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내전 그후…실패로 귀결된 공산주의 실험
러시아 내전 그후…실패로 귀결된 공산주의 실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2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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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소련 해체, 1993년 자유시장 경제 도입…70년만에 공산주의 소멸

 

러시아 내전은 1918년 시작되어 소비에트연방(소련)이 탄생하는 1923년까지 5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러시아 내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소련의 인구학자 보리스 우를라니스((Boris Urlanis)는 내전 기간에 교전으로 죽은 사람만 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그는 적군 사망자가 125, 백군 사망자가 175천명에 이르고, 병으로 죽은 사람이 45만명에 달할 것으로 계산했다. 보리스 센니코프(Boris Sennikov)는 러시아 동부 탐보프 주(Tambov Oblast)에서만 내전, 기아, 질병등으로 약 24만명의 인구 감소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민간인 학살도 허다했다. 적군이 밀려오면 백군에 부역했던 민간인이 학살되고 백군이 점령하면 적군 부역자들이 희생되었다. 부상자까지 합치면 7백만~12백만명이 피해를 보았다는 추정치도 있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1993104일 러시아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대통령을 지지하는 군대는 탱크 부대를 동원해 소비에트(Soviet)로 불리는 의회 건물 벨르이돔 상층부에 포탄을 퍼부었다. 146명의 사상자가 났다.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었던 소비에트연방은 2년전인 1991년 해체되었고, 러시아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옐친의 자유주의 개혁을 방해했다. 19939월 옐친은 의회 해산을 해산하고 12월 총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하자 공산주의자들이 의회 건물을 중심으로 극렬히 저항했다. 옐친은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의회를 해산했다. 그해 12월에 구성된 신 의회 두마(Duma)는 옐친의 시장개혁안을 받아들였다. 공산혁명 70년만에 소련은 해체되고, 러시아의 공산주의 실험은 막을 내렸다.

 

1993년 10월, 옐친지지 군인들의 포격으로 검게 탄 러시아 의회 /위키피디아
1993년 10월, 옐친지지 군인들의 포격으로 검게 탄 러시아 의회 /위키피디아

 

러시아 혁명은 인류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실현하는 공산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한 공산주의는 주변 국가로 확산했다. 2차 대전 이후 동유럽,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에 공산국가가 수립돼 세계를 반분하는 큰 진영을 형성했다. 한반도 분단도 러시아 혁명 이후 이어져온 세계사 흐름에서 전개된 것이다.

70년간 인류를 실험장으로 몰아넣은 공산주의는 실패로 귀결되었다. 러시아는 이미 30년전에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주의, 민주주의적 선거제도를 실현하고 있다. 결국 러시아의 공산혁명 실험은 실패로 귀결되었고, 그후 대다수 공산국가들이 시장경제를 도입하며 공산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 유일하게 남은 공산국가는 북한뿐이다.

 

1017년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회 /위키피디아
1017년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회 /위키피디아

 

그러면 러시아 공산혁명은 왜 실패했는가.

공산주의는 경제적 평등이라는 이상적 가치가 국가의 통제에 의해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러시아와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은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고 70년동안 실험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은 강력한 중앙통제 경제를 실시하며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2차 대전후 소련은 GNP 규모에서 미국 다음가는 산업국가로 발전했다. 1950년대말 일부 서방 학자들은 소련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1985년 권력을 잡았을 때, 소련의 경제성장이 하락하고 있었다. 성장의 주축이었던 값싼 원료, 풍부한 노동력, 계획에 의한 집중 투자기회가 1970년대 중반에 바닥을 드러냈고, 미국과 유럽의 산업 생산력에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쳐졌다.

소련 경제는 1970년대 중엽을 기점으로 적신호가 나타났다. 1960~70년대 전반까지도 연평균 5~7%를 보이던 공업성장률이 1970년대 후반에는 3.4%로 떨어졌다. 농업의 경우에는 1970년대 전반부터 정체현상을 보였다.

경제성장은 정체됐지만, 국민들의 소비수요는 급증했다. 그간의 지속적인 성장과 사회 안정은 국민들의 기대 수준을 크게 부풀렸다. 하지만 중공업과 군수산업에 치중하는 바람에 국민들의 소비재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정부는 소비재 생산을 늘리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생산재 부문과 소비재 부문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져 갔다. 농업부문에서도 식량은 자급할 수준이었지만, 육류 소비 증가에 맞추기 위해 식육 생산을 늘리면서 사료 수요가 급증해, 한때 곡물 수출국이던 소련이 곡물 수입국으로 변했다.

1970년대 말, 소련경제의 위기는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피부로 느낄 정도가 됐다. 그러나 타성에 젖은 관료들은 이 위기를 실감하지 못했다. 1973년 중동전쟁 이후 두 차례의 유류파동으로 석유가격이 폭등하면서 세계 최대의 석유수출국이던 소련에 오일 달러가 대거 유입돼 일시적은 풍요를 누렸지만, 내적으로 곪아가는 경제 위기를 일시에 은폐했을 뿐이었다.

폐쇄적인 관료들은 위기를 은폐하고 오히려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지하경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국가재산이 빼돌려져 암거래됐고, 서방에서 밀수입된 상품들이 지하에서 고가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공산당내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라는 특권계급이 형성됐다. 적대계급이 사라졌다는 공산 사회에 새로운 계급이 형성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며 부패한 관료주의를 만연시켰다.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형성된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한 중간층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서방국가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 경제성장률은 사실상 제로 상태로 떨어졌고, 생산성도 격감했다. 행정·명령형 경제체제와 관료주의로 인한 물자의 낭비와 비효율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국민들은 경제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불만을 표출했다.

