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③…카노사의 마틸다, 황제를 누르다
신성로마제국③…카노사의 마틸다, 황제를 누르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1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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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 굴욕의 배경이 된 여인…교황 편에 서서 황제 무릎 꿇렸다

 

유럽 중세의 역사에서 10771월 카놋사의 굴욕은 중대한 전기로 기록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머물고 있는 이탈리아 카노사 성문 앞에서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사흘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맨발로 무릎을 꿇고 파문 철회를 호소했다는 게 사건의 전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의문점이 남는다. 왜 교황은 로마의 교황청을 놓아두고 혹한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아펜니노 산맥의 험준한 요새로 갔을까. 황제를 거만하게 쳐다보고 있는 여인은 누구일까.

 

역사의 기록을 볼 때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 성에 간 것은 맞다. 교황청의 입장에 서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독일 황제의 무릎을 꿇렸다는 점을 강조해 이 사건을 카노스의 굴욕’(Humiliation of Canossa)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카노사로의 길’(Road to Canossa)이라고 의미를 절하하고 있다. 독일인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사태를 소명하기 위해 교황을 만나러 갔을 뿐이란 얘기다.

이 스토리는 당대 독일의 수도사 람베르트 헤르스펠트(Lambert von Hersfeld)가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편지 등을 참조해 정리한 것인데, 상당 부분에서 윤색이 되었다고 한다.

 

비타 마틸디스의 마틸다 /위키피디아
비타 마틸디스의 마틸다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을 보자.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 돈지오(Donzio)1111년에서 1115년 사이에 그린 비타 마틸디스(Vita Mathildis)라는 그림 중의 하나다. 아랫부분에 작게 그려져 뭔가 청원을 하는 이가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Heinrich IV)이고, 왼쪽의 수사가 클뤼니 수도원의 위그(Hugh) 수도원장, 오른쪽의 여인이 투스카나 공작 마틸다(Mathilda).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수도원장과 마틸다를 통해 교황에게 속죄를 받아달라고 중재를 요청하는 모습이다.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이다.

그러면 여기서 마틸다라는 여인과 클뤼니 수도원은 하인리히 4세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서기 962년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부여받은 오토 대제의 후손은 작센 왕조 5대째인 하인리히 2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바람에 대가 끊겼다. 그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이는 프랑켄(Franken) 영주 콘라트 2(Conrad II)였다. 이때부터 작센 왕조가 끝나고 잘리에르(Salier) 왕조가 시작되었다.

콘라트 2세는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의 왕까지 겸해 독일과 이탈리아는 물론 부르고뉴까지 지배했다. 콘라트 2세가 1039년에 죽고, 그의 아들 하인리히 3세가 황제위를 물려받았다.

 

그 무렵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은 보니파시오라는 백작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로렌 영주의 딸 베아트리체(Beatrice)와 결혼해 12녀를 두었다. 부부의 맏딸이 마틸다(Matilda)였다. 로렌은 신성로마제국 영토 내의 봉지였고 베아트리체는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사촌이었다.

마탈다 미니어처 /위키피디아
마탈다 미니어처 /위키피디아

 

사단은 토스카나 백작 보니파시오가 1052년에 사망하면서 벌어졌다. 토스카나의 지배권은 아들 프레데릭(Frederick)에게 넘어갔지만 너무 어렸다. 베아트리체는 섭정이 되어 토스카나를 이끌었지만 힘에 부쳐 고향인 로렌에서 먼 친척뻘인 몰락한 귀족 고드프루아와 결혼해 방패막이로 살았다. 고드프루아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고 독재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는 반황제파였다.

하인리히 3세는 고드프루아가 토스카나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얼마후 마틸다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1년 사이에 죽었다. 토스카니의 상속권은 마틸다에게 넘어갔다. 어린 마틸다는 동생들의 죽음이 독일 황제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 믿었다. 1055년 하인리히는 군사를 이끌고 토스카나를 쳐들어와 베아트리체와 마틸다를 잡아갔고, 고드프루아는 도망쳤다.

하인리히 3세의 욕심은 토스카나를 자기 영지로 뺏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듬해인 1056년에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하인리히 4세가 황제가 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타협적으로 나와 베아트리체와 마틸다를 풀어주고 영지도 되돌려 주었다.

피렌체에 되돌아온 모녀는 적극적으로 반황제파에 가담했다. 도망간 고드프루아를 다시 불러 들였다. 고드프루아는 적극적으로 교황청에 개입했다. 그동안 교황은 황제의 입맛에 맞는 독일인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고드프루아가 손을 쓰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한편 그 무렵 베네딕트회 소속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개혁운동이 벌어졌다. 클뤼니 개혁운동은 고위성직자들이 비행을 저지르고 성직을 매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원래의 종교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고드프루아는 1057년 빅토리우스 2(Victorius II)가 사망한 후 자신의 동생이 교황이 되도록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인리히 4세는 어렸고, 섭정에 나선 그의 어머니 아그네스(Agnes)도 모르는 상태에서 교황이 지명된 것이다. 스테파누스 9(Stephanus IX)는 하인리히 4세를 폐위시키고 자시의 형 고드프루아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옹립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스테파누스는 1년만에 죽고 그들 형제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이어 니콜라우스 1, 알렉산데르 2세도 모두 이탈리아 출신이었고, 교황 선출 과정에 독일 황제측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11세기의 이탈리아 /위키피디아
11세기의 이탈리아 /위키피디아

 

1069년 고드프루아가 죽어가면서 마틸다에게 자신의 아들과 결혼할 것을 요청했다. 마틸다는 양아버지마저 세상을 뜨면 토스카나가 약화될 것을 두려워 결혼에 응했고, 어머니 베아트리체도 찬성했다. 하지만 마틸다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이 곱추였고 1년후에 낳은 아들도 곧바로 죽었다. 마틸다는 별거에 들어갔고, 남편은 결혼을 이어가자고 칭얼거렸다.

