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역사④…굶어 죽거나 이민 떠나거나
아일랜드 역사④…굶어 죽거나 이민 떠나거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0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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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1845년 감자 흉년에 대기근…아일랜드인 1백만명 죽고, 1백만명 이민

 

1845년 여름, 감자 줄기가 자라 꽃을 피울 무렵이었다. 갑자기 아일랜드 들판에서 자라던 감자 줄기가 꺾이고 검게 변했다. 후에 밝혔지만, 파이토프토라 인페스탄스(Phytophthora infestans)라는 세균이 전염병처럼 번져 아일랜드의 감자 농사를 망치게 했다. 이 진균은 감자 잎마름병(potato blight)을 일으켜 감자 잎을 검게 변하게 하고, 땅 속의 감자씨를 썩어 들어가게 했다. 아일랜드 들판의 감자가 모두 썩어 버렸다.

1841년부터 1845년까지 5년간 계속된 아일랜드 대기근(Great Famine)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기근으로 인구 6백만명의 아일랜드인 가운데 1백만명이 죽고, 1백만명이 미국은 물론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일랜드인들은 이 사건을 고르타 모르(Gorta Mór)라며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천재(天災)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일랜드인을 가난하게 했고,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하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그들의 지배자 영국인이었다는 점에서 인재(人災)였다.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존 미첼(John Mitchel)감자를 망친 것은 신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영국인들이었다고 말했다. 감자 대기근은 아일랜드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를 유발했고, 반영 감정을 고조시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원인이 된다.

 

대기근 시절을 그린 더블린의 동상 /위키피디아
대기근 시절을 그린 더블린의 동상 /위키피디아

 

앞서 1798년 아일랜드에서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신교도 지배층은 영국 정부에 도움을 청했다. 영국 정부는 연방법(Acts of Union)을 제정해 아일랜드 의회를 해산하고 180111일부로 아일랜드를 영국으로 병합했다. 이때 정한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란 영국의 국명은 1927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완전독립을 선언한 후에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로 바뀔 때까지 사용된다. 아일랜드인들은 하원과 상원의원을 영국 의회에 보냈지만 의원 대다수가 지주들이었다. 그들은 지주의 이익을 대변했다. 아일랜드의 모든 행정은 영국이 파견한 총독에 의해 결정되었다.

 

영국의 직접 통치 시기에 아일랜드 토지는 영국인들이 차지했다. 지주들은 영국에서 살면서 중개인을 통해 소작료를 징수하는 부재지주였고,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 지주에게서 땅을 얻어 부쳐 먹으면서 임금을 받거나 소작료를 냈다. 루칸 백작(Earl of Lucan)의 경우 아일랜드에 소유한 땅이 240이었는데, 이는 서울시 면적의 절반쯤 된다.

부재지주들은 수시로 소작료를 올리거나 소작 기간을 중단시키며 아일랜드 소작인들을 괴롭혔다. 소작인들은 지주를 대리하는 중개인에게 빌붙어 가난하게 살았다. 그들은 임노동 형태로 급여를 받았는데, 지주들이 급여를 조금 주었기 때문에 먹고 살아가기 위해 자투리 땅에 감자를 심어 주식으로 사용했다.

아일랜드에서 감자는 처음에 지주들의 원예 작물로 재배되었고, 그다지 많이 심지 않았다. 그런데 아일랜드에서 감자가 잘 재배된다는 것을 알고는 지주들이 대량으로 감자 농사를 요구했고, 1800~1820년대엔 주요 농산물이 되었다. 이 시기에 인구도 팽창해, 늘어난 인구를 감자가 먹여 살렸다. 특히 겨울에는 감자를 보관해 식량으로 사용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모두 감자로 때웠다. 그들은 삶아서 먹고, 구워도 묵고 버터를 바르거나 양파를 곁들여 먹었다. 질 나쁜 감자는 돼지나 소, 닭을 주었다.

