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②…오토 대제, 아델라이드에 빠지다
신성로마제국②…오토 대제, 아델라이드에 빠지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1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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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 겸임하며 교황 권위 제압…신성로마제국 첫황제 등극

 

1933~1945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 독일을 제3제국(Third Reich)이라고 부른다. 2제국은 1871~1918년 사이에 프로이센이 주도한 독일 제국이며, 1제국은 962~1806년 사이의 신성로마제국을 일컫는다.

독일의 제2제국과 제3제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벌였다. 독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제2, 3 제국은 제1제국의 영토를 회복해야 할 영토로 보았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무기력하고 분열된 제후 연합체였다. 그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의 통합국가를 형성했을 때 게르만족의 팽창력은 주변국가의 위협이 되었다.

 

1제국은 오토 대제(Otto the Great) 또는 오토 1(Otto I)로 불리는 인물로 시작된다.

오토 1세는 독일 북부 작센(Sachsen)의 제후였다. 작센은 영어로 색슨(Saxon)이라 표기되는데, 영국인의 원형인 앵글로-색슨족(Anglo-Saxons)의 뿌리다. 이 종족은 1천여년 전에 독일 북부와 덴마크 남부에 거주하던 게르만 일파인 안굴족(Angul)과 작센족(Seaxan)이 건너가 형성한 민족이다.

프랑크 왕국이 베르덩-메르센 조약을 거치면서 3분할되고, 세 나라에서 카를 대제의 후손인 카롤링거(Karolinger) 왕조의 대가 끊겼다.

독일 지역인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프랑켄(Franken), 작센(Sachsen), 슈와벤(Schwaben), 바이에른(Bayern) 지역의 부족장들이 제후가 되어 할거했다.

게르만족들은 관습에 따라 국왕을 부족장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했다. 국왕이 차기 국왕을 지명할 권한이 있기 때문에 국왕의 혈통이 이어질 때는 대체로 제후들의 동의를 얻어 그 혈통에서 국왕이 나왔다. 그런데 혈통이 끊어지거나 국왕의 처사가 일방적일 때는 지방의 영주들이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는 제도를 갖고 있었다.

카를 대제의 후손이 루트비히 4(Ludwig IV)에서 끊기자 동프랑크 왕국의 공작들이 모여 프랑켄의 공작 콘라트 1(Konrad I)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새 국왕의 통제를 지방 영주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콘라트는 로타르, 아헨의 영주들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트리어 주교도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작센의 영주 하인리히(Heinrich)에게 동프랑크 국왕자리를 넘겨주고 죽었다.

 

앵글로-색슨 족의 이동로 /위키피디아
앵글로-색슨 족의 이동로 /위키피디아

 

힘의 시대였다. 힘이 있는 자는 국왕이 되고 힘이 없는 자는 물러나야 했다. 그 힘은 가족의 위계질서와 결혼을 통해 얻어졌다.

하인리히는 919년 동프랑크 국왕이 되어 네덜란드 지역인 로트링엔의 침공을 막아 내고 이민족인 마자르족과 슬라브족, 바이킹계의 데인족의 침략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하인리히는 936년에 죽기 전에 왕위를 오토에게 넘겨줬다.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에 작센 왕조가 시작된다. 역사가들은 류돌핑(Liudolfing) 왕조 또는 오토 왕조라고도 한다.

 

오토 1세는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9368724살인 그는 카를 대제가 프랑크왕국 수도로 삼았던 아헨(Aachen)에서 대관식을 열었다. 대관식에는 로트링엔 공작, 프랑켄 공작, 슈와벤 공작, 바이에른 공작을 비롯해 지방 영주들을 죄다 불러 놓고 마인츠 주교의 집전 아래 개최되었다. 즉위 장소뿐만 아니라 검, 외투, , 팔찌, 구슬 등 왕권을 상징하는 장식물에서도 카를 대제의 대제국을 일구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역사적인 행사에 지역 영주들에게 시종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지방 제후는 자신, 즉 동프랑크왕이지 독일왕의 제후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동프랑크의 작센 제후의 영지 /위키피디아
동프랑크의 작센 제후의 영지 /위키피디아

 

그러나 의식은 의식일 뿐, 그는 가족과 지방 영주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오토의 아버지 하인리히는 아들에게 재산을 고르게 나눠주는 게르만족의 분할상속이 왕국을 분열시키는 원인으로 판단해 영지와 전 재산을 오토에게 물려 주었다. 그러자 배다른 형 탕크마르(Thankmar)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탕크마르는 분할상속을 요구하며 지방의 영주들과 손잡고 전쟁을 걸어왔다. 바이에른 공작 에베르하르트는 두차례나 전쟁을 벌였고, 여동생의 남편인 로트링엔 공작 길베르트와 동생 하인리히도 반란에 합세했다. 오토 1세는 즉위와 함께 내부 반란을 집압하는데 몰두했다. 오토는 차례로 반란을 진압했고, 마지막으로 그의 배다른 형 탕크마르를 세인트 페테르 성당 제단에서 죽여 버렸다.

