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역사③…땅도 주권도 빼앗긴 슬픈 민족
아일랜드 역사③…땅도 주권도 빼앗긴 슬픈 민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0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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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란 때마다 고난…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정착민에 토지 빼앗겨

 

영국 튜더 왕가의 두 번째 국왕인 헨리 8세는 대단히 독선적인 절대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혼인문제로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싸우면서 1534년 수장령을 내려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리시켰다. 헨리 8세는 아일랜드에 대해서도 직접 통치를 밀어 붙였다.

이전까지 아일랜드는 영국 국왕이 임명한 귀족에 의해 대리로 통치되었다. 당시 아일랜드의 대리인은 렌스터의 영주인 피츠제럴드 백작 가문이 대를 이어 맡고 있었다. 헨리 8세는 피츠제럴드 가문을 곱게 보지 않았다. 피츠제럴드 가문이 튜더 왕조의 경쟁자인 요크 가문과 내통하고 외국과 독자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국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형식적으로 아일랜드는 교황청의 영지였다. 1155년 교황 아드리아누스 4세가 영국 국왕 헨리 2세에게 섬 전체를 하사하고 '아일랜드 영주'(Lord of Ireland)로 임명했다. 그런데 1533년 카톨릭과 싸우는 과정에서 튜더 왕조의 헨리 8세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 결과 교황 영지인 아일랜드의 귀속권이 문제로 부각되었다.

헨리 8세는 영국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아일랜드를 복속시키려 했고, 아일랜드의 카톨릭 귀족들은 교황청과 유럽 대륙의 카톨릭 국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일랜드 카톨릭은 잉글랜드 국교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로마 교황청의 편에 섰다. 헨리 8세는 아일랜드의 모든 수도원을 폐쇄하고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하라고 명령했다. 또 헨리 8세는 영국 국교회의 수장임과 동시에 아일랜드 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했다.

 

국왕은 피츠제럴드 가문이 맡고 있던 아일랜드의 대리통치자(Lord Deputy of Ireland) 지위를 박탈하고 수장인 9대 백작 개럿 오그(Gearóid Óg)를 잉글랜드로 소환했다. 이에 그의 아들 토머스 피츠제럴드(Thomas FitzGerald)가 반란을 일으켜 1534년 더블린의 잉글랜드 수비대를 공격했다.

헨리 8세는 분노해 토벌대를 파견해 피츠제럴드 가문의 거점을 공격했다. 피츠제럴드 가문은 신성로마제국, 웨일스, 잉글랜드 등에서 카톨릭 지원자를 끌어 모아 영국군에 저항했지만, 잉글랜드 군의 무력 앞에서 항복을 했다. 헨리 8세는 피츠제럴드 가문의 개럿 오그, 토머스 등을 처형하고 가문의 토지를 몰수했다. 아울러 직접 잉글랜드 출신을 대리통치자로 파견했다.

1542년 헨리 8세는 아일랜드 의회가 통과시킨 법에 의해 아일랜드 국왕에 올랐다. 이때부터 영국 국왕은 아일랜드 국왕을 겸하게 된다. 이전까지 영국 국왕은 교황청의 위임을 받은 아일랜드 영주였으나, 스스로 아일랜드에서의 지위를 영주(Lord)에서 왕(King)으로 승격시켰다. 형식적으로 아일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은 분리되었지만,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국왕이 파견한 귀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튜더 왕조의 아일랜드 지배는 더블린 주변의 페일(Pale) 지역과 몇몇 해안 도시에 불과했고, 지방은 과거 앵글로-노르만 귀족과 아일랜드 부족에 의해 지배되었다. 영국은 아일랜드에도 국교회를 파급시키려고 했지만 토착 귀족과 아일랜드인들은 카톨릭을 고수했다. 초기 투더왕조의 아일랜드 지배는 더블린 부근에 한정되었고, 섬 전역으로 지배권을 확대하는데는 엘리자베스 1, 제임스 1세에 걸쳐 1세기의 기간이 걸렸다.

 

1570년의 아일랜드 /위키피디아
1570년의 아일랜드 /위키피디아

 

헨리 8세를 이어 엘리자베스 1세는 아일랜드 섬 서부 코노트(Connaught)와 서남부 먼스터(Munster)에 재판소를 설치해 지배영역을 넓히고, 북부 얼스터(Ulster)로 통치지역을 확대하려 했다. 먼스터 지역은 앵글로-노르만족 출신의 피츠제럴드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일랜드 토착 부족과 힘을 합쳐 1569~1573, 1579~1583년 두 차례에 걸쳐 잉글랜드에 저항했다. 로마 교황청은 카톨릭 교도 반란군을 지원했지만 잉글랜드 군은 수백명을 처형시키면서 반란을 진합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북부 얼스터 지역이었다. 그곳에 토착 게일족(켈트) 출신의 오닐( O'Neill) 가문이 지배하는 영역이었다. 당시 휴 오닐(Hugh O'Neill) 백작은 잉글랜드 군의 공격에 대비해 전쟁 물자를 비축해 두었다. 오닐은 성(castle)의 지붕을 개조한다는 명분으로 잉글랜드에서 납을 주문해 총알과 포탄을 만들었다. 오닐의 통치구역은 북부 아일랜드의 티론(Tyrone)이었지만, 그의 저항에 얼스터 지역의 게일족들이 모두 합세해 전쟁은 9년을 끌었다.

9년 전쟁(1593~1603)의 발단은 오닐이 잉글랜드가 파견한 사법보안관을 추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영국 통치를 거부하겠다는 신호였다.

