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⑤…대공위시대 후 합스부르크 등장
신성로마제국⑤…대공위시대 후 합스부르크 등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1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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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간 대립으로 두명의 독일왕 출현…스위스 출신 루돌프 옹립

 

신성로마제국에 왕이 두명이 존재한 시절이 있었다. 제후들은 띠를 지어 어느 한쪽을 지지하면서 싸웠고, 다른 한편으로 영지에서 자립을 추구했다. 이 모든 것이 교황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 2(1220~1250)가 독재권력을 행사하면서 교황을 압박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대립 황제를 내세웠다. 즉 황제파와 교황파의 분열이었다.

시작은 1243년에 이탈리아 로마 근처 비테르보(Viterbo)라는 곳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황제는 즉시 진압군을 이끌고 제압했다. 배후에는 그 도시의 주교가 있었다. 당시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중재안을 제시해 일단 휴전했다. 그런데 주교가 반란을 부추겨 황제군을 도륙했다. 황제는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교황청으로 밀고 들어갔다. 인노켄티우스는 프랑스 리용으로 도망쳐 1245년 프리드리히를 파문하고 폐위조치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파문을 무시했으나 교황의 선동에 상당수의 독일 제후들이 황제에 반기를 들었다. 1246년 교황은 튀링겐 지방의 백작 하인리히 라스페(Heinrich Raspe)를 독일왕으로 임명했다. 독일에 두명의 왕이 생긴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아들 콘라트 4세를 독일로 보내 반역자들을 진압하도록 했다. 대립왕 하인리히는 콘라트의 군대를 무찔렀지만 그도 중상을 입어 1년만에 사망했다. 하인리히를 이어 홀란트(네덜란드)의 백작 빌렘(William II)1247년 대립 왕을 이었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뜨자 콘라트 4세가 슈타우펜 가문의 독일왕에 올랐다. 교황은 콘라트에게도 파문장을 내렸고 그는 1254년 말라리아로 숨졌다. 이로써 독일왕은 빌렘 한사람만 남게 되었다. 빌렘은 로마를 찾아가 인노켄티우스 교황에게 황제 대관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교황은 차일피일 미뤘다. 빌렘은 1256년 겨울 네덜란드 북부의 반란자를 소탕하러 가던 중에 얼음이 언 늪을 건너다 빠져 죽었다.

단일 국왕이 죽자 다시 영주들이 슈타우펜(Staufen) 가문과 벨펜(Welfen) 가문으로 갈라졌다.

 

벨펜 가문의 영지 /위키피디아
벨펜 가문의 영지 /위키피디아

 

슈타우펜 측은 가문과 인척관계에 있는 스페인 사람을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카스티유(Castilla)의 국왕 알폰소(Alfonso)였다. 독일 영주들이 알폰소를 왕으로 선택한 것은 자기들의 특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알폰소는 재임 기간중에 한번도 독일을 방문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벨펜 가문측은 영국에서 국왕을 데려왔다. 잉글랜드 존 왕의 둘째 왕자 콘웰 백작 리처드(Richard of Cornwall)였다. 리쳐드는 그래도 알퐁소보다 낳아 독일을 가끔 방문하기는 했지만 영국의 내정에 몰두하느라 독일엔 신경을 쓰지도 못했다.

두 외국인 왕은 형식적인 군주에 불과했고 독일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제후들의 전국시대(戰國時代)나 다름없었다.

 

이번에는 교황이 독일을 걱정했다. 독일에 군주가 없는 것은 교황이 간여할 일이 아니지만, 독일이 사실상 내전에 빠지면서 교황을 호위해줄 군대가 없어진 게 걱정거리였다.

1272년 대립왕 리쳐드가 영국에서 사망했다. 알퐁스가 스페인에서 살아 있었지만 사실상 부재 국왕이었다. 프랑스가 교황청을 넘실거렸다. 교황에게는 독일군의 지원이 절대 필요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가 독일 선제후 7명에게 단일 국왕을 선출하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만일 제후들이 국왕을 선출하지 못하면 자신이 지명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교황이 독일왕을 지명할 권한은 없다. 하지만 선제후들도 두명의 부재국왕의 시대를 종식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대공위시대를 풍자한 그림. 세명의 제후가 신성로마황제의 관 앞에서 “더 이상 제국은 없다”고 말한다. /위키피디아
대공위시대를 풍자한 그림. 세명의 제후가 신성로마황제의 관 앞에서 “더 이상 제국은 없다”고 말한다. /위키피디아