 

955년 치열한 골육상잔을 진압한 후 오토는 외부로 눈을 돌렸다.

여기에 아델라이드(Adelaide)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지금의 프랑스 서부지역과 스위스 일대를 차지하던 부르고뉴(Bourgogne) 왕국의 공주였다. 독일어로 부르군트(Burgund). 아델라이드의 아버지 루돌프 2세는 이탈리아왕 베렝가리오 1(Berengario I)와 싸워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를 차지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롬바르디아 귀족들은 루돌프의 정적인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위그(Hugh) 공을 끌어들였다. 루돌프 국왕은 위그 가문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성공했지만 937년에 사망했다. 그때 유일한 상속자인 아델라이드는 5살이었다.

위그 공은 부르고뉴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치를 필요 없이 자신의 아들 로타르 2(Lothair II)와 아델라이드를 결혼시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추진했다.

로타르 2세는 이탈리아 왕이 된 후 94715살 소녀 아델라이드와 결혼해 엠마라는 딸을 낳는다. 하지만 결혼 3년째 되던 950년 아델라이드 남편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정적인 베링가리오 2(Berengario II)에 의해 독살되었다. 베링가리오 2세는 아델라이드의 아버지 루돌프 2세와 싸운 베렝가리오 1세의 손자였다.

베링가리오 2세는 로타르 2세를 살해한 후 아델라이드에게 청혼을 했다. 남편을 죽이고 자신과 결혼하자는 베링가리오의 욕심에 아델라이드는 넌더리가 났다.

그녀는 코모(Como) 성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베링가리오의 군사들에게 쫓겨 체포되고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몇 달후 그는 감옥에서 탈출해 늪지에 은신했다. 그러던 중 한 성직자의 도움을 받아 난공불락의 요새안 카놋사 성채(Canossa Castle)로 피신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오토 1세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독일 마이센 성장의 오토 1세와 아델라이드 상 /위키피디아
독일 마이센 성장의 오토 1세와 아델라이드 상 /위키피디아

 

내란을 진압한 후 이탈리아를 노리던 오토는 이탈리아 왕비의 직함을 갖고 있는 아델라이드의 구원요청을 받고 곧바로 이탈리아로 달려갔다. 오토 1세는 제멋대로 이탈리아 국왕을 자처하는 베링가리오 2세를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오토 1세와 951년 아델라이드는 결혼했다. 이로써 오토 1세는 이탈리아왕을 겸하게 되었다.

 

오토 1세는 아델라아드에 앞서 왕비가 있었다. 동족인 잉글랜드 왕의 공주 에디스와 결혼했는데 첫째 왕비는 아들 류돌프(Liudolf)를 낳은 후 946년에 죽었다. 아들 류돌프는 아버지가 재혼하자 상속권의 위협을 느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해 귀족 지위를 박탈당한채 쓸쓸히 죽었다.

 

쫓겨난 베링가리오 2세는 다시 세력을 키워 로마 교황청을 위협했다. 교황 요하네스 12(Joannes XII)는 다급하게 오토 1세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9621월 오토 1세는 아내 아델라이드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군해 베링가리오를 제압했다.

 

972~1032년 오토 왕조의 신성로마제국 /위키피디아
972~1032년 오토 왕조의 신성로마제국 /위키피디아

 

962212일 오토 1세는 교황 요하네스 12세로부터 황제 지위를 부여받았다. 서기 800년 카를 대제의 대관식이 교황 주도로 열린 것과 달리 162냔흐 오토의 대관식은 황제의 주도로 열렸다는 점이 다르다. 아델라이드도 참석해 황제의 비(empress) 지위에 올랐다. 교황은 황제에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대신에 오토는 교황에게 영지(교황령)을 주고 황제의 특허장을 내렸다.

하지만 교황은 오토 대제가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배신을 때렸다. 요하네스 12세는 쫓겨난 베링가리오 2세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고 마자르족과 동로마 제국에 사신을 보내 오토 1세에게 대항하는 동맹을 촉구했다. 이 소식을 들고 오토 1세는 교황 요하네스 12세를 퇴위시키고 레오 8(Leo VIII)를 앉혔다.

 

오토 1세는 오토 대제라고 불린다. 그는 독일 역사에서 첫 황제로 꼽힌다. 그는 독일왕이자 이탈리아왕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였다. 아울러 자신에게 대드는 교황을 폐위시키고 자기 편의 사람을 옹립하는 그야말로 황제였다.

오토 1세는 아델라이드와 사이에 낳은 오토 2세를 후계자로 삼았다.

 

오토 1세 상 /위키피디아
오토 1세 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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