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역사⑤…민족주의 대두, 거센 독립운동
아일랜드 역사⑤…민족주의 대두, 거센 독립운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0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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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투쟁과 자치운동이 상승작용, 민족주의 고조…자치법 끝내 좌초

 

아일랜드에서도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가 불붙었다. 아일랜드인들의 독립 운동은 무장 투쟁을 하자는 파와 평화적 운동을 하자는 파로 나뉜다. 두 파는 때로 의견충돌도 벌였지만 서로 상승작용을 불러일으키며 궁극적으로 아일랜드를 독립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791아일랜드인 연합’(The United Irishmen)이라는 자유주의 성향의 비밀결사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청교도인 테오발드 울프 톤(Theobald Wolfe Tone)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카톨릭, 장로교 등 다양한 종교를 결합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울프 톤은 미국과 프랑스로 건너가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지원을 요청했다. 영국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가 이에 응했다.

1796, 울프 톤은 14천명의 프랑스 군대와 함께 아일랜드 해안을 접근했지만 예기치 못한 역풍과 궂은 날씨 때문에 상륙하지 못하고 프랑스로 되돌아 갔다.

영국인들은 비밀결사 구성원 색출 작업에 나서 모진 고문을 자행하자 1798년에 무장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반란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영국군에 패하고 말았다. 울프 톤은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1798년에 아일랜드로 돌아왔지만 패전하고 포로가 되었다. 이 반란에서 아일랜드인 1~3만명이 희생되었다.

영국은 아일랜드 폭동을 가혹하게 탄압한후 1801년 아일랜드 의회를 해산하고 영국의 연방으로 포함시켜 속국으로 만들었다.

 

1796년 무장봉기에 가담한 프랑스 해군이 풍랑에 좌초되고 있다.
1796년 무장봉기에 가담한 프랑스 해군이 풍랑에 좌초되고 있다.

 

대니얼 오코넬(Daniel O'Connell)은 프랑스에서 공부하면서 혁명의 과격성을 보았고, 1798년 무장봉기를 지켜보면서 폭력에 회의를 느꼈다. 그는 변호사를 개업해 아일랜드 정치에 가담하고 신교도에 탄압받고 있는 카톨릭 해방 운동을 펼쳤다. 1826년 총선에서 그는 카톨릭 해방을 주장하는 신교도 후보를 지지했고, 1828년엔 스스로 클레이(Clare) 주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하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영국국교회 수장인 영국 국왕에 대한 선서를 거부했고, 보수적인 영국 의회는 그에게 의석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는 아일랜드 카톨릭의 상징이었다. 영국 의회가 그를 거부하면 아일랜드에서 다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고, 웰링턴 총리는 다수의 의원과 국왕 조지 4세를 설득해 1929년 카톨릭 해방법(Roman Catholic Relief)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 법의 통과로 아일랜드의 카톨릭교도들이 투표권과 하원의원에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을 얻었고, 오코넬은 민족의 '해방자'(The Emancipator)로 추앙받았다.

카톨릭 구제법이 통과된 후 오코넬은 아일랜드 의회를 잉글랜드 의회로부터 분리해 아일랜드의 자치권을 얻는 운동에 뛰어들었다.

1843년에 오코넬이 주최한 몬스터 회의(Monster Meeting)에는 아일랜드 전역에서 50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몬스터는 아일랜드 민족의 상징인 타라의 언덕’(Hill of Tara)에 열렸다. 그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영국 정부를 위협해 아일랜드 의회를 회복할 것으로 믿었다. 그는 기세를 몰아 그해 108일 더블린 교외 클론타프에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클론타프(Clontarf)도 민족의 영웅 브라인 보루가 1014년에 바이킹족을 몰아낸 역사적 장소였다.

그런데 영국 정부는 클론타프에 예정된 모임을 금지했다. 평화주의자였던 오코넬은 평화와 공공질서 유지라는 명분으로 모임을 취소했다.

이 사건으로 오코넬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평화적 시위에 한계를 느낀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무장투쟁론에 빠져들었다.

 

1843년 대니얼 오코넬이 주도한 몬스터 모임 /위키피디아
1843년 대니얼 오코넬이 주도한 몬스터 모임 /위키피디아

 

1845~1849년 아일랜드 대기근은 토지와 독립이라는 두가지 이슈를 제기했다. 1850년엔 소작농권리연맹(Tenant Right League)이 결성되어 3F운동을 벌였다. 3F공정한 소작료(Fair rent), 자유로운 판매(Free sale) 소작 기간 내의 해지 금지(Fixity of tenure)를 골자로 했다. 이들은 이이리시 전국토지연맹(Irish National Land League)으로 조직을 확대해 영국을 상대로 토지 전쟁(Land War)을 벌여 영국 의회가 소작농에 관한 여러차례 입법을 하도록 했다.

