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기적①…야당이 내민 백지 위임장
아일랜드의 기적①…야당이 내민 백지 위임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2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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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에 여도 야도 없다”…오랜 경쟁 정당의 지지로 과감한 개혁 단행

 

아일랜드 공화국은 영국 서쪽에 있는 조그만 섬나라다. 면적은 7로 남한의 70%쯤 되고, 인구는 2019년 현재 490만명으로 우리나라의 10분의1 수준이다. 바람이 세고 햇볕이 비치는 시간이 짧아 척박한 땅에서나 자라는 감자 재배 이외에는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 로마제국이 브리튼 섬 대부분을 지배했지만 건너편 아일랜드는 쓸모가 없어 점령하지 않았다는 나라다.

이 나라는 400년간 이웃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19세기엔 병충해로 대기근이 발생해 1백만명 이상이 굶어 죽고 1백만명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민을 가야 했다.

 

가난했던 이 나라가 1990년대에 경제 기적을 이루어 한때 켈트 호랑이(Celtic Tiger)라 불렸고, 지금은 그들을 탄압하고 통치했던 영국인보다 더 부유하게 산다. IMF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아일랜드의 1인당 GDP86,988 달러로 세계 4위이며, 27위로 쳐진 영국의 48,169 달러에 비해 두배 가까이 많다.

내세울만한 특별한 천연자원이 없는 이 척박하고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경제 기적을 이룬 배경은 여러 가지다. 유럽에서 저임금, 감세정책, 기업친화적 법안 등을 통해 해외자본과 기업을 적극 유치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하지만 그런 정책을 쓰는 나라가 모두 고성장을 달성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타협, 사회적 연대를 이루지 못하면 외국기업이 투자를 꺼린다. 그 벽을 넘은 것이 아일랜드 공화국이다.

 

아일랜드의 위치 /위키피디아
아일랜드의 위치 /위키피디아

 

아일랜드는 1922년 대영제국 내 자유국(Free State)로 독립했다. 형식적으로는 영국 국왕을 최고통치권자로 모시는 형태였지만 독자적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군대를 보유하고 외교권을 가졌기 때문에 아일랜드는 영연방 내 캐나다나 호주와 같이 사실상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1937년에는 대영제국내 종속적 지위마저 거부하고 않고 완전 독립을 이루게 된다.

 

독립은 그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찌들고 핍박받던 민족이 독립을 하면 대개는 권력다툼을 하게 된다. 아일랜드에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한때 동지였던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싸웠다. 왜 협상에서 북아일랜드를 영국에 떼어 주었나,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선언하는 게 무슨 독립이냐를 놓고 독립운동지도자 에이먼 데 벌레라(Éamon de Valera)와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가 대립했고, 그들의 무리는 마침내 내전을 벌였다. 영국과 조약에 찬성한 콜린스 일파가 집권하면서 조약 반대파를 체포하고 사형시켰으며, 벌레라 파는 무장투쟁을 벌였다. 내전과정에서 콜린스가 피격되고, 벌레라가 마음을 바꿔 의회에 참여키로 하면서 1932년 피어나 포일당(Fiana Fail)을 만들었다. 콜린스의 지지파는 후에 피네 게일당(Fine Gale)을 만들게 된다.

두 당은 그후 정권을 뺏고 빼앗기며 원수처럼 서로를 물고 뜯었다. 특별한 이념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둘다 보수세력이었지만, 독립운동 당시의 원한을 이어가며 권력투쟁을 벌였다.

 

독립 초기 아일랜드 정치인들은 종족주의에 매달렸다. 반영(反英)주의가 모든 가치관의 우선이었다. 독립 직후 곧바로 대공황이 닥쳐왔다. 벌레라 정부는 1932년 영국에 지불하던 토지 상환자금의 지급을 거부했고, 영국은 곧바로 아일랜드산 쇠고기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물렸다. 농업국가가 공업국가와 무역전쟁을 벌이면 이길수 없다. 아일랜드 농업은 고사의 위기에 빠졌고, 19382차 대전 직전에야 양국은 타협하게 된다.

2차 대전에 아일랜드는 중립을 지키며 참전하지 않았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의 자립경제를 한다는 이유로 보호무역을 이어갔다. 전후 부흥기도 아일랜드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은행이 총 파업을 단행하고 실업률은 20%까지 치솟았고, 물가는 매년 20%를 웃돌았다. 국가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세금을 올렸다. 최고세율이 60%까지 올라갔다. 그래도 어느 재무장관은 아직도 충분히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들은 무기력해졌다. 더블린 공항에는 이민을 떠나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아일랜드에 대해 유럽의 지진아’, ‘하얀 깜둥이의 나라’. ‘서유럽의 환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치적으로도 혼란했다. 포일당이나 게일당 어느 쪽도 의회에 과반수를 얻지 못하고 소수당과 연합해 연립내각을 꾸렸다.

