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⑨…합스부르크의 슬기로운 결혼작전
신성로마제국⑨…합스부르크의 슬기로운 결혼작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2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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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정략결혼으로 스페인 네덜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확보

 

결혼을 잘 하면 나라 하나가 왔다 갔다 했다. 중세 봉건시대 유럽의 얘기다.

봉건영주에겐 전쟁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 결혼과 자녀 생산이었다. 결혼은 귀족 가문 사이에 동맹을 형성하고 재산을 상속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자녀는 많이 낳으면 후계가 든든할 터인데 일부일처제의 엄격한 카톨릭 교리로 중혼(重婚)과 이혼이 불가능해 아이의 숫자가 제한되었다. 아들에게 상속하는 원칙 때문에 딸만 낳은 집안은 대가 끊어져 사위에게 귀족 타이틀과 영토가 넘어갔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흥에는 결혼이라는 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합스부르크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통해 16세기에 세계 최대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에 이어 아들 지기스문트(Sigismund)1433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지기스문트에겐 아들이 없었고, 딸 엘리자베트(Elizabeth)를 유력 가문인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에게 시집보냈다. 이로써 룩셈부르크 가문은 대가 끊어졌다.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는 룩셈부르크 집안이 차지했던 보헤미아와 헝가리왕이 된 후 독일왕에 취임했다. 알브레히트는 독일왕이 된지 1년만에 유복자 라디슬라스(Ladislas)만 남기고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알브레히트의 사촌인 프리드리히 3세가 독일왕이 되고, 황제 대관식을 가졌다.

프리드리히가 1493년에 죽고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1(Maximilian I)가 오스트리아 대공, 독일왕,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물려받았다.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는 조카 라디슬라스에게 넘어갔다.

 

막시밀리안은 교황에게 요청하지도 않고 스스로 대관식을 치러 황제에 올랐다. 이제 황제는 종교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교황의 손을 빌어 황제의 관을 받은 황제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마지막이었다.

막시밀리안이 교황의 힘을 빌리지 않은 것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에 한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신성로마제국이 이탈리아를 포기하자 1494년 곧바로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나폴리 원정에 나섰고, 그 뒤를 이은 루이 11세는 부르고뉴의 종주권을 요구하고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막시밀리안은 독일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내려갔지만 이탈리아 지배권은 확보하지 못하고, 다만 프랑스의 침략을 저지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1499년 슈바벤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연합군은 스위스 농민군에 패해 막시밀리안은 스위스 연방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아들 카를 5세 /위키피디아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아들 카를 5세 /위키피디아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가 성공한 것은 하나 있다. 바로 결혼 정책이다. 그는 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 대제국을 형성한다.

막시밀리안은 부르고뉴 대공의 딸 마리(Marie)와 결혼했다.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영토였지만 중세에 사실상 독립왕국이나 다름없었다. 부르고뉴는 프랑스에서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 제후들과 결혼했는데, 부르고뉴 대공 샤를은 딸을 차기 신성로마황제가 될 막시밀리안과 결혼시켰다.

마리는 현재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해당하는 지역을 물려받았는데, 1482년 막시밀리안과 사냥에 나갔다가 말에 떨어져 25세의 나이에 죽었다. 첫 번째 아내가 죽은후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막시밀리안의 영지가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마리와 사이에 아들 필리프과 딸 마르가레트를 낳았다.

 

그 무렵 스페인에서는 카스티야(Castilla)의 여왕 이사벨라와 아라곤(Aragon)의 왕 페르디난도가 결혼해 1479년 스페인 왕국을 세우고 이베리아 남부에 잔존해 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다. 곧이어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스페인은 신대륙 개척에 나서 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었다.

막시밀리안은 번창하고 있던 스페인에 주목했다. 그는 아들 필리프를 스페인 공주 후아나(Joanna)와 결혼시키고, 딸 마르가레트(Margaret)를 황태자 후안(Juan)과 결혼시켰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 왕가는 이중결혼을 통해 어느 한 가문에 후손이 단절되면 다른 가문이 상속을 하는 내용을 체결했다.

운명의 여신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손을 들어 주었다. 마르가레트와 후안의 결혼생활은 편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 후안은 결혼후 6개월만에 열병에 걸려 죽고, 마르가레트는 사산하고 말았다. 그녀는 벨기에로 되돌아왔다.

한편 필리프와 후아나는 카를과 페르디난트의 두 아들과 딸 넷을 낳았다. 하지만 후아나는 정신이상을 일으켰다.

 

1504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카스티유의 왕위를 후아나에게 이양하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남편인 페르디난도 왕은 자신이 카스티유의 섭정이 되겠다고 했지만 카스티유 귀족들은 페르디난도를 싫어해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필리프와 후아나는 1506년에 독일 용병을 이끌고 스페인에 도착했다. 필리프는 장인 페르디난도와 협상을 벌여 아내와 공동왕에 오르되 후아나가 지병이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자신이 카스티유의 왕권을 차지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필리프는 갑자기 열병을 앓으면서 그해 9월에 죽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카를은 6살이었다. 카를은 어머니 카스티유의 상속자로 인정받았다.

1516년 페르디난도 국왕이 죽으면서 아라곤의 상속권도 후아나에게 돌아갔다. 당시 아라곤은 스페인의 카탈류냐, 발렌시아는 물론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영지로 두고 있었다. 카를의 어머니 후아나는 스페인 전체와 이탈리아 남부를 영지로 물려받았고, 상속자로 아들 카를을 지명했다.

 

어머니 후아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영지에 대한 실질적 통치를 아들 카를에게 맡겼다. 카를은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태어나 부르고뉴에서 성장했다. 그는 스페인어를 몰랐다.

1516년 페르디난도 국왕이 죽고 어머니는 카를을 자신과 함께 공동왕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당시 연합왕국 체제로 카스티유, 아라곤, 나바르가 각기 독자적 왕국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카를은 각국에서 코르테스(Cortes)라는 귀족회의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1517년에 스페인에 도착한 카를은 먼저 카스티유 코르테스의 테스트를 받았다. 카스티유의 조건은 카를이 카스티유어를 배울 것, 외국인 즉 프랑스 또는 독일인을 고용하지 않을 것, 카스티유의 귀금속을 반출하지 않을 것, 어머니 후아나를 존중할 것등을 제시했고, 카를은 모든 조건을 수용했다.

이어 아라곤으로 가서 귀족들의 테스트를 받아 합격했고, 나바르에선 나바르 내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카를은 1516년부터 실질적으로 스페인을 통치했다. 스페인에서 그의 이름은 카를로스 1(Carlos I)였다. 하지만 그가 공식적으로 스페인 국왕이 된 것은 어머니 후아나가 죽은 후 인 1555년이었다.

 

1547년 합스부르크 영지 /위키피디아
1547년 합스부르크 영지 /위키피디아

 

결혼을 통한 합스부르크의 영토 확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페인 왕 카를은 포르투갈의 공주 이사벨라(Isabella)를 아내로 맞는다. 이 조치는 후에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합병하는 밑거름이 된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국왕을 겸하고 있는 손자이자 카를의 동생인 페르디난트를 헝가리와 보헤미아 국왕의 딸 안나에게 결혼시켰다. 또 손녀이자 카를의 여동생안 마리를 헝가리와 보헤미아 황태자 라요쉬 2(Lajos II)와 결혼시켰다. 이 이중결혼으로 보헤미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도 합스부르크의 영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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