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30년 걸친 인종·종교 갈등 풀어내다
북아일랜드, 30년 걸친 인종·종교 갈등 풀어내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0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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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과 신교도, 스코틀랜드계와 아일랜드계의 화해…아직도 ‘평화의 선’

 

아일랜드 얼스터(Ulster) 지방과 북아일랜드(Nothern Ireland)의 지리적 위치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얼스터는 9개 주로 구성되고, 이중 6개주가 아일랜드공화국에서 떨어져 영국령 북아일랜드를 구성하고 있다. 얼스터의 모나한(Monagha), 카반(Cavan), 도니갈(Donegal)3개 주는 아일랜드공화국 소속 주이고, 앤트림(Antrim), 다운(Down), 아마(Armagh), 티론(Tyrone), 퍼마나(Fermanagh), 런던데리(Londonderry) 6개 주는 영국에 귀속되어 있는 북아일랜드다.

이처럼 복잡하게 국경이 그어진 것은 종교와 종족의 차이 때문이다. 북아일랜드는 바다 건너 스코틀랜드와 인접해 있고 가장 가까운 곳은 24km에 불과하다. 일찍이 장로교를 믿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아일랜드 북부에 건너와 살면서 카톨릭이 주류인 남쪽의 켈트족(게일족)과 이질적은 생활과 문화를 해왔고, 아일랜드가 영국으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북부 6개주의 신교도들은 남쪽 사람들과 나라를 같이하기 싫다고 해서 분리되었다.

얼스터 지방은 영국이 아일랜드섬을 식민화할 때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곳이다. 17세기초 북아일랜드 게일족 귀족들이 영국에 항복하고 유럽으로 망명을 떠나자 영국은 그곳 땅을 영국 귀족들에게 나눠주었다. 영국 귀족들은 현지 게일어를 사용하되, 카톨릭이 아닌 소작인들을 데려왔다. 스코틀랜드 서해안과 아일랜드 북쪽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는데, 종교혁명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사람들 대다수가 신교 일파인 장로교로 개종했다. 영국 귀족들은 스코틀랜드인들을 불러와 얼스터 지역의 농지를 나눠 주었다. 그때 건너온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인들이 17만명쯤으로 추산된다.

새로 유입된 인구와 토착 게일족 사이에 균열이 발생했다. 종교가 달랐고, 토지 정책의 수혜가 달랐다. 이주자들은 토지를 경작했지만, 토착인들은 밀려났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급진 장로교도들은 아일랜드인의 카톨릭을 증오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영국은 얼스터 지방에 조선, 섬유 등의 산업을 집중 배치했고, 남부와 북부의 경제적 격차도 커졌다.

1845~1849년 대기근 시기에도 북부 얼스터 지방은 비교적 공업화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피해가 적었고, 남부 농업지대는 엄청난 곤경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차이는 아일랜드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분열양상으로 나타났다.

 

얼스터와 북아일랜드 /위키피디아
얼스터와 북아일랜드 /위키피디아

 

북부 신교도들은 남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 동화되지 않았다. 북부인들은 무장투쟁을 불사하더라도 남쪽의 아일랜드 정부에 에 귀속될 것을 거부했다. 오히려 영국 연방에 남겠다는 것이다.

1912년 영국 의회에 아일랜드 자치법령이 제출되었을 때 얼스터(Ulster) 지역의 신교도들은 변호사 출신인 에드워드 카슨 경(Sir Edward Carson)을 중심으로 얼스터 의용군(Ulster Volunteer Forse)를 결성해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아일랜드의 독립이 이뤄지더라도 북부 지역은 독립한 아일랜드에 속하지 않고 영국에 남겠다고 주장했다. 얼스터 의용군은 총포와 화약을 밀수입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자치 논의가 진행될수록 얼스터의 연합파(Unionist)들은 극렬히 저항했다. 그들은 아일랜드 의회를 인정할수 없고 아일랜드 법을 거부하고 아일랜드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50만명의 얼스터인들이 아일랜드 자치 반대에 서명했다.

 

1919년 아일랜드 의회가 독립을 선포했을 때 얼스터 지역은 아일랜드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다. 얼스터인들은 영국군과 합세해 아일랜드와 전쟁을 벌였고, 1921년 체결된 앵글로-아이리시 조약에서 북부 6개주는 영국 연합왕국(United Kingdom)에 남았다.

 

북아일랜드의 종교분포는 신교도 41%, 카톨릭 40%로 엇비슷하다. 1949년부터 북아일랜드는 수도 벨파스트에 스토몬트(Stornont) 의회를 구성하고 총리를 뽑아 자치정부를 꾸렸다. 6개주는 연합왕국의 일원으로 영국법을 따르고 영국의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하지만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신교도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카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족은 소외되었다. 고용과 주거문제, 교육에서 카톨릭은 차별을 받았고, 선거구도 신교도들에게 유리하게 그어졌다. 신교도와 카톨릭 사이에 결혼도 관습상 금지되었고 교육과 주거지역도 분리되었다. 카톨릭교도들은 직업과 주거의 차별, 직업선택의 자유, 동등한 투표권을 주장했고, 이에 신교도들은 카톨릭교도들의 비협조적 태도를 비난했다.

 

이러한 갈등은 1960년대 들어가면서 민권운동으로 전환되었다. 1967년에는 북아일랜드 인권운동단체로 북아일랜드 시민권리연합체(NICRA)가 결성되었고, 1968년에는 학생단체가 결성되어 카톨릭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북아일랜드 자치정부의 테렌스 오닐(Terence O'Neill) 총리는 개혁을 약속했으나, 신교도 연방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약속이 이행되지 못했다.