 

아일랜드의 해안절벽 /브리태니카
아일랜드의 해안절벽 /브리태니카

 

이런 위기 상황을 돌파한 것이 정치적 화합이었다. 경제위기에는 여당도 야당도 없었다.

198792일 제1야당이었던 피네 게일당의 당 대표 앨런 듀크스(Alan Dukes)가 더블린 남부 탈러(Tallaght)에 있는 상공회의소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정부가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면 핵심 사안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겠다. 또한 정부의 정책이 길에서 이탈되지 않고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일종의 백지 위임장이나 다름없었다. 수권정당이 60년 이상 정쟁을 벌이던 상대당의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당시 총리는 피어나 포일당의 찰스 호이(Charles James Haughey)였다.

한때 총을 겨눴던 두 앙숙 정당이 경제문제에 관한한 협조를 약속했다. 1야당의 이 선언을 탈러 전략(Tallaght Strategy)이라고 부른다. 탈러 전략은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아일랜드로 하여금 켈트 호랑이로 만든 단초가 되었다는 게 경제사학자들의 평가다.

듀크 당대표의 탈러 선언은 게일당에게 불리했다. 2년후 선거에서 게일당은 4석을 잃었지만 여전히 포일당의 경제정책을 지지했다. 포일당과 게일당은 모두 보수 세력인데, 경쟁적으로 연립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좌파 소수정당과 손을 잡아야 했다. 노동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호이 총리는 수시로 이탈하려는 좌파 정당 때문에 정책을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보수 야당이 도와 주겠다고 나서자 큰 우군을 맞게 되었다.

 

더블린의 시티 센터 /위키피디아
더블린의 시티 센터 /위키피디아

 

호이 총리는 1987년 보수야당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과감하게 개혁을 단행했다. 해외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법인세를 유럽에서 가장 낮은 10~12.5%로 낮췄다. 공무원의 임금을 삭감하고 수도 줄였다. 재정지출을 줄이고 연금도 줄였다.

이 때 만들어진 것이 사회연대협약(Social Partnership Agreement)이다. 이 협약은 호이 정부의 구조개혁을 지켜보던 제1야당 대표 듀크스와 아일랜드 최대 노조인 전국노조연합(ICTU)이 공동으로 제안해 198710월에 노사정 합의로 체결된 사회적 약속이다. 이 협약에 따라 노사정위원회가 정부, 사용자그룹, 노조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구성되었다. 대협약은 경제사회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3년마다 한 번씩 갱신되고 있다.

아일랜드의 사회연대협약 내용은 국가 재건, 경제사회 발전, 경쟁력 제고, 일자리 창출, 공정성 확립, 성장 지속, 복지 개선 등 거시경제 전체를 포괄한다.

사회연대협약 체결 후 아일랜드 노동시장은 크게 변화했다. 우선 협약 체결 이전 임금상승률은 20%를 넘었으나 협약에 따라 2.5% 이내에서 억제되었고,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실질임금 상승률은 3~5% 수준에서 안정되었다. 또 노사분규 발생건수가 1974년과 1984년에 각각 250건과 200건에 달했으나 1988년 이후에는 연평균 50건 미만으로 크게 감소했다. 기업의 80%에 노조가 조직되어 있지 않고, 고용 유연성이 선진국 가운데 매우 높다. 고용보호가 약하기로 OECD 국가 가운데 미국, 영국, 뉴질랜드, 캐나다 다음으로 5위다. 실업률이 199215%가 넘었지만 2007년에는 4%대로 떨어졌다. 아일랜드의 노사정위원회가 체결해 온 사회연대협약은 켈트 호랑이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미국의 거대기업 인텔(Intel)이었다. 1989년 인텔은 아일랜드 투자를 결정했고,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이 그 뒤를 이었다.

아일랜드는 미국 기업들이 투자하기 좋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영어 사용국이다. 아일랜드인들에겐 고유어가 있지만 오랜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 왔다. 미국 기업이 단일시장화하고 있는 유럽에 진출하려면 우선 언어가 통하는 나라를 찾는다. 영국은 임금이 비쌌다. 아일랜드는 영국에 비해 임금이 싸고 영어가 소통된다.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북치고 꽹가리를 치며 들어가지 밴드웨건 효과(Band Wagon Effect)가 벌어졌다. 켈트의 타이거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990년에 1만 달러, 1998년에 2만 달러, 2003년에 3만 달러, 2005년에 4만 달러, 2007년에 5만 달러로 증가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났다.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1990년대 후반에 금융위기에 허덕일 때에도 켈트 호랑이는 질주했다.

 

아일랜드의 행정구역 /브리태니카
아일랜드의 행정구역 /브리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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