 

1888년 아일랜드의 영국경찰이 토지 전쟁을 벌이는 아일랜드인을 추방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888년 아일랜드의 영국경찰이 토지 전쟁을 벌이는 아일랜드인을 추방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858년 제임스 스테판스(James Stephens)와 존 오마호니(John O'Mahony)를 주축으로 페니어회(The Fenian)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이름은 아일랜드의 전설상 영웅인 피어나(Fianna)에서 따왔다. 이 단체의 강령의 첫째는 아일랜드 독립이고, 둘째는 무장혁명이다. 페니어회는 아일랜드는 물론 미국, 캐나다, 영국으로 이민간 사람들도 조직원으로 포섭했다. 이 단체는 후에 '아일랜드 공화단'(IRB: The Irish Republican Brotherhood)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아일랜드 공화군‘(IRA: The Irish Republican Army)라는 무장단체도 조직했다.

 

찰스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은 합법적 공간에서 과 같이 자치운동을 펼친 인물이었다. 신교도 지주 아들인 파넬은 1875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영국 의회에 진출했다. 그는 신자치당(The New Home Rule Party)를 창당해 당대표가 되었고, 아일랜드의 자치(Home Rule)를 요구했다.

찰스 파넬 /위키피디아
찰스 파넬 /위키피디아

 

1879년에 다시 감자 농사에 흉년이 들어 영국인 지주들이 소작인들을 내쫓는 사태가 벌어졌다. 파넬은 토지연맹과 손잡고 소작료 인하,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전국적인 시위운동을 벌였다. 지주와 소작인들의 갈등은 폭력적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파넬은 토지 연맹과 함께 보이콧 운동(boycotting)을 벌였다. 이 운동은 메이요 주의 토지 대리인이었던 찰스 보이콧(Charles Boycott) 대위에게 처음으로 적용했다. 주민들은 소작인을 내쫓은 보이콧 농장의 추수를 거부했다. 보이콧(boycott)이란 말이 용어로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파넬은 토지연맹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 지주, 대리인, 소작인을 보이콧하도록 부추겼다.

이 운동은 토지전쟁으로 불렸고, 1879년부터 1882년까지 지속되었다. 마침내 1881년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 토지법을 제정해 소작인들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파넬은 또 아일랜드의 자치를 지지하는 영국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 총리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글래드스턴은 자유주의자로 파넬이 주장하는 아일랜드의 자치에 지지를 표시했다. 그는 4차례 총리를 역임하면서 아일랜드 국교 폐지, 아일랜드 토지법 제정, 아일랜드 선거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아일랜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1886년 영국 의회에서 글래드스턴 총리가 아일랜드 자치법을 논의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886년 영국 의회에서 글래드스턴 총리가 아일랜드 자치법을 논의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글래드스턴은 1886년 아일랜드 의회를 독립시켜 정부를 구성하는 내용의 아일랜드정부법(The Government of Ireland Bill)을 의회에 제출했다. 영국 의회는 벌집 쑤시듯 논란을 벌이면서 341311의 근소한 표차로 부결시켰다.

1893년 글래드스턴은 두 번째로 아일랜드정부법을 제출했다. 법안은 하원에서 347304의 표차로 통과되었으나, 상원에서 41941의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었다.

아일랜드 자치가 영국의회에서 논의되자 북부아일랜드 얼스터(Ulster) 지역의 신교도들은 변호사 출신인 에드워드 카슨 경(Sir Edward Carson)을 중심으로 얼스터 의용군(Ulster Volunteer Forse)를 결성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아일랜드의 독립이 이뤄지더라도 북부 지역은 독립한 아일랜드에 속하지 않고 영국에 남겠다고 주장했다. 얼스터 의용군은 총포와 화약을 밀수입해 무장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오언 맥네일(Eoin MacNeill)을 중심으로 아일랜드 의용군(Irish Volunteers)을 결성했다. 이들은 북부 얼스터를 분리하는 것을 반대하며 아일랜드 섬 전체의 자치를 요구했다. 아일랜드 자치문제는 내란의 조짐을 보였다.

1912년 허버트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 내각은 세 번째로 아일랜드 정부법을 제출했다. 골자는 아일랜드의 의회를 구성하고, 영국 의회에 아일랜드 대표를 보내며, 영국 행정기관이었던 더블린 캐슬 정부(Dublin Castle administration)는 폐지하되 총독을 파견한다는 내용이다. 세 번째 법안도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얼스터의 연방파(Unionist)들은 극렬히 저항했다. 카슨 경이 주도하는 얼스터 의용군은 10만명의 군중을 동원해 행진을 했다. 그들은 아일랜드 의회를 인정할수 없고 아일랜드 법을 거부하고 아일랜드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50만명의 얼스터인들이 아일랜드 자치 반대에 서명했다.

1914년 에스퀴스 총리는 얼스터의 주장을 받아들여 수정안을 제출했다. 얼스터의 6개주에 대해선 6년간 아일랜드 자치정부에 귀속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얼스터의 지도자 카슨도 에스퀴스 총리의 수정안에 동의했다.

그런데 191484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애스퀴스 총리는 수정안 제출을 포기하고, 대신에 아일랜드정부법을 연기하는 법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아일랜드 자치의 문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로 미뤄졌고, 얼스터 문제도 미해결과제로 남게 되었다.

 

더블린의 성 패트릭 데이 풍경 /위키피디아
더블린의 성 패트릭 데이 풍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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