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해체②…합스부르크, 대가 끊기다
신성로마제국 해체②…합스부르크, 대가 끊기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2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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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 공격 방어…가문 단절로 스페인-오스트리아 계승전쟁 야기

 

30년 전쟁(1618~1648)을 통해 유럽을 제패하려는 합스부르크의 시도는 실패로 귀결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에서 네덜란드가 떨어져 나가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선 스위스가 독립했다. 하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헝가리를 지배했고, 스페인은 벨기에와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멕시코와 남미, 필리핀을 영유한 강대국이었다. 또 합스부르크는 명맥만 남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이어나갔다.

 

1683년 오스만 투르크군이 빈을 포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683년 오스만 투르크군이 빈을 포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683714일 오스만투르크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에 도달해 빈 성채를 포위했다. 오스만 군은 충분한 물자를 준비하고 장기전을 펼칠 태세였다. 오스트리아는 30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 있었다. 빈의 주둔군은 11천여명, 자원병 5천여명으로 절대적으로 병력이 모자랐다.

오스만은 빈을 포위해 군대와 시민들을 굶겨죽일 작정이었다. 오스만의 총사령관 카라 무스타파 파샤(Kara Mustafa Pasha)는 빈을 고스란히 넘겨받으려 했다. 오스만은 절대 우위의 병력으로 포위 공격을 통해 오스트리아 군대를 피로하게 하고, 스스로 항복하게 만든다는 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이교도 노예병인 예니체리를 전방에 내세웠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레오폴트 1(Leopold I)은 로마 교황청과 카톨릭 국가에 메시지를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카톨릭 진영에서는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빈마저 이슬람에 함락되면, 그다음 중유럽, 서유럽이 이슬람에 짓밟힐 것을 우려했다. 교황청이 자금을 대겠다고 나왔고, 신성로마제국의 영주들,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지원에 응했다. 이때 프랑스 루이 14세는 합스브루크가 위기에 처한 틈을 타서 알사스-로렌을 빼앗을 생각에 참전을 거절했다.

빈의 수비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두달간의 포위 공격에도 오스트리아 군은 버텨냈다. 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지원군을 기다리며 소수 병력으로 저항하면서 저항군의 사기가 떨어져 갔다. 빈 시민들은 물자난으로 인해 극심한 고생을 했다.

9월초 드디어 구원부대가 빈 근처에 도착했다. 오스만군도 그 소식을 듣고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빈을 함락하기 위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요새 벽이 무너져 12m의 틈이 생겼고 오스만군은 이를 통해 요새 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어군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98일 오스만군은 빈 시내 일각을 점령했다.

 

폴란드 국왕 소비에스키가 레오폴트 1세를 만나고 있다. /위키피디아
폴란드 국왕 소비에스키가 레오폴트 1세를 만나고 있다. /위키피디아

 

96일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John III Sobieski)가 이끄는 군대가 다뉴브강을 건넜다. 소비에스키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카톨릭의 신성 연맹(Holy League) 군대는 빈을 포위하고 있던 오스만군을 후방에서 공격했다.

912, 총사령관을 맡은 폴란드왕 소비에스키의 기병대가 오스트리아 수도 빈 외곽을 두달째 포위하던 오스만 투르크 군을 공격했다. 카톨릭 연합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대, 작센, 바이에른, 바덴, 스바비아의 독일군, 우크라이나의 코사크 기병대가 참가했다.

새벽 4시에 시작된 이날 전투는 해가 저물도록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막상막하였지만, 오후가 되면서 조금씩 오스만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오후 6시 소비에스키는 기병대에 무스타파의 본영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오스만군은 마침내 퇴각했다. 소비에스키 왕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말을 회상하며,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정복했노라”(Veni, vidi, Deus vicit)고 선언했다. 빈 전투는 300년에 걸친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전쟁의 정점을 기록했다. 합스부르크는 여전히 유럽의 맹주임을 보여준 전투였다.