소련 경제에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는 와중에 1983년 여름, 노보시비르스크 지역의 자슬라프스카야 등 연구자들이 중앙집권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노보시비르스크 경제보고서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중앙집권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경제 의사결정의 과도한 중앙집권 생산계획 책정의 일방적·명령적인 성격 미약한 시장 발전 노동에 대한 중앙 규제 등 8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요약하자면, 기업활동이 중앙관료기구에 의해 질식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노보시비르스크 보고서는 개혁논쟁의 출발신호 역할을 하며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브레즈네프는 19821176살의 나이로 죽었다. 후임에는 68살의 전 KGB(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안드로포프가 취임했지만, 19842월에 사망했다. 뒤를 이어 74살의 체르넨코가 서기장에 올랐지만,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체제위기의 절정에서 19853, 54살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이 됐다.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탈냉전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탈냉전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개혁파의 리더였던 고르바초프는 고질적인 경제정체를 깨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주창했다.

1987년에 고르바초프가 직접 쓴 책 페레스트로이카에 소련의 위기에 대한 그의 진단과 해결책이 잘 제시돼 있다. 고르바초프는 이 책에서 소련경제의 병폐로 원재료의 낭비와 비효율성 신기술의 도입 지연 중앙집중관리의 경직성 등을 열거했다. 고르바초프는 위기의 근원을 소련 사회주의의 특수한 결함,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관리의 과도한 중앙집중, 인간이해의 다양성 무시 등에서 찾았다. , 소련체제의 가장 큰 결함은 민주주의의 결여이며, 그 해결책은 사회의 모든 면에서 민주화를 확대하는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경제개혁에서 고르바초프는 두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는 기업 경영을 포함한 경제제도의 민주화였고, 둘째는 경제에 시장요소를 더 많이 도입하는 것이었다.

19893월 사실상 자유경선을 통해 연방 인민대의원 선거가 실시됐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해온 공산당과 정부의 간부들이 무려 87명이나 낙선했다. 옐친은 모스크바의 한 지역구에서 8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개혁과 개방은 새로운 위기를 초래했다. 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쿠즈바스· 돈바스 탄전지대의 광부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그루지야와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 탈연방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대중들에게 페레스트로이카의 효과가 느껴지기 이전에 지배체제 이완을 틈타 소수민족들의 독립욕구와 노동자들의 요구가 분출된 것이다.

 

소련 공산당은 민족문제를 지나치게 이념에 입각해 밀어붙였다. 볼셰비키는 민족주의를 자신들의 대의를 위해 이용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가 민족주의보다 중요하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규정을 그대로 따랐다. 비러시아계 민족들이 차르(러시아황제)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이자, 볼셰비키들은 민족주의를 이용하면서 공산 이념의 틀에 옭아 넣었다.

볼세비키 정권은 일단 권력을 잡은후 폴란드와 핀란드의 독립은 인정했지만, 우크라이나, 카프카즈 민족들, 중앙아시아 민족주의를 부정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등 발트 3국은 영국의 지지를 얻어 독립을 시도했지만, 1940년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이들 3개국을 합병했다.

하지만 자유화 바람은 소련에 강제병합된 14개 공화국의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

1989년엔 동유럽에서 극적인 사태가 전개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루마니아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 대한 불간섭 정책을 고수했다.

발트 3국이 19903월 리투아니아의 독립선언을 계기로 탈소 독립운동을 가속화했다. 이어 이제까지 소련 내에서 실체가 없었던 러시아 공화국은 보리스 옐친이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한 후 주권선언을 했다. 모스크바에 소련과 러시아의 이중권력 상태가 출현했다. 연방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동유럽의 대변혁은 부메랑이 되어 소련으로 되돌아왔다. 시장경제의 도입 요구가 거세지면서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목소리가 높아갔고,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을 중심으로 탈소 독립운동이 열기를 더해갔다. 날로 격화되는 민족운동은 직접적으로 소련체제를 위협하는 문제로 부각됐다.

 

1991년 8월 22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군부쿠데타를 집압한후 지지자들과 함께 러시아기를 흔들고 있다. /위키피디아
1991년 8월 22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군부쿠데타를 집압한후 지지자들과 함께 러시아기를 흔들고 있다. /위키피디아

 

소련은 본래 120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였다. 인구의 약 절반이 러시아인이고,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을 합친 슬라브계가 약 70%이다.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은 원칙적으로 민족단위의 공화국이고, 연방구성 공화국들 안에도 20개의 민족 단위 자치공화국이 있다. 이 많은 민족들을 하나로 묶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이념과 소련 인민으로서의 평등 원칙이 흔들렸다.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시행은 그동안 잠복해왔던 민족문제를 폭발적으로 표출시킨 것이다.

1991818일 소련공산당 보수파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의 권한을 박탈하고, 크림 지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그를 체포했다. 하지만 쿠데타 발생 몇 시간 뒤 옐친은 시민들에게 불법 쿠데타 반대를 촉구한 뒤 러시아 공화국의 통제권을 장악했음을 선언했다.

곧이어 발트 3국등 여러 연방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등 슬라브계 세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민스크에 모여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조치가 위헌이라 저항했지만, 결국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15개 공화국은 모두 독립했다. 그해 1224일 소련은 지구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1710월 혁명으로 탄생한 러시아 공산주의는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종식된다. 74년만에 인류의 대실험은 실패를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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