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장남 김홍일 전 의원 별세
김대중 전 대통령 장남 김홍일 전 의원 별세
  • 아틀라스
  • 승인 2019.04.2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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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민주당 의원이 20일 오후 5시께 별세했다. 향년 71세다.

김 전 의원은 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최근 파킨슨병이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남 목포 출신으로 대신고,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71년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선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고, 1980'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 공안당국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에 이상이 생겨 고통을 받았고, 파킨슨병까지 얻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청와대 홍보수석을 한 홍상표씨가 페이스북에 그와 얽힌 사연을 실었다.

 

홍상표 전 수석의 페이스북 글

 

DJ의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이 별세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언론계 재직시절 나는 고인과 에피소드가 있다.

민주당 출입기자 시절 1992년 초 그가 그해 14대총선에서 전남 목포에 출마한다는 소문이 당내에 퍼졌다. 목포의 현역은 당시 민주당공동대표인 DJ의 최측근이자 당 최고실세인 권노갑의원이었다.

나는 권노갑의원을 찾아가 물었다. 그의 대답은 "홍일이가 하겠다면 당연히 줄(양보할)거다. 나는 국회의원 한번 한 것도 족하다. 김대중 선생의 비서실장 감투만으로도 이미 가문의 영광이다. 나는 욕심이 없다. 홍일이도 너무 고생 많이 했잖아?" 대강 이랬던 걸로 기억한다. 권의원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믿기는 좀 그렇지만, 정치적 수사만은 아닌 일정부분 진심도 섞였을 것으로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여튼 이 말에서 나는 김홍일 공천을 위한 분위기조성이 돼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물론 당내에서 찬반이 엇갈렸다. 총선은 물론 그해 말 대선에도 필시 부정적 영향을 줄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래도 DJ직계들은 적극 추진 쪽이었지만 방계들은 대놓고 말은 못해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나는 지금은 없어진 기사 장르인 정치 가십을 통해 김홍일 공천설을 비판조로 다뤘다. 당 관계자를 인용해 "북한 김일성-김정일을 부자 세습체제라고 비판하는데, 김홍일을 공천한다면 부자세습공천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겠느냐?" 대략 이런 멘트였다. 김홍일 의원 측으로서는 아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을 듯하다. 그 기사를 쓴 후 나는 김의원의 측근(모씨로 이미 고인이 되었다) 등 몇몇으로부터 협박성 험담을 듣기도 했다.

그 해 김의원은 공천을 받지 못했다. 물론 내가 쓴 기사 때문은 아니었겠으나, DJ의 대선을 코앞에 두고 이런저런 부정적 기류가 반영된 것임은 틀림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얼 마 후 나는 김의원(당시는 연청 회장)의 점심 초대를 받았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김한정 당시 DJ비서가 주선했다. 여의도 맨하탄호텔(현재 켄싱턴호텔) 일식집이었다. 나는 인간적으로 미안했으므로 낙천 여부에 관계없이 김의원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아니다. 괜찮다. 다 잊었다. 고맙다" 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나와 김한정 비서는 '히레사케'를 한잔씩 마신것 같다. 그는 술을 거절했다. "내가 술을 마시고 여기 호텔을 나서면 한 시간도 안돼 'DJ 큰아들 김홍일이가 대낮에 술먹고 얼굴 벌개 가지고 다닌다'는 소문이 확 퍼진다"는 게 이유였고 그래서 늘 극히 조심한다고 했다. 그의 고뇌이자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그 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에게는 내가 견문하여 아는 것 이상으로 또다른 고통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말에 공천관련 비판기사를 쓴 게 큰 잘못이나 한 것처럼 인간적인 연민을 느낀게 사실이다.

그로부터 8년후 2000년 가을 언론사 사회부장시절 나는 이미 재선의원이 된 김의원과 저녁식사를 했다. 그의 측근 두 명과 넷이 사직동 '인동초'라는 한정식 집이었다. 아버지는 대통령이었고 그의 권세도 막강했을 터이지만 그의 몸은 이미 많이 안좋은 듯 했다. 특히 언어구사가 좀 불편해 보였다. 성의껏 대화를 하고 좋은 분위기를 즐기는 듯 한데도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참 안스러웠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생겼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그가 "노래방을 가자"고 한 것이다. 말도 제대로 안되는데 과연 노래는 될까 의아했지만 나는 흔쾌히 함께 갔다. 그는 반주기 노래방에서 평소 즐겨 부른 듯 한 트로트 몇곡을 스스로 선곡하여 열창했다. 발음도 샹당히 분명했다. 대화의 언어보다 음악의 언어가 더 또렷할 수 있음을 느꼈다.

그 이후 김의원을 개인적으로 더는 만나지 못했다. 민주화시절 고문 후유증 등으로 악화된 병약한 모습을 언론 등을 통해 접했을 뿐이다. 그의 삶이 마주했던 시대적 고통의 크기를 내가 가늠할 수는 없지만, DJ 퇴임 후 그가 풍파를 겪을 때는 사케 한잔을 거절하던 '92년 김홍일의 모습' 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께 깊은 위로를 드린다. 고통없는 하늘 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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