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⑩…합스부르크 전성기, 카를 5세
신성로마제국⑩…합스부르크 전성기, 카를 5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2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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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지배…종교 통합에 실패

 

카를 5(Karl V, 1500~1558)19세의 나이에 세계제국의 주인이 되었다. 그의 직함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왕, 독일왕, 이탈리아왕, 오스트리아 대공, 네덜란드 영주 등 20여가지였고, 제국에서는 카를 5, 스페인왕으로는 카를로스 1(Carlos I)로 호칭되었다.

카를은 유럽에선 70군데 이상의 영지를 소유한 군주였고, 신대륙에선 뉴스페인(멕시코)와 페루, 실론(스리랑카), 필리핀의 지배자였다. 그의 지배력이 미친 영역은 빅토리아여왕, 엘리자베스 1세 때의 대영제국 전성기에 버금간다. 그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한곳에 머물지 않고 스페인에서 독일로, 이탈리아로 동분서주하며 전쟁을 벌였다. 카를은 이슬람의 종주국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벌였고, 교황과 대치했으며, 독일내 신교도 제후들과 싸웠다.

 

최고의 자리는 역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할아버지 막시밀리언 1세가 1519년에 죽고, 스페인의 카스티유 왕이던 카를은 당연 제1의 황제 승계자였다. 그런데 프랑스왕 프랑수아 1(François I), 영국왕 헨리 8, 작센 공작 프리드리히가 경선에 뛰어들었다. 영국왕과 작센 공작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프랑수와는 끝까지 참여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7명의 선제후의 투표로 옹립되고, 대공위시대에 영국과 스페인 왕가에서 대립왕이 나오기도 했다. 전임 황제가 죽고 후임황제가 선출되는 궐위 기간에 황제 후보들은 투표권을 갖는 선제후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거나 후한 조건을 제시하는 게 관례였다.

한번도 황제라는 타이틀을 갖지 못했던 프랑스 국왕은 야심차게 도전했다. “왜 독일인만 황제가 되어야 하느냐는 게 프랑수아의 불만이었다. 프랑스왕은 넉넉한 재정을 바탕으로 선제후들을 구워 삶으려 했다.

프랑수아나 카를 모두 독일어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카를은 프랑스내 영지인 부르고뉴에서 태어나 자랐고 스페인으로 갔다. 카를의 입장에선 할아버지의 자리를 프랑스왕에게 내줄수 없었다. 하지만 카를은 카스티유 재정에서 돈을 꺼낼수 없었다. 당시 카스티유는 멕시코와 페루에서 엄청난 금과 은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카를은 카스티유 귀족회의에 국고에 쌓여 있는 귀금속을 반출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었다.

결국 카를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대상인 집안인 푸거(Fugger) 가에 손을 내밀었다. 푸거가는 오랫동안 합스부르크가의 돈줄이었다. 푸거 가문은 황제자리를 만들어 주는 대가로 합스부르크가의 사업을 독점하는 조건으로 카를에게 자금을 댔다. 카를은 푸거가의 자금만으로도 모자라 아우구스부르크의 또다른 금융가문 베르더 집안에서도 돈을 빌렸다.

반드시 돈 선거의 결과라고 할수 없지만 선제후 회의는 만장일치로 카를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했다. 7명의 독일 제후들은 양쪽 후보로부터 돈은 돈대로 받고 결국 동족의 피가 흐르는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1520년 카를은 할아버지처럼 교황의 도움이 없이 독일에서 황제 대관식을 가졌다.

 

1538년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의 니스 정전 회담후 악수를 나누는 그림. /위키피디아
1538년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의 니스 정전 회담후 악수를 나누는 그림. /위키피디아

 

선거에서 진후 프랑스 국왕은 사사건건 황제에 대항했다. 1521년 프랑수아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 영국의 헨리 8세 등과 연합해 프랑스군을 밀라노에서 퇴각시키고 1525년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에서 프랑수아를 포로로 붙잡았다.

