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 예국①…동해안 항로의 중심
사라진 고대왕국 예국①…동해안 항로의 중심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4.22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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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 때, 신라영토 강릉까지 북진…눌지왕때 북해항로 존재

 

교과서에서 동예라고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역사서에 그렇게 표현되 경우를 찾기 힘들다. 그저 예(또는 )로 나온다. 종족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만주 북부 부여(夫餘)에 북속되었다가 동해안으로 이주하면서 국사학자들이 이를 동예라고 표현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국토를 9주로 편성했을 때 명주 가운데 강릉 이북지역을 예국의 영토로 보면 될 것 같다.

 

예국과 실직국 /그래픽=김현민
예국과 실직국 /그래픽=김현민

 

예는 신라·백제·고구려가 형성되는 초기에 이미 동해안에 자리를 잡았다. 국사교과서에서 동예라고 표현하는 나라는 바로 이 나라다. 한반도에 들어온 예, 즉 동예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국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거의 비슷하게 나온다.

 

()는 남쪽으로 진한,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 있으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에 속한다. 호수는 2만이다. (삼국지 동이전)

명주(溟州)는 원래 고구려의 하서량(河西良)[하슬라()라고도 한다]로써 뒷날 신라에 속했다. 가탐(賈耽)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지금 신라의 북부 경계에 있는 명주는 대부분이 예()의 옛 나라이다.”라고 써있다. 이전의 역사서에는 부여(扶餘)를 예의 땅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인 듯하다. (삼국사기 잡지)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다. (삼국유사 마한편)

 

신라는 실직(삼척) 군주였던 이사부(異斯夫) 장군을 512년 하슬라(何瑟羅, 강릉) 군주로 부임시켰다. 군주(軍主)의 직책이 중앙에서 파견된 군대(京軍)의 총책임자였으므로, 신라의 영역이 삼척에서 강릉으로 넓혀졌다는 뜻이다. 그 사이에 신라군이 고구려와 그 동맹국과 수차례 전투를 벌여 삼척에서 강릉까지 북진했음을 보여준다.

 

강원도 동해안엔 예나 지금이나 산물이 풍부하지 못하다. 해안의 길은 평이한 육로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동해안에는 곳곳에 백두대간의 지맥이 내려와 일직선상의 행로가 평탄하지 않다. 7번 국도를 따라 운전하다 보면 산을 넘고 터널을 지나야 한다. 동해안은 절벽과 높은 산으로 막혀 있어 신라인들이 우마차로 인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북과 강원도 해안에는 태백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하천(남대천, 오십천등)의 어귀나 해류가 막아놓은 석호(청초호, 경포호) 주변에 토지를 일구거나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부락이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이어져 있다. 이사부는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흩어져 있는 부락들을 해상 수단을 이용해 지배했을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동해안은 과거 예국(濊國)의 영역이었다. 삼국시대 초기에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동지역은 예족, 영서는 맥()족이 거주했다. 삼척, 울진, 영해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한 실직국도 예족의 한 갈래였다. 삼국사기에는 말갈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 지리적으로는 예와 맥의 영역과 오버랩된다. 따라서 예, , 말갈이 미분화한 상태에서 강원도, 경북 동해안, 경기도 서부지역에 거주하며, 부족국가를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우산국(울릉도)의 항복을 받아낼 무렵, 영토가 강원도 북부까지 확장해 예족을 지배함과 동시에 동해안의 해상 부족을 통치권에 넣어 반도의 동해안은 물론 해의 영유권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주에서 강릉까지 육지를 선으로 하고, 울릉도와 독도를 점으로 지나는 반원형의 육상, 해상 지배권을 확장했다는 의미다.

 

신라는 일찍부터 동해안 루트를 개발해 운영해왔다. 경주에서 강원도 고성까지의 북해항로가 있었다는 사실을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삼국유사에는 눌지왕의 동생인 보해(삼국사기엔 복호)가 동해안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경주로 돌아온 기록이 남아있다. 그 기사는 이미 북해의 길(北海之路)’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제상(堤上)은 왕의 명을 받고 곧장 북해의 길(北海之路)’로 떠났다. 옷을 바꾸어 입고 고구려로 들어가 보해(寶海)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도망갈 날짜를 약속했다. 그리고 먼저 515일에 고성(高城)의 수구(水口)에 와서 배를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보해는 병을 핑계로 대고 며칠 동안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중에 도망쳐서 고성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을 보내어 뒤쫓게 하였는데 고성에 이르러 보해를 따라잡았다. 그렇지만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 늘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어 모두들 화살촉을 뽑고 쏘았다. 그래서 드디어 죽음을 면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박제상(삼국유사엔 김제상)은 왕의 아우인 복호(卜好)를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강원도 고성으로 길을 떠나 고구려의 수도(국내성)로 들어가 복호의 탈출을 도왔고, 복호는 고성의 포구에서 신라측이 마련한 배를 타고 도망쳤다는 스토리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가 되기 이전에 신라의 배가 강원도 북쪽까지 항로를 읽고 있었다는 얘기다. 예국을 조공국으로 삼아 간접 지배를 하면서 신라의 선박은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 북부 또는 함경도까지 운항하며 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길을 따라 박제상은 고구려 수도로 입성했고, 눌지왕의 동생이 탈출한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길은 육로로는 백제 또는 맥족(또는 말갈)이 막고 있었고, 바닷길은 가야와 백제에 막혀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와 교역을 하든 전투를 벌이든 그 길은 바다를 이용한 동해안 해상로였다.

따라서 이사부가 하슬라(강릉) 군주로 임명되자 바로 우산국을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예(또는 말갈)과 왜, 우산국 사이에 있을수 있는 동맹의 고리를 끊고, 동해를 신라의 바다, 즉 신라해(新羅海) 만들기 위해서였다. 후에 진흥왕이 함경남도 마운령, 황초령까지 영토를 넓히는데에 이사부의 동해 경영이 힘이 됐을 것이다.

군주(軍主)의 위치는 전략 변경에 따라 옮기기도 한다. 이사부가 지증왕 13(512)에 하슬라(阿瑟羅, 강릉)의 군주가 된다. 지증 임금은 신라가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동해안 군사 거점을 삼척에서 강릉으로 북쪽으로 이동시켰고, 성공적으로 실직군주의 임무를 수행한 이사부를 하슬라 군주로 발령한 것이다. 이사부의 내륙 관할 영역이 울진에서 삼척, 강릉까지 확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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