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카이거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霸王別姬)는 1924년에서 1977년까지 50여년의 중국 역사를 경극(京劇) 주인공들의 삶을 관통하며 소화해 낸 걸작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초 패왕 항우가 유방의 한나라군에 포위되어 사면에서 초가가 울리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애첩 우희(우미인)는 춤을 추다 마지막에 항우의 칼로 스스로 목을 베어 죽는다. 2천년전의 이 스토리가 <패왕별희>라는 경극으로 만들어져 1920년대에 베이징 공연장을 사로잡았다.

 

 

영화는 1924년에서 출발한다. 3백년간 중국을 호령하던 청나라가 멸망하고 베이징에 위안스카이, 장쩌린 등의 군벌이 주도하는 북양(北洋) 정권이 들어선다. 나라는 망했지만 청나라 귀족들은 여전히 남은 부와 권력을 유지하며 예술을 즐긴다.

이 때 홍등가의 여인이 두지라는 아이를 경극학교에 맡긴다. 육손이었던 두지는 어머니에게서 손가락을 잘리는 고통을 받으며 경극학교에 들어가지만 다른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 이때 시투라는 형이 두지를 보살피면서 두 소년은 형제 이상으로 정을 나누고, 두지는 시투에게 동성애적 느낌을 갖게 된다. 학교를 탈출하고 가혹하게 두드려 맞는 등의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두지는 경극 <패왕별희>의 우희 역을 맡게 된다.

청나라 황실의 내시로 서태후를 모시고 경극을 관람했다는 장 내관이 경극단을 찾아온다. 장내관은 여장을 한 두지에게 꽃혀 집으로 데려가 동성애를 한다. 두지는 장내관의 강압에 당하지만 그의 희생으로 경극단은 무대에 오르게 된다. 여기서 우희역을 맡은 주인공은 첫 번째로 희생된다.

그 때 두지와 시투는 길거리에 버려졌던 아기를 데려와 극단 동료들과 함께 키운다.

 

장면이 바뀌어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한다. 북양정권을 이은 국민당 정부는 패주하고 일본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이름도 바뀐다. 두지는 청데이(장국영 역)로 패왕별희의 우희역을, 시투는 단샬로(장풍의 역)로 초패왕 항우 역을 맡아 중국에서 유명한 배우가 된다.

이 때 청나라 고위 관료출신인 원세경(袁世卿)이 등장한다. 원세경은 경극을 아는 인물인데, 장내관처럼 우희역을 맡은 청데이에게 필이 꽃힌다. 원세경은 극단에 값비싼 패물을 선물로 주면서 청데이와 단샬로를 집으로 초청하지만 단샬로는 기생집에 선약이 있다며 거절한다.

단샬로는 홍등가에서 유명한 매춘부 주샨(공리 역)을 만난다. 청데이는 단샬로와 주샨에게 질투를 느낀다. 주샨은 유흥가 생활을 청산하고 극단을 찾아 단샬로에게 청혼한다. 단샬로는 청혼을 받아들인다. 청데이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건달과 매춘부의 연극은 관심도 없고 배운 적도 없다”며 뛰쳐 나간다. 그는 배신감에 원세경을 찾아가고 원세경은 장내관이 보관하던 검을 주며 그를 유혹한다.

 

이번엔 경극단이 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한다. 공연후 단샬로는 일본군, 중국 괴뢰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일본군에 체포된다. 주샨은 청데이를 찾아와 단샬로를 구해달라고 한다. 청데이는 주샨에게 단샬로와 헤어지라고 한다. 그 조건으로 청데이는 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하고, 일본군은 단샬로를 풀어준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청데이가 적군 앞에서 공연한 것은 후에 큰 재앙으로 다가온다.

일본군 치하에서 단샬로와 주샨은 결혼하고, 주샨은 청데이와 결별하고 평범한 삶을 살자고 한다. 상실감에 빠진 청데이는 아편에 쪄들어 지낸다. 경극 공연은 중단되었다.

이 때 어렸을 때 경극을 가르쳤던 관 사부가 둘을 불러 매질을 하며 경극을 다시 하라고 한다. 하지만 관 사부는 급사하면서 경극학교는 문을 닫는다. 청데이와 단샬로가 어렸을 때 주워왔던 아기는 커서 갈 데가 없다며 함께 남는다. 이 아이는 샤오쓰라고 하는데,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스승들을 배신하는 역할을 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국민당 군대가 베이징을 수복했다. 청데이와 단샬로는 국민당 군대 앞에서 공연을 한다. 국민당 오합지졸들이 공연 도중에 손전등을 켜고 공연을 방해하자 단샬로는 “일본인들도 이러지 않았다”고 만류한다. 국민당 병사들은 일본을 두둔했다며 난투극을 별였다. 이 와중에 청데이는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고 주샨은 유산을 하게 된다.