때마침 클뤼니 개혁파의 강경파인 그레고리우스 7(Gregorius VII)가 교황에 올랐다. 마틸다는 반황제파인 교황과 친분을 강화했고, 그레고리우스는 이혼을 요구하는 마틸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때 마틸다와 그레고리우스 사이에 불륜 소문이 났고, 마틸다의 남편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중에 살해되는 사건이 터졌다. 물론 그 내막은 알수 없다. 어쨌든 마틸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막역한 지지자였다. 토스카나는 황제군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마틸다가 버티는한 황제는 쉽게 교황을 제압하기 어려웠다.

 

그레고리우스가 교황이 된 후 성직 매매와 성직자 결혼을 금지시켰고, 동시에 성직자 서임권을 교황이 갖는다고 발표했다. 1075년 교황은 교황청내 황제파 주교 5명을 성직 매매 혐의로 파문하고 10761월 하인리히 4세에게 황제는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하인리히는 곧바로 보름스에서 독일 주교회의를 열고 교황 폐위를 결의했다. 교황 폐위의 명분은 마틸다와의 불륜 소문이었다. 그러자 그레고리우스 7세도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다.

 

카노사 성채 /위키피디아
카노사 성채 /위키피디아

 

파문과 폐위라는 초강수를 던지며 황제와 교황은 일촉즉발로 대치했다. 군사력으로는 황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교황 편에는 유일하게 믿을수 있는 건 마틸다의 토스카나군뿐이었다. 하인리히 4세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을 것이란 보고가 들려왔다. 마틸다는 그레고리우스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인 카노사 성채로 도망치자고 권했고, 교황도 받아들였다.

카노사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유명했다. 앞서 120년 전에 부르고뉴 왕국의 공주이자 이탈리아왕 로타르 2세의 왕비인 아델라이드(Adelaide)가 카노사 성으로 피신해 있다가 오토 1세에게 구원요청을 했던 곳이다. 당시 아델라이드를 체포하려고 베링가리오 2(Berengario II)3년간 포위공격했지만 카노사 성채를 함락하지 못했다.

교황과 마틸다는 이제나 저제나 황제군이 밀려올까 조바심을 내던 중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1077125일 군대는 오지 않고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부인 베르타, 아들 콘라트와 시종들만 오는게 아닌가. 황제는 교황에게 소명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말했지만 교황과 마틸다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문밖에서 3일간 기다렸다.

그 사이에 마틸다와 클뤼니 수도원장이 교황의 입장에서 황제측과 협상에 나섰다. 교황은 황제에 대한 파문을 철회하고, 황제는 교황청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황제가 맨발로 무릎을 꿇었는지, 성문 밖에서 3일간 눈보라 속에서 기다렸는지는 알수 없다. 후에 연대기 작가들이 만들어낸 소설이다.

 

황제는 카놋사에서 교황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다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다만 불쾌했을 것이다. 하인리히 4세는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불쾌감을 표출했다.

3년후인 1080년 하인리히 4세는 군대를 이끌로 로마로 쳐들어와 마틸다의 토스카나의 영지를 빼앗고 그레고리우스를 교황청에서 내몰고 클레멘스 3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웠다. 그레고리우스는 로마 산탄젤로 성에서 4년간 농성하며 나폴리의 노르만인들을 끌어들였다. 교황의 부름을 받은 노르만인들은 로마를 뒤찾아 주었지만 그 댓가로 로마를 마음껏 약탈했다. 로마 시민들은 독일 황제보다 교황이 더 미웠다. 그레고리우스는 시민들의 반란에 쫓겨 지방을 전전하다가 1085년에 사망했다.

 

이탈리아 세인트 페테르 바실리카의 마틸다 무덤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세인트 페테르 바실리카의 마틸다 무덤 /위키피디아

 

그러나 마틸다는 하인리히에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1089년에 반교황파 독일 바바리아(바이에른) 공작과 두 번째 결혼하면서 세를 불리려고 시도했다. 바바리아 공작 웰프 5(Welf V)10대 중반이었고, 마틸다는 그때 40대 초반이었다. 웰프는 결혼 후에도 잠자리를 같이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마틸다는 욕설을 퍼부으며 새 신랑을 내쫓아 버렸다.

마틸다의 마지막 시도는 하인리히의 맏아들 콘라트와의 동맹이었다. 콘라트는 아버지를 따라 카노사까지 따라왔지만 독실한 신자여서 교황과 싸우는 아버지에게 반항했다. 마틸다는 콘라트를 꾀었다. 황제의 새 부인인 러시아 키에프의 공녀 에우프락시아(Eupraxia)도 남편에게 돌아서 마틸다에게 합류했다.

마틸다와 콘라트, 에우프락시아의 동맹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의 둘째 아들 하인리히 5세마저 아버지에게 등을 돌렸다. 106686일 하인리히 4세는 숨을 거두고, 하인리히 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1122년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리투스 2세 사이에 성직자의 서임권이 교황에게 있다는 내용의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었다. 끝내 교황측이 이긴 것이다.

그에 앞서 1111년 마틸다는 하인리히 5세와 만나 신성로마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되 토스카나는 마틸다의 영지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타협안을 이끌어냈다. 하인리히 5세는 마틸다를 이탈리아의 부여왕(Vice-Queen)으로 봉했다.

마틸다는 1115년 통풍으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에 앞서 자신의 모든 영지를 교황청에 이양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잔다르크가 외세에 대항한 영웅인 것처럼 이탈리아에선 마틸다가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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