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20만명 끌고간 소련 후예들은 왜 사과 않는가
고려인 20만명 끌고간 소련 후예들은 왜 사과 않는가
  • 아틀라스
  • 승인 2019.04.23 15: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탈린 시절에 카자흐, 우즈벡으로 끌려간 계봉우 황운정 선생 유해 봉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던 계봉우(1880.81959.7) 선생 부부 유해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황운정(1899.91989.12) 선생 부부 유해가 지난 22일 봉환돼 고국 땅에 안장됐다.

이날 계봉우 선생 부부는 서울 현충원에, 황운정 선생 부부는 대전 현충원에 각각 안장됐다. 계 선생은 카자흐스탄에 묻힌 지 6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고, 황 선생의 유해는 30년 만의 귀환이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추모사를 통해 조국 광복을 향한 험로를 걷다가 이역만리에서 숨을 거둔 지사님의 의로운 삶 앞에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바친다선열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깊이 새기고 계승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카자흐스탄에서 있었던 독립유공자 유해봉환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네 분을 모시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임무이며 독립운동을 완성하는 일이라며,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스탈린 치하에 이들에게 고통을 준 나라들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21일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국외안장 독립유공장 유해봉환식 /청와대
21일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국외안장 독립유공장 유해봉환식 /청와대

 

이역만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선조들을 고국의 땅에 봉환해 안장시킨 일에는 후손들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 두 분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 정부가 대한민국 건국 기점을 임시정부로 삼으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항일만 강조하고 스탈린 치하의 소련의 억압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공평함을 잃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계봉우(桂奉瑀) 선생은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간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역사학자, 한글학자로 유물론에 심취했다.

19205월 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을 맡았고, 독립신문에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글을 게재했다. 그해 10월부터 치타에 세워진 극동공화국(Far Eastern Republic) 극동부 한인부에서 활동했다.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모스크바 코민테른에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동휘계 상해파 공산당원으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파벌 싸움을 벌이다 체포되기도 했다.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이주당해 그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황운정(1899~1989)은 함경북도 온성군 빈농의 가정에서 출생해, 1919년 함북 종성과 온성에서 3·1운동에 참가한 후, 19203, 만주 왕청현 나대거우로 망명했다.

19203월부터 동년 7월까지는 왕청현과 동녕현에서 조선독립군 부대에 참여해여 일본 정규군과 맞서 싸웠으며, 19207월부터 192210월 일본군이 철수하기까지는 러시아 연해주 추풍 솔밭관에서, 솔밭관 독립군 부대에 가입하여 러시아 백파 및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했다.

1937년 강제이주 당한 후에는 카자흐스탄 가라칸다에 수용되었다. 193812월 복권된 그는 19602월까지 카자흐공화국 알마타의 경제 부문에서 일하다가 19891231일 서거했다.

 

그러면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정권이 1937년 연해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켰던 일도 짚어보아야 한다.

193710월 소련 극동지역에 거주하고 우리민족 20만명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등으로 강제이주되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은 러시아 극동 연해주에 많이 거주했다. 1920년년대 후반에는 17만명으로 늘어났고, 블라디보스톡 농촌인구의 4분의1 이상이 한인이었다.

 

강제 이주의 원인은 첫째, 극동지역의 한인 가운데 일본 첩자들이 있다는 소련당국의 판단이었다. 일본은 1932년 만주국 괴뢰정부를 수립해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옹립하자, 소련은 극동 연해주의 안보를 우려했다. 외모로 보아 고려인과 일본인이 유사하기 때문에 일본 첩자를 가려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극동의 전체 고려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켰다는 것이다. 스탈린의 전형적은 전제적 통치 방식이었다.

둘째는 극동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숫자가 불어 나면서 소련정부가 고려인들의 자치요구가 있을 경우를 사전에 차단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결국 1938년에 포시에트 군 공산당 지구당 제1서기였던 김 아파나시가 극동주를 소련에서 분리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획책한 혐의로 총살되었다.

셋째, 스탈린의 농업집단화 정책이 실패하고 1930년대초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등 소련 중부에 대기근이 발생해 농업인구가 줄어들었는에, 이를 고려인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강제이주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이용되었다.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한 극동의 역에서 출발해 노보시비리스크까지 갔고, 거기에서 남하해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내려갔다. 이동 기간은 대략 30~40일 소요되었다. 열차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한 편의 열차는 객차 50, 위생객차 1, 식당차 1량 등으로 구성되었고 대체로 화물 열차가 이용되었다. 이동 중에 노약자의 사망도 나타났고 그 인원은 수백명에 이르렀다. 부실한 식사와 불결한 위생상태, 식수 부족, 의료 지원의 부족 등 한 달여의 여정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이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집단으로 이주해 갔다.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담당자가 중앙 당국에 보고한 문서(1937125일자)에는 16,307가구, 74,500명의 이주 고려인이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해왔다.

그후에도 1940, 1845년에 고려인이주가 단행되었는데, 1953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이 비극은 끝났다.

 

우리는 2차 대전 이전의 일본 만행을 여전히 규탄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일본 정부와 기업에 배상을 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소련 정부에도 우리민족을 억압한데 대해 사과를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스탈린 치하의 소련 정부와 지금 러시아 정부가 다르다고 한다면, 지금 일본 정부와 과거 군국주의시대 일본 정부도 다르지 않은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지금 별도의 독립국이다. 하지만 당시 소련 치하에서 한마디도 못하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공화국이었다. 소련을 이어받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스탄 국가들도 한번은 사과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 강점기에 미쓰비시 중공업이 조선인을 강제징용했다는 이유로 그 회사의 손자회사에게까지 배상금을 물리면서 소련의 후예국가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 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