프랑스왕은 부르고뉴와 나바르를 합스부르크에 내주고, 엄청난 몸값을 지급하고 풀려났다. 석방대금은 200만 크라운의 금화였는데, 첫 번째로 지급된 120만 크라운은 4개월간 세어야 할 정도의 액수였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군대가 이탈리아를 휘젖고 난후 이탈리아에서는 메디치 가문의 또다른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베네치아, 피렌체가 연합해 반황제파 코냑 동맹(League of Cognac)을 결성했다. 프랑스도 여기에 가담했다. 화가 난 카를 5세는 1527년 스페인군 6천명, 독일 용병 4천명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독일 용병에는 루터파 신봉자들이 많았다. 교황은 성 안젤로 성(Castel Sant'Angelo)으로 피신했다. 스페인군, 독일 용병, 이탈리아내 반교황군은 도시를 약탈했다. 교화와 수도원의 문은 부서지고 그 안의 성스러운 제물들은 내팽겨쳤다. 술취한 매춘부가 고급 제의를 어깨에 걸쳐 입었고, 수녀들의 운명은 주사위로 결정되었다. 라파엘로의 그림에 마르틴 루터의 이름이 새겨졌다. 보상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살해되었다. 첫날에만 8천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로마 포위 기간에 그동안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들어낸 상당수의 예술품들이 파괴되었다.

메디치 가문이 주도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이때 합스부르크의 로마 약탈로 끝났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교황 클레멘스는 카를 황제에게 항복했다. 카를은 40만 듀캇의 몸값을 받고 교황을 풀어주었다. 아무 곳에서도 지원군을 찾지 못한 클레멘스는 결국 카를과 타협했다. 1530년 클레멘스 7세는 카를의 머리 위해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독일에서 대관식을 한지 10년만에 카를은 교황의 손을 빌어 다시 황제의 관을 쓰게 된 것이다. 그는 교황에게서 황제의 관을 쓴 마지막 황제였다.

 

오스만 투르크가 동쪽에서 공격해 왔다. 1529년 오스만은 오스트리아 빈까지 쳐들어 왔으나 합스부르크는 방어에 성공했다. 이 때 프랑수아는 이슬람 공격에 공동방어를 해야 한다는 기독교계의 공론을 저버리고 카를에 반대하기 위해 오스만의 슐레이만 술탄과 손을 잡았다. 카를은 이에 대항해 또다른 이슬람국가 페르시아와 동맹을 구성하기도 했다.

 

카를 5세와 황후 이사벨라 /위키피디아
카를 5세와 황후 이사벨라 /위키피디아

 

카를은 이슬람의 종주국 오스만의 침략을 격퇴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발 아래 눌렀지만 독일 내부의 반란에는 골머리를 앓았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에 대한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내걸면서 독일에 종교개혁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황제가 된 직후인 1521년 카를은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를 이단으로 판결하고 제국에서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곧이어 제국 기사들이 봉기하고 종교의 외피를 쓴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황제에 가장 반발한 제후는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와 헤센의 필리프 백작이었다. 두 제후는 1531년 독일 중부 슈말칼덴(Schmalkalden)에서 신교도 제후들을 모아 군사동맹을 맺고 황제와 구교도 제후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슈말칼덴 동맹에 배신자가 나왔다.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사촌동생이자 필리프 백작의 사위인 모리츠였다. 카를은 프리드리히와 필리프를 제국에서 추방할 것을 명령하고 프리드리히가 갖고 있던 선제후 자리를 모리츠에게 주었다. 구교도 황제군과 신교도 제후군대의 전쟁은 1547년 뮈흘베르크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Mühlberg)에서 황제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모리츠가 다시 배신했다. 모리츠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를 끌어들여 반합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고 카를 5세에게 칼을 겨눴다.

카를은 인스부르크로 도망치면서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전권을 주었다. 모리츠와 페르디난트는 1552년 파사우(Passau)에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제후가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파사우 협정은 3년후 15559월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공인되면서 독일에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는 동생 페르디난트가 참석해 형 카를의 이름으로 서명했지만, 카를은 끝내 종교의 통합을 고집하며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페인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영지 /위키피디아
스페인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영지 /위키피디아

 

종교 통합에 실패한 카를 5세는 신심이 피로해져 기력을 잃고 만다. 30여년간 황제 자리에서 온갖 전쟁을 치르다가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15561025일 카를은 브뤼셀 회의장에서 퇴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퇴위와 함께 스페인 왕은 아들 필리페에게 주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넘겼다. 이로써 합스부르크의 넓은 영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 합스부르크로 분리되었다.

카를은 퇴위한 후 스페인으로 돌아가 한적한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5589월 말라리아에에 걸려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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