국민당 정부는 청데이가 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한 사실을 걸어 재판에 회부했다. 단샬로는 원세경에게서 수모를 당하면서 청데이를 위해 증언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원세경은 법정에서 청데이가 일본군의 위압에 의해 공연을 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청데이는 “일본군 앞에서 위문공연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강제는 아니었으며 만약 나의 노래를 좋아했던 일본군의 아오키 사부로 대좌가 살아 있었다면 일본에도 경극이 퍼졌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죽여달라고 외친다.

이 위험천만한 순간에 헌병들이 들어와 재판장에게 뭔가 쪽지를 전달하고 청데이는 풀려난다. 베이징을 방문한 국민당 고위층이 공연을 보고 싶다 해서 청데이가 풀려난 것이다.

 

1949년 이번엔 공산당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났다. 두 주인공은 공산군 앞에서 무미건조한 공연을 한다.

청데이는 아편에 중독되었다. 단샬로는 청데이를 감금하다시피 하면서 아편을 끊게 했다. 원세경은 반혁명분자로 몰려 군중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마침내 사형을 당한다.

버려진 아이 샤오쓰는 청년이 되어 공산당 앞잡이가 된다. 청데이는 샤오쓰에게 체벌을 가하고, 샤오쓰는 돌변해 “다시는 당신에게 무릎 꿇는 일이 없을 거다”며 짐을 싸서 나가버린다.

공산당 치하에서 패왕별희가 다시 공연되었다. 청데이를 떠난 샤오쓰가 우희를 분장하고 분장실에 들어왔따. 두명의 우희가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단샬로는 샤오쓰의 편을 든다. 청데이는 홀로 남아 극장을 떠난다.

 

1966년 중국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난다. 단샬로와 주샨은 홍위병들에게 봉변당할 물건을 태워 버렸다.

문화대혁명의 칼끝은 경극단원들에게도 향했다. 샤오쓰는 단샬로를 심문하면서 청데이의 반혁명성을 고발하라고 한다.

경극단원들이 모두 분장을 한 채 군중들 앞에 끌려갔다. 홍위병은 단샬로를 때리면서 청데이를 비판하라고 한다. 단샬로는 “청데이가 일본군 앞에서도 공연했고 국민당 앞에서도 공연했고 깡패와 헌병들 앞에서도 공연했다”고 비난했다. 단샬로는 아내 주샨을 비판하라는 요구에 주샨을 가리키며 “저 여자는 기생집에서 제일 잘 나가는 매춘부였다”다고 폭로하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주샨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라고 말해 버린다. 단샬로는 한술 더 떠 ”이젠 우리는 남남“이라며 이혼을 선언한다.

패왕은 갔다.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도 팔고 동료도 팔았다. 청데이는 통곡을 하며 단샬로에게 “양심도 염치도 없는 놈”이라며 “단샬로, 넌 패왕을 버렸어”라고 말해버린다.

그날 주샨은 자살한다.

 

1977년 마오쩌둥이 죽고 강청 등 4인방도 체포되고 10년간에 걸친 문화혁명은 막을 내렸다. <패왕별희>가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청데이와 단샬로는 다시 공연 연습에 들어갔다. 우희로 분장한 청데이는 패왕에게 검을 뽑아 자결하는 장면을 연기하면서 진짜로 목숨을 끊는다. 단샬로는 청데이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다. 우희가 마침내 죽었다.

 

중국 문화대혁명은 1966년에 시작되어 1976년까지 10년에 걸쳐 전개됐다. 중국에선 ‘10년동란’(十年動亂)이라고도 한다. 광기의 시대였다. 대중이 얼마나 광기에 빠지고 사회와 나라를 혼란의 나락으로 추락시킬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10년 사이에 중국 전역에 걸쳐 3만4,800명이 사망하고, 72만9,511명이 박해받았다는 게 공식 통계다.

 

1989년 베이징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덩샤오핑이 무차별로 진압한다. 수백명이 죽었다.

1993년 천커이거 감독은 영화 <패왕별희>를 개봉했다.

2020년 코로나19로 영화제작이 중단되면서 영화 <패왕별희>가 국내에서 재공연되었다. 영화는 초패왕과 우희라는 2천여년전 소재를 20세기를 관통하는 중국 역사에 대입해 훌륭하게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