 

독일에 황제 선출권이 있는 제후는 40명 정도였는데 바르바로사 황제가 선제후를 대폭 줄인 이후 13세기엔 7명으로 압축되었다. 7명의 선제후는 독일 내에서 힘 있는 제후로 구성되었고, 그들은 제후 중의 제후였다. 초기 7선제후는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라인 백작, 브란덴부르크 백작, 보헤미아 국왕이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영역 /위키피디아
보헤미아 왕국의 영역 /위키피디아

 

보헤미아는 13세기초에 현재의 체코를 말하는데 최대 영토는 모라비아, 실레지아, 루자티아를 합쳐 광대한 영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1212년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칙령을 내려 오토카르 1(Ottokar I) 공작을 국왕(king)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보헤미아는 왕국 내 왕국이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로서의 권한 이외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 독자적 왕국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선제후 가운데 회의 소집권은 마인츠 대주교가 갖고 있었다. 7명의 선제후는 자기네 영지에 이해관계에 따라 국왕 후보를 도마 위에 올려 놓았다. 처음엔 튀링겐의 프리드리히 백작이 거명되었지만 그는 프리드리히 2세와 친척관계여서 제외되었다. 그 다음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가 후보에 올랐지만 쾰른, 트리어 대주교와 영지분쟁을 벌이고 있어 반대표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가장 만만한 후보가 거명되었으니, 알프스 산중에 영지가 있는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Rudolf von Habsburg) 백작이었다.

 

스위스 아르가우의 합스부르크 가문 초기의 성채 /위키피디아
스위스 아르가우의 합스부르크 가문 초기의 성채 /위키피디아

 

루돌프는 현재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Aargau) 지역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를 다스리는 영세한 귀족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의 힘있는 영주들은 시골의 촌뜨기 귀족을 국왕으로 올려 놓으면 마음껏 국정을 주무를수 있다고 생각했다.

1273101일 선제후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를 독일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1024일 알프스의 시골뜨기 루돌프는 독일 제국의 상징적인 곳 아헨에서 열린 대관식에서 독일 국왕에 올랐다.

이로써 1245년부터 시작된 두명의 국왕, 또는 국왕 부재의 혼란은 종식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대공위시대(Great Interregnum)라고 부른다.

 

루돌프의 독일 국왕 즉위는 합스부르크가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지만 루돌프의 영지는 스위스의 일부에 불과했다. 보헤미아왕 오토카르 2세가 반발했다. 그는 루돌프를 선출하는 선제후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오토카르의 영지는 보헤미아는 물론 오스트리아까지 넓히고 있었다. 보헤미아왕은 조그마한 영지의 백작 출신 국왕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아무리 영지가 보잘 것 없는 귀족 출신이지만 국왕은 국왕이었다. 루돌프는 보헤미아왕을 제국에서 추방한다고 명령을 내리고 토벌을 준비했다. 오토카르 2세는 기다렸듯이 전쟁을 준비했다. 제후들은 어느 쪽도 가담하지 않고 관전했다.

하지만 의외로 오스트리아 마르히펠트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n the Marchfeld)에서 루돌프가 승리했다. 신성로마제국 역외에 있는 헝가리왕과 바바리아 공작, 누렌베르크 백작의 도움이 있었고, 루돌프는 매복작전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마르히펠트 전투 /위키피디아
마르히펠트 전투 /위키피디아

 

이 전투에 승리하면서 루돌프는 보헤미아왕에게서 오스트리아를 빼앗아 자신의 영지로 만들었다. 오스트리아가 합스부르크의 본향이 되는 것도 이때부터였다.

루돌프는 끝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지 못했다. 그는 황제라는 감투보다는 자신의 영지를 확대하는데 주력했고, 그의 사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을 장악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루돌프는 죽기 전에 장남 알브레히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보헤미아왕과 제후들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루돌프가 죽고 선제후들은 1292년 나사우(Nassau) 가문의 아돌프(Adolf)를 독일왕에 추대했다.

아돌프는 무능했다. 그는 곳곳에서 선제후들과 대립했다. 선제후들은 아들프 재위 6년째가 되던 1298년 그를 퇴위시키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자를 새 국왕으로 모셨으니, 알베레히트 1(Albrecht I).

합스부르크는 본거지를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기고 스위스에는 대리인의 지배에 맡겼다. 그 대리인 중 게슬러(Gessler)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빌헬름 텔(Wilhelm Tell)이라는 스위스 건국의 신화가 여기서 나온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위키피디아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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