 

1700년 스페인 계승전쟁 직전의 국제형세 /위키피디아
1700년 스페인 계승전쟁 직전의 국제형세 /위키피디아

 

하지만 아무리 위세 등등한 가문이라도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대가 끊어진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 갈라진 합스부르크 가문에 위기가 닥친다. 아들이 없이 왕이나 황제가 죽어 후계 분쟁이 일어난다. 워낙 유럽을 제패하던 가문이다보니 후계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먼저 스페인 합스부르크게서 단절이 생겼다. 스페인왕 카를로스 2(Carlos II)는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고, 후사가 없었다. 그에게는 여러 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하나는 프랑스국왕 루이 14세에게, 다른 누나는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플트 1세에게 시집갔다.

카를로스 2세는 1700년 임종을 앞두고 스페인 왕위를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페 5(Felipe V)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스페인의 왕위가 합스부르크에서 프랑스의 부르봉왕조로 넘어갔다. 프랑스는 쾌재를 불렀다. 부르봉 왕조의 지배권이 프랑스에서 스페인, 이탈리아로 확대되는 대제국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이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스페인왕은 합스부르크가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편에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합세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이 쇠퇴하고 프랑스가 유럽의 패자였고,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 불리며 절대군주로 위세를 날렸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황제 레오폴트는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병사 8천명을 제공하는 댓가로 프로이센 왕을 칭할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의했다. 프리드리히는 이를 받아들였다.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와 동프로이센을 합쳐 왕국이 되었고, 프리드리히 1세가 초대 국왕에 올랐다.

스페인 계승전쟁(17011714)은 오스트리아-영국-네덜란드가 동맹이 되었고, 독일 내에서는 바이에른과 쾰른대주교가 프랑스 편에 서서 전개되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스페인 왕위를 레오폴드 1세의 아들 카를 6세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런데 전쟁 중에 레오폴드가 죽고 장남 요제프가 황제에 올랐으나, 요제프도 오래 살지 못하고 급사했다. 그 바람에 그의 동생인 카를 6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스페인왕을 겸임하게 된다.

이번엔 영국과 네덜란드가 거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이 탄생할 것을 두려워 반대했다. 카를 6세가 스페인 왕이 된다면 오스트리아,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 통일되고, 이는 유럽에 새로운 위협이 될 게 분명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다시 원래대로 부르봉 왕조의 필리페 5세를 스페인 왕에 되는 것을 인정했다. 대신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통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고, 프랑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슐레지엔의 위치 /위키피디아
슐레지엔의 위치 /위키피디아

 

이번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 혈통이 단절되었다. 카를 6세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두었다. 카를은 생전에 여자에게도 왕위를 계승할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었지만 독일의 다른 제후들은 그 법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카를은 형 요세프가 아들이 없이 딸만 두고 죽자 가문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 받아놓고, 어제와서 자신의 딸에게 상속권을 인정하려 한 것이다. 다른 제후와 이웃 국가의 입장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가 끊어 지면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의 영지는 물론 신성로마제국 제위까지 넘볼수 있는 기회가 된다.

강력한 제후국인 바이에른과 작센이 카를의 상속법 개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Schlesien)을 넘겨주면 카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의 상속을 인정해주겠다고 몰래 제의했다.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했다. 드디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이권을 놓고 제후간, 국가간 전쟁이 벌어졌으니,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1748)이다.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내 작센과 바이에른이 일제히 오스트리아를 덥쳤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가에서 바이에른 선제후인 카를 7세에게로 넘어갔다. 프로이센은 합스브르크 영지였던 슐레지엔을 차지했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1745년 카를 7세가 죽자 남편인 로렌가의 프란츠 1(Franz I)를 황제로 선출되도록 백망으로 뛰었고, 마침내 성공했다. 이어 황제는 요세프 2, 레오폴트 2, 프란츠 2세로 이어지는데, 이 가문은 합스부르크-로렌(Habsburg-Lorraine) 가문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리아 테레지아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리아 테레지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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