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해체①…황제는 허울, 독립국 3백개
신성로마제국 해체①…황제는 허울, 독립국 3백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2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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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제국의 해체, 합스부르크 영향력 상실

 

1618523, 프라하의 라트신 궁전에 성난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보헤미아왕의 명을 들고 온 사신 두 명을 붙잡아 창문 아래로 던져버렸다. 잠시후 사신의 수행원들도 던져졌다. 높이 17m나 되는 성의 탑에서 떨어졌지만 던져진 사람들은 간신히 살아나 보헤미아왕 페르디난트 2(Ferdinand II)에게 사실을 보고했다.

페르디난트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신성로마제국 마티아스(Matthias) 황제의 사촌동생이었다. 그는 카톨릭에 맹종하는 사람으로 신교도가 많은 보헤미아에 카톨릭으로 개종하라고 압박했고, 신교도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면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보헤미아의 신교도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칼뱅파 귀족 프리드리히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하고 카톨릭을 고수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했다.

 

1618년 프라하에서 신교도들이 카톨릭 위원을 창으로 던지는 모습 /위키피디아
1618년 프라하에서 신교도들이 카톨릭 위원을 창으로 던지는 모습 /위키피디아

 

페르디난트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곧바로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제압할 군사력이 부족했다. 이듬해 마티아스가 아들이 없이 죽자 페르디난드가 황제가 되었다.

페르디난트는 합스부르크의 가문이 지배하는 스페인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스페인 국왕 필리페 3세는 즉각 병력을 파견했다. 이에 독일내 신교도 제후들은 신교도 동맹(Protestant Union)을 구성하고 황제군과 스페인군과 전쟁을 벌였다. 이로써 30년 전쟁이 시작된다.

 

30년 전쟁(1618~1648)은 신성로마제국 제후들 사이의 내전이자 종교전쟁이었다. 아울러 구교 합스부르크측에 스페인, 헝가리가 가담하고, 신교 반합스부르크측에 덴마크, 사보이공국,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이 참전한 국제전의 성격을 띠었다. 처음엔 종교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후반부엔 독일 제후와 이웃 국가가 영토 확보를 위한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30년 전쟁의 참상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30년 전쟁의 참상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전쟁은 참혹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끼리 파벌이 다르다고 무참하게 죽였다. 신교 마을은 구교 마을과 싸웠다. 농토가 짓이겨 지고 마을이 불태워 졌다. 카톨릭 사제들은 신교도 여성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켰다. 전쟁이 일어난 곳엔 전염병이 돌았다. 혹심한 페스크가 퍼져 시체들이 길거리에 버려졌다. 전투에서 죽거나 아사하거나 페스트로 죽은 사람을 합치면 1백명도 되었다고 한다. 굶주리다 못해 인육을 먹었다는 보고도 많았다.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 않았다. 독일은 초토화되었다. 독일 인구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심한 곳에는 3분의2가 줄었다. 전쟁에 참여한 나라, 제후들은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바람에 파산했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제후들은 세금을 무지막지하게 걷었다. 처음에는 합스부르크가 이끄는 카톨릭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신교도 외국군이 개입하면서 승자가 없었다. 모든 기력을 소진한 후에 평화 협상이 벌어졌다.

 

30년 전쟁 기간의 인구 축소 비율 /위키피디아
30년 전쟁 기간의 인구 축소 비율 /위키피디아

 

30년 전쟁은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의 하나로 기록된다. 전쟁 참가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참전해 같은 신을 믿는 사람을 죽였다.

전쟁의 유발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였다. 그는 황제가 되면서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합의(1555)를 무시하고, 제국 내에 종교를 카톨릭으로 통일시키려 했다. 프로테스탄트와 칼빈파는 반발했고 외국군이 개입했다.

 

프로테스탄트 동맹 지역 /위키피디아
프로테스탄트 동맹 지역 /위키피디아

 

이 전쟁은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1(16181620)

프라하에서 신교도들이 카톨릭 사절을 창문으로 내던진 사건이 전쟁 발발 기일로 본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보헤미아 왕으로 옹립했으나 페르디난트 2세는 그의 선제후 자리를 박탈하고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에게 그 자리를 주었다. 황제가 선제후의 지위를 박탈하고 교체하는 것은 금인칙서의 위반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독재를 하며 마음대로 200명의 귀족 작위를 내려 황제파로 만들었다.

