길의 요새를 진정(鎭定)하는 위치에 축조되어 있다. 현재는 대부분의 성곽이 훼손된 상태다.

산성의 둘레는 1,184m 정도이며, 능선 중간 부분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성내가 사방으로 노출되는 특이한 구조다. 사모(모자) 모양의 봉형(紗帽峰)에 자리했으며 내외부를 모두 돌로 쌓은 협축식 산성(夾築式, 내외부를 모두 돌로 쌓는 것)으로 당시 군사적 거점과 함께 행정의 중심지로 꾸준히 활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계양산성 성터 /문화재청
계양산성 성터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그동안 10차례의 학술조사를 통해 계양산성을 발굴했다. 발굴된 유물로는 한성백제 시기의 목간과 원저단경호(圓底短涇壺, 둥근바닥 항아리)와 함께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인화문(印花紋, 찍은 무늬) 토기 등이 있으며, 화살촉·문확쇠(門確金자물쇠·쇠솥·동곶(童串, 대패의 덧날막이철정(덩이쇠) 등 다양한 금속유물들도 출토되었다.

 

계양산성 산책길 /문화재청
계양산성 산책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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