오닐은 용감하고 뛰어난 전략전술을 구사하면서 초기에는 영국군을 제압했다.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도 4,500명의 병력을 파견해 아일랜드인들의 투쟁을 도왔다. 하지만 아일랜드와 스페인군은 아일랜드 남부 항구도시 킨세일에서 압도적인 수의 잉글랜드 군에 포위되었다. 160110월부터 3개월에 걸친 포위(Siege of Kinsale) 끝에 아일랜드군은 항복했다. 이후 2년간의 산발적인 전투가 있었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반란군 지도자 오닐과 오도넬(O'Donnell) 90여명의 얼스터 지도자들은 새로 즉위한 제임스 1세의 용서를 받아 목숨은 건졌지만 작위와 토지를 몰수당했다. 살아남은 아일랜드 귀족 90여명은 1607년 해외로 도주했다.

 

1607년 아일랜드 백작들의 도주로 /위키피디아
1607년 아일랜드 백작들의 도주로 /위키피디아

 

아일랜드 반란이 진압된후 영국은 본격적으로 식민정책을 추진했다. 가장 저항이 강했던 북부 아일랜드의 얼스터 지역에는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이 대량으로 이주해 왔다. 오늘날 북아일랜드 문제는 이때 이주한 스코틀랜드인의 후손들이 아일랜드 공화국에 귀속하기 거부하며 발생한 사건이다.

영국은 또 앵글로-노르만 귀족과 토착 귀족들의 토지를 대량으로 몰수해 잉글랜드 출신 귀족들에게 넘겨주었다. 잉글랜드 출신 귀족들은 영국에서 사는 부재지주로, 정착민에게 2천 에이커 단위로 토지를 임대하고, 그들이 다시 소작농에게 임대하는 형식으로 식민정책이 진행되었다. 토착 게일족들은 고지대의 척박한 땅으로 쫓겨 났다.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에게 땅을 빼앗긴 아일랜드인들은 드디어 복수의 기회를 찾았다. 1640년대 들어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중심이 된 의회파와 찰스 1세의 왕당파가 창끝을 겨누었다. 그 틈을 비집고 아일랜드의 카톨릭 지주들은 빼앗긴 토지를 되찾기 위해 반란을 도모했다. 펠림 오닐(Felim O'Neill) 등 토착 아일랜드계 귀족으로 구성된 주모자들은 더블린과 런던데리를 점거해 영국 식민당국을 무력화하고 토지를 빼앗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무혈 투쟁을 시도했다.

1641923일 반란자들은 북부 아일랜드의 잉글랜드 요새를 기습적으로 점거하고 던개넌 선언(Proclamation of Dungannon)을 발표했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영국의 찰스 1세를 지지하며 잉글랜드 청교도 의회와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라는 것이었다.

영국의 식민당국이 보기에는 이는 반역이었다. 그들은 기습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과잉진압했다. 사태는 순식간에 아일랜드 지주와 소작인들에게로 퍼져나갔다.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주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잉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정착자 20만명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 학살된 사람들은 4천명으로 추정되었다.

 

1609년 아일랜드의 이주자 분포 /위키핃아
1609년 아일랜드의 이주자 분포 /위키핃아

 

영국은 바야흐로 청교도 혁명(1641~1651)의 소용돌이에 빠졌기 때문에 초기에는 아일랜드의 반란에 대응하지 못했다. 아일랜드의 카톨릭 세력은 아일랜드 연맹’(Confederate Ireland)을 구성하고 청교도와의 전쟁은 물론 잉글랜드 왕당파들과의 연합을 추구했다.

영국의 내란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이끄는 의화파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사태가 악화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의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지주 학살은 크롬웰의 카톨릭 탄압을 정당화시켰다.

1649년 크롬웰은 신모범군(New Model Army) 12만명을 이끌고 더블린에 상륙했다. 크롬웰군과 아일랜드 토착군 사이의 전쟁은 8년을 끌었다. 크롬웰 군은 정예 부대였고, 아일랜드 반군과 왕당파 연합군은 오합지졸이었다. 싸움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마침내 크롬웰이 아일랜드 전역을 제압했다. 크롬웰 군의 잔학성은 아일랜드인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었다. 1642~1653년 사이에 아일랜드에서 전쟁, 질병, 기아등으로 죽은 사람이 62만명이 된다는 추정도 있다.(위키피디아) 1653년 마지막 남은 반란군이 항복하자, 크롬웰은 그들이 프랑스로 도주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1690년 보인 전투 그림 /위키피디아
1690년 보인 전투 그림 /위키피디아

 

영국에서 왕정복고가 이뤄지고 제임스 2세의 폭정, 명예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에 또다시 아일랜드는 전화에 휩싸였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 2세는 프랑스에 망명했다가 아일랜드로 가서 망명 의회를 구성했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군대를 모아 잉글랜드 의회에서 임명을 받은 윌리엄 3세와 대항하려 했다. 아일랜드 의회는 제임스를 왕으로 승인했고, 제임스는 반대급부로 크롬웰이 빼앗은 토지를 카톨릭 지주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제임스 2세는 1690년 아일랜드 군을 이끌고 북아일랜드의 런던데리를 포위 공격했다. 이 포위전은 105일간 지속되었는데, 시민 3만명중 4분의1이 굶어죽었다. 아일랜드 신교도들은 카톨릭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항복은 없다며 저항했다.

마침내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이 300척의 함대를 이끌고 벨파스트에 도착해 제임스와 최후 결전을 벌였다. 169071일 보인 전투(Battle of the Boyne)에서 아일랜드 군은 잉글랜드 군에 패하고 제임스 2세는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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