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⑦…카를 4세, 금인칙서 발표하다
신성로마제국⑦…카를 4세, 금인칙서 발표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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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의 선제후 확정, 교황에 의한 황제대관식 거부, 선제후 우월권 인정

 

체코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블타바 강에 카를 대교(Karl Bridge라는 오래된 다리가 있다. 돌로 된 이 대교에서 프라하 성을 바라보는 경치가 그지 없이 아름답다. 카를 대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4(Karl IV)1357년 여름에 다리의 초석을 몸소 내려 놓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체코는 당시 보헤미아(Bohemia)였고, 프라하가 보헤미아의 수도였다. 카를 4세는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프라하에 거주하며 자국 영지와 제국을 다스렸다.

 

체코 프라하의 카를 대교 /위키피디아
체코 프라하의 카를 대교 /위키피디아

 

카를 4세는 카를 대교의 초석을 놓기 한해 전인 1356, 신성로마제국의 헌법이라 할수 있는 금인칙서(Golden Bull)를 발표했다. 이 칙서는 황제 선출권을 7명의 선제후에게 주고 황제는 교황의 승인 없이 대관식을 갖고 선제후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 칙서는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 450년간 효력을 가졌다. 금인칙서 발표를 전후해서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는 독일어 사용권으로 한정되었고, 제국의 지방분권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금인칙서는 황제와 교황, 제후 사이에서 벌어진 오랜 분란을 종식시키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고, 각 세력의 현실적인 역학을 정확하게 배분하고 설정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황제로선 자신의 권한을 내려놓았고, 교황의 개입을 막기 위해 황제와 대영주가 연합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런 권력 배분은 카를 4세의 현실 인식에서 나왔고, 그 인식은 그가 황제로서 현실의 장벽을 헤쳐 나가면서 터득한 결과였다.

 

하인리히 7세를 선출한 7명의 선제후 /위키피디아
하인리히 7세를 선출한 7명의 선제후 /위키피디아

 

카를 4세는 룩셈부르크 가문이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룩셈부르크 공국(현재의 룩셈부르크)과 보헤미아 왕국(체코)을 차지하던 대영주 가문이었다. 그가 황제가 된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분열의 결과였다.

그에 앞서 룩셈부르크 가문에서 하인리히 7(Heinrich VII)1308년에 독일왕에 선출되었다. 카를 4세는 하인리히 7세의 손자다.

1310년 하인리히는 황제가 되기 위해 로마 교황청으로 향했다. 하지만 하인리히의 머리에 관을 얹어줄 교황이 로마에 없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 의해 옹립되어 한해 전부터 프랑스 아비뇽(Avignonese)에 감금되다시피 했다. 이른바 아비뇽 유수.

하인리히는 교황에게 로마에 와서 대관식을 치러달라고 요청했지만 프랑스 국왕은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황제 자리를 독일왕에게 내주기 싫어 교황의 로마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방법을 변경했다. 1312년 그는 라테라노 교회에서 교황 대신에 추기경의 손을 빌어 황제의 관을 썼다. 프리드리히 2세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탄생한 것은 1백년만이다. 그동안 독일왕 또는 로마왕으로 존재했던 신성로마제국에서 편법적인 방법이지만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황제가 된 후 하인리히는 오래 살지 못했다. 이듬해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하인리히가 죽고 차기 독일왕 자리를 놓고 비텔스바흐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팽팽하게 대치했다.

13141019일 열린 선제후 회의는 쾰른 대주교의 사회로 4명의 선제후가 참석해 합스부르크가의 프리드리히를 새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이에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Ludwig)는 즉각적으로 선제후 회의의 무효를 선언했다. 다음날 열린 선제후회의에는 마인츠 대주교 사회로 5명의 선제후가 참여해 루트비히를 선제후로 선출했다.