1968105일 카톨릭이 다수인 런던데리에서 평화적 시위가 열렸고, 경찰이 이를 저지하는 가운데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아일랜드 분쟁은 격화되었고, 두 진영의 충돌 회수가 늘어났다. 경찰은 늘 영국에 귀속하자는 연합파의 편을 들었다.

 

1981년 벨파스트의 영국군 /위키피디아
1981년 벨파스트의 영국군 /위키피디아

 

1972130,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민권운동가들은 시민들을 조직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때 영국에서 파견된 공수부대가 시위대에게 발포했다. 민간인 카톨릭교도 14명이 죽고 15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을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쌍방 간 격렬한 무장 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카톨릭이 중심이 된 아일랜드 공화군(IRA: Irish Republican Army)는 폭탄테러를 일으켜 보복했고, 영국군과 경찰은 IRA를 체포하기 위해 민간 가정을 이 잡듯이 뒤졌다. 아일랜드공화국과 북아일랜드 국경은 삼엄하게 차단되었고, 교량과 항만은 폐쇄되었다. IRA는 활동무대를 영국 본토로 넓혀 방화, 살인, 폭행, 구금, 구타, 테러를 일삼았다.

 

1981년에는 IRA 요원이었던 바비 샌즈(Bobby Sands)가 단식투쟁 끝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샌즈는 불법무기를 소지하고 테러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4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센즈는 자신을 정치범으로 취급해 달라고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그를 정치범으로 인정하면 IRA를 공식단체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는 단식 66일째 되던 55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 직전에 지역구 하원의원에 출마해 연합파 후보를 누르고 옥중 당선되었다. 바비 샌즈와 동조 단식을 벌이던 민권운동가들이 연쇄적으로 희생되어 10명에 이르렀다.

 

바비 샌즈를 기리는 벽화 /위키피디아
바비 샌즈를 기리는 벽화 /위키피디아

 

숱한 희생자를 내면서 북아일랜드 문제가 격화되자 영국은 문제 해결에 나섰다.

1972년 영국 의회는 인종 및 종교 차별정책을 취한 북아일랜드의 자치권을 빼앗았다. 스토몬트 의회를 해산하고 런던의 웨스터민스터 의회가 직접 통치를 했다. 1974년에는 카톨릭, 신교도 대표를 불러 서닝데일 협정(Sunningdale Agreement)을 체결했으나, 양측의 감정의 골이 깊어 이행되지 못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공화국에 손을 내밀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영국과 아일랜드 공화국 사이에 물밑 협상이 진행되어 1985년에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개럿 피츠제럴드 아일랜드 총리 사이에 앵글로-아이리시 협정(Anglo-Irish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의해 아일랜드 정부가 북아일랜드 문제에 조언을 할수 있고, 북아일랜드인 다수가 동의할 경우 남북 아일랜드의 통일을 이룰수 있도록 했다. 또 양국은 경계지역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IRA가 북아일랜드에서 테러를 감행한 후 남아일랜드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로 했다.

이 협정에 대해 영국과 아일랜드 의회는 비준을 했지만, 북아일랜드의 신교도와 카톨릭 정파는 반대했다.

하지만 이 협정 체결 이후 격렬했던 갈등은 정점을 이루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두 종주국 지도자들의 합의가 북아일랜드 정파간 대립을 해소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북아일랜드 시민들도 IRA의 극단적 투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1984년 IRA의 공격을 받은 영국의 그랜드 브라이튼 호텔 /위키피디아
1984년 IRA의 공격을 받은 영국의 그랜드 브라이튼 호텔 /위키피디아

 

1998410일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정부, 북아일랜드의 각 정파가 참가해 벨파스트 협정(Belfast Agreement)을 체결했다. 협정 체결일이 부활절 전의 금요일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을 기념하는 굿프라이데이(good Friday)여서 성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라고도 한다.

협정의 내용은 애매하다. 첫째 북아일랜드 국민의 다수는 영국의 일원으로 남길 원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북아일랜드의 일부분과 아일랜드 섬의 다수가 통일을 원한다는 내용이다.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주장을 모두 협정에 수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북아일랜드의 독자성을 인정한 셈이다.

이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 아일랜드 공화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북아일랜드에 있는 6개 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협정은 1999122일을 기해 발효되었다. 또한 IRA는 이 협정에 의해 무장을 해제했다.

1960~2001년 사이에 전개된 북아일랜드 사태로 3,532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중 60%는 아일랜드계 공화파이고, 30%는 신교도, 10%는 영국인으로 파악된다. 2010년 현재 10만명의 북아일랜드인들이 과거 분쟁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다는 자료도 있다.

이 협정 이후에도 각 정파의 분란은 있었지만 안정을 희구하는 세력이 커짐에 따라 마침내 IRA는 무기를 내려놓았고, 2007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북아일랜드 면적은 아일랜드 섬의 20%를 차지하고 인구는 180만명으로 섬 인구의 30%를 차지한다. 하지만 아직도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엔 구교도와 신교도를 가르는 평화의 선(peace line)이 도심을 가르고 있다.

 

벨파스트 도심을 가르는 평화의 선(peace line) /위키피디아
벨파스트 도심을 가르는 평화의 선(peace line)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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