스페인군의 참전으로 신교도의 우두머리 프리드리히가 패배해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황제는 보헤미아를 되찾았다.

 

2(16251629)

독일 북부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가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군비 지원을 얻어 신교도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1625년 독일 북부를 침공했다. 하지만 덴마크는 합스부르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황제군은 프로테스탄트의 성지라고 할수 있는 독일 북부도 장악했다. 기세가 오른 페르디난트는 신교 교회의 모든 영지를 박탈하고 카톨릭 교회에 넘겨준다는 회복령을 내렸다.

 

3(16301635)

1630년 스웨덴왕 구스타브 2세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독일을 침입했다. 스웨덴군은 초반에 황제군을 격파했으나 632년 뤼첸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가 전사하면서 기력을 잃었다. 스웨덴군은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1635년 황제와 신교도측인 작센 선제후 사이에 프라하 평화조약을 맺었다.

 

4(16351648)

이번엔 프랑스가 독일에 출병하고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다. 스웨덴도 다시 신교도측에 가담했다. 그러나 어느쪽도 이기지 못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에 16372월에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했다. 아들 페르디난트 3세가 황제가 되어 아버지의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1641년 종전이 제의되었고, 1644년부터 강화회의가 시작되어 4년간 끌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을 체결하면서 30년간의 기나긴 전쟁이 막을 내렸다.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은 최초의 국제조약으로 기록된다. 협상을 하는데 4년이 걸렸다. 협상은 베스트팔렌주의 오스나브뤼크와 뮌스터 두곳에서 열렸다. 각국에서 파견한 109명의 대표단이 회의장에 왔다가 다시 국왕이나 영주의 지시를 받기 위해 되돌아갔다. 서명도 한 날짜에 이뤄지지 않았다. 4개월에 걸쳐 대표단이 개벌적으로 서명했다. 유럽의 16개국, 신성로마제국의 66개 제후국, 140개 자유시, 27개의 이익집단이 서명했다.

 

1648년 5월 독일 뮌스터에서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모습 /위키피디아
1648년 5월 독일 뮌스터에서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모습 /위키피디아

 

베스트팔렌 조약의 골자는 신성로마제국의 사실상 해체였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합의가 다시 승인되었고, 당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던 칼뱅파에게도 루터파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독일의 제후와 제국도시들에 '황제와 제국을 적대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으로 상호간 또는 외국과 동맹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제후국과 도시가 독립국으로서 영토 주권과 외교권, 조약 체결권을 갖게 된 것이다. 선제후는 황제 선출권 이외의 모든 특권이 박탈되었다. 동맹권, 외교권이 있다는 것은 교전권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실상 신성로마제국은 크고 작은 300개의 소국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가장 작은 나라는 주민 12명에 유태인 1명인 곳도 있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가 독립국 지위를 승인받았다. 프랑스가 알사스와 메스, 투르, 와 자스 대부분과 메스, 투르, 베르덩 주교령을 얻어 라인강 유역까지 국경을 넓혔다. 스웨덴은 서포메른과 브레멘대주교령, 페르덴주교령 등의 영토를 얻어 발트해와 북해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프랑스는 확보한 당을 자국령에 편입시켰으나, 스웨덴은 제국내 영주로서의 지위로 참여했다.

브란덴부르크가 동포메른, 마크데부르크 대주교령, 덴주교령 등의 영유를 인정받아 새로운 강자로 부상해 후에 프로이센으로 등장할 토대를 갖추게 된다.

신교도 교화와 제후 영지를 몰수한 회복령 조치는 폐지되었고, 제국의 문제에 교황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30년 전쟁은 마지막 종교전쟁이었으며, 베스트팔렌 조약은 마지막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조약이었다. 아울러 신성로마제국은 형식만 남고 사실상 해체되었고, 합스부르크는 제국내에서 오스트리아 영지 이외에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분리된 영지 /위키피디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분리된 영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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