하루 걸러 열린 선제후 회의가 두명의 독일왕을 선출한 것이다. 문제는 보헤미아와 작센을 대표하는 선제후가 두명이었고, 그들은 각기 다른 국왕을 선출한 것이다. 황제 선출권자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명의 당선자가 모두 7명의 선제후 중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얻었으므로 서로 독일왕이라고 주장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전쟁이 불가피했다. 루트비히와 프리드리히는 8년간 싸웠고 마침내 루트비히측이 승리해 프리드리히를 감금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독일이 분열해 있는 것이 좋았다. 단일왕이 탄생하려 하니, 프랑스는 아비뇽의 교황을 앞세워 프리드리히의 석방을 요구했다.

루트비히는 결국 타협책을 모색했다. 루트비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프리드리히는 독일왕이 되는 것으로 하는 절충안에 양자가 합의했다. 이어 루트비히는 1328년 황제가 되기 위해 로마로 갔다. 이번에도 교황 요한네스 22세는 아비뇽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황제 대관식을 거부했다.

루트비히도 편법을 동원했다. 그는 고대 로마제국의 방식을 채택해 로미 시민의 추대로 황제에 올랐으니, 루트비히 4세다.

루트비히는 교황 요하네스 22세를 폐위하고 니콜라우스 5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웠다. 루트비히가 독일로 돌아가자 니콜라우스는 즉시 아비뇽으로 달려가 대립교황직을 내려놓고 항복했다. 이후 교황 클레멘스 6세는 루트비히를 파문하고 폐위조치를 내렸고, 1346년엔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를 루트비히 4세의 대립왕으로 내세웠다.

 

카를 4세 당시의 신성로마제국 영지 /위키피디아
카를 4세 당시의 신성로마제국 영지 /위키피디아

 

카를 4세는 보헤미아 왕이었다.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즉 아버지 요한이 보헤미아 공주 엘리자베트와 결혼해 보헤미아 왕이 되고, 그 지위를 아들 카를에게 물려 주었다.

교황청의 요청에 의해 대립왕이 된 카를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대다수의 제후들이 루트비히를 지지하고 잇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진영의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루트비히가 이듬해인 1347년 사망했다.

단독으로 독일왕이 된 카를 4세는 교황의 요구를 거의 모두 들어주었다. 교황청도 선선히 그에게 황제 지위를 부여했고, 1355년 황제 대관식을 열었다.

그는 프라하성에 머물면서 파리를 모델로 도시계획을 짰고, 카를 대교 건설의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프라하의 아름다운 도시 계획이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또 황제와 교황, 제후의 권한을 정하고 권력을 배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검토해 나갔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독일왕, 이탈리아왕, 부르고뉴왕, 보헤미아왕이었다.

 

금인칙서가 발표된 메츠 제국회의(1356. 1. 10.) /위키피디아
금인칙서가 발표된 메츠 제국회의(1356. 1. 10.) /위키피디아

 

그가 만든 현실적인 타협책이 1356110일 메츠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발표되었다. 이를 금인칙서라고 한다.

모두 31개 조항으로 된 금인칙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제후는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와 라인 궁중백작, 작센, 브란덴부르크, 보헤미아의 제후 등 모두 7명의 제후로 정한다.

선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며, 대관식은 아헨에서 한다.

선거는 과반수로 정한다. 선거 결과에 따르지 않는 선제후는 선제후 지위를 박탈당한다.

선거 결과는 교황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선제후는 제후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영지 내에서 재판권, 광산 채굴권, 관세 징수권, 화폐 주조권, 유대인 보호권을 갖는다.

선제후 영지는 분할을 금지하고 장자에게 상속한다.

선제후는 소환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선제후에 대한 반란은 대역죄로 처벌한다.

제후 사이의 동맹 또는 도시의 동맹은 금지한다.

선제후를 비롯해 제후들의 영지는 법으로 확정한다.

 

이 칙서에 제후들이 모두 환영했다. 칙서는 신성로마제국, 즉 독일의 국체를 확인한 것이다. 이 칙서 이후 신성로마제국에는 더 이상 두명의 국왕이 나타나는 일이 없었고, 교황청으로 가 대관식을 여는 일도 사라졌다.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가문의 영향력에 비해 선제후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카를 4세 /위키피디아
카를 4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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