 

아일랜드와 유럽의 인구 증가 /위키피디아
아일랜드와 유럽의 인구 증가 /위키피디아

 

감자 흉년은 아일랜드인들에겐 대재앙이었다. 게일어를 쓰는 서부와 남부 지역의 타격이 컸다. 감자 파동이 시작된 첫해에는 영국의 토리당(Tory) 정권이 미국에서 옥수수를 긴급수입하고 수입곡물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는 바람에 상황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감자 세균은 이듬해에도 퍼져 작황이 악화되었다. 영국에선 시장 자유를 주장하는 휘그당(Whig)이 집권하면서 토리당의 시장 조작정책을 폐기했다. 그들은 시장이 곡물가격과 수급을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식량가격이 폭등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지 못하고 굶어 죽어갔다. 영국의 시장자유론(laissez-faire capitalism)이 아일랜드의 기근을 악화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때마침 전염병이 창궐했다.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 괴혈병이 굶주린 사람들에게 덮쳤고, 전염병은 아사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존 미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먹을 것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해를 한번 쳐다본 후 집의 문을 만들었다.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과 신음을 남들에게 보이거나 들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몇주가 지나고 난롯가엔 해골만 발견되었다.”

아일랜드인은 자기집에서 굶어 죽거나 벌판에서, 거리에서 죽어 나갔다. 어떤 사람은 영국인 지주의 집앞에서 그들이 풍성한 식탁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쓰러졌다. 그 원망과 탄식은 영국과 영국인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났다. 누구는 잘 먹고, 누구는 굶어 죽어야 하나. 이 빈부 격차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문제였고, 대영제국과 식민지 아일랜드의 현실이었다.

 

1845년 아일랜드 직업소개소 앞 풍경 /위키피디아
1845년 아일랜드 직업소개소 앞 풍경 /위키피디아

 

영국은 당시 산업혁명이 최고조에 달해 세계공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를 지배하는 세계 최강의 나라였다. 아일랜드를 병합했으면 아일랜드인은 자국민이었다. 그런데도 영국은 아일랜드의 고난을 방치했다. 기아에 허덕이던 사람들은 푸성귀라도 얻으려고 수확이 끝난 밭을 헤메었다. 무료급식소가 있었으나, 멀건 스프가 전부였고 굶주린 이들의 허기를 채우지 못했다. 스스로 좀도둑이 되어 감옥으로 들어가 끼니라도 잇자는 사람도 있었다.

 

신교도들은 학교를 세워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했다. 조건은 카톨릭을 버리고 청교도를 받아들이는 조건이었다. 종교를 바꾸어 아이에게 먹여야겠다는 부모도 있었지만, 대다수 카톨릭 교도돌은 굶어 죽더라도 그들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영국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다만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 도와주는 것은 받아들였다. 인도 캘커타의 동인도회사 군대에 근무하던 아일랜드 병사들이 14천 파운드를 모아 구호 자금으로 보내왔다. 교황 피우스 9, 러시아의 차르 알렉슨드르 2,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각각 2천 파운드를 구호기금으로 내놨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아일랜드 농부들을 위해 1만 파운드를 보내겠다고 밝히자 영국 외교관들이 난색을 표시하며 1천 파운드로 깎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영국 여왕보다 더 많은 금액을 낼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미국의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50달러,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에이브렇햄 링컨은 10달러를 냈다.

 

벨파스트의 대기근박물관 /위키피디아
벨파스트의 대기근박물관 /위키피디아

 

구호자금만으로 아일랜드인 6백만명을 구제할수 없었다.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1백만명이 기아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든 땅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일랜드섬 남쪽의 퀸스타운(Queenstown)으로 몰려들었다. 현재 코브 항(Port Cobh)으로 바뀐 그곳은 브리튼 섬을 출발해 신대륙으로 가는 여객선이 마지막으로 기항하는 항구였다. 1912412일 타이태닉호가 출발한 곳도 이 항구였는데, 영화는 아래층 3등칸에는 아일랜드인들이 무리지어 이민 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나마 고급 유람선을 타는 사람은 다행이었다. 당시 그들이 탄 배는 낡고 허름했다. 대서양을 건너 미국, 캐나다, 호주로 가는 길에 20%가 죽었다고 한다. 이민자들은 그 배가 관이 될수도 있다고 해서 관선(coffin ships)이라고 불렀다. 캐나다 몬트리올에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함께 묻은 공동묘지가 있다.

1845년 인구조사에서 8백만명이던 아일랜드의 인구는 7년 뒤인 1851년에 600만 명으로 줄었다. 당시 런던 타임지는 "얼마 가지 않아 아일랜드 땅에서 사는 아일랜드인들의 수는 미국의 인디언들만큼이나 드물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감자 잎마름병은 1879년에도 다시 찾아왔다. 아일랜드인들의 이민행렬은 계속되었다.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기근은 인류 최대의 재앙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일랜드인들은 더 이상 영국의 지배를 원치 않았다.

 

이민자들을 작별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이민자들을 작별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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