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 예국②…예왕지인(濊王之印)
사라진 고대왕국 예국②…예왕지인(濊王之印)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4.2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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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평양에서 발견된 두 옥새에서 중국 晉 왕조의 한반도 통치방식 이해

 

서울용산구한남동 소재 리움미술관에 가로 세로 2cm가 조금 넘는 고대 인장이 하나 있다. 작고 네모난 인장에는 진솔선예백장동인(晋率譱濊伯長銅印)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고, 꼭지엔 형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동물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다. 황동으로 만들어졌다.

보물 제560호로 지정된 이 인장은 중국에서 위촉오 삼국시대가 끝나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3~4세기에 중국황제가 한반도 동해안 일대 부족장에게 수여한 관인(官印)이며, 부족장에게는 옥새(玉璽)에 해당한다.

이 인장은 1958년 북한이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무덤에서 발견한 인장과 거의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크기도 비슷하다. 평양의 인장에는 부조예군(夫租薉君)’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도장은 은으로 만들어졌고, 한사군을 설치해 고조선을 점령한 한()나라가 한반도 동해안 북부 지역의 옥저(夫租=沃沮)의 부족장에게 하사한 인장으로 파악되고 있다. (부조예군 인장에 대해선 옥저편에서 다시 살펴본다.)

리움미술관의 인장과 평양에서 발견된 인장에 새겨진 한자는 <><>의 차이는 있지만, 음이 같아 동일한 부족, 즉 예국(濊國)를 의미한다.

 

서울 용산 리움박물관에 보관된 청동 진솔선예백장 인장 /문화재청
서울 용산 리움박물관에 보관된 청동 진솔선예백장 인장 /문화재청

 

두 개의 예인(濊印)이 비슷한 시기에 2000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발견된 것은 우연의 일이다. 하지만 수천년 동안 땅속에 매장된 보물을 건져냄으로써 사라지고 잊혀진 우리 역사의 비밀을 캐내는 것은 유물, 유적이 제공하는 타임캡슐 효과일 것이다.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보관되고 있는 두 인장을 타임머신으로 삼아 고대 한반도 동해안을 지배했던 예국으로 가보자.

서울 리움박물관의 예인(濊印)1966년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흥곡리에서 발견돼 지금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개인소장품으로 돼 있다. 그러면 중국 황제가 수여한 옥새가 어떤 연유로 포항에서 발견돼 이건희 회장에게로 넘어갔을까.

포항에서 출토된 예인(濊印)은 한 농부가 외양간 정지작업을 하던중에 파란색 유리옥 10여점과 함께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밭을 갈다가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포항 흥곡리 일대에는 수십기의 고분이 분포해 있는데, 대부분 도굴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이 보물이 어떤 경로를 거쳐 서울로 올라왔는지 모르지만, 한 엿장수가 중구 을지로 근처의 고대유물 수장가 김동현씨에게 들고 왔고, 김씨가 출타중이어서 그의 부인이 50만원을 주고 샀다는 증언이 전해지고 있다. 이 동인(銅印)은 곧바로 비상한 관심을 끌어 고고학계의 인정을 받고 일본에도 소개돼 국제적으로 사료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이 인장은 다른 국보급 문화재와 함께 1982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양도돼 지금 이건희 회장 소유로 리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리움박물관에 보관된 청동 진솔선예백장 바닥면/문화재청
리움박물관에 보관된 청동 진솔선예백장 바닥면/문화재청

 

궁금증은 예국의 중심이 강릉으로 알려져 있는데, 왜 예인(濊印)이 포항에서 발견됐는지 하는 점이다.

두가지 가정을 세워볼수 있다.

첫째, 예국의 범위가 함경도 북청군에서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경상도 포항 해안까지 이르렀고, 포항의 한 예족 부족장에게 진()황제가 옥새를 주었을 가능성.

둘째, 삼국사기 파사이사금조에 실린 실직국-음집벌국 간 영토분쟁의 기사에서 보듯, 예족의 일원인 실직국이 포항 일대의 해상운영권을 행사했고, 실직국이 멸망한 후에도 포항 영일만 일대가 예족의 실질적 지배가 계속됐을 가능성.

하지만 위의 두 가설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사마염이 위()나라를 멸하고 촉, 오를 제압해 세운 진() 왕조는 서기 265316년 사이를 유지한다. 이 인장의 제작 시기를 3세기 중엽~ 4세기초로 잡는 것은 진()왕조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진솔선(晋率譱)이라는 글자를 근거로 한다.

그런데, 파사임금이 실직국을 멸한 시기는 2세기초(104). 신라가 삼척의 실직국을 멸하고 현지인을 남쪽으로 옮긴 후에 경북 포항에 예족의 근거를 남겨두었을 리 없다. 150~200년의 시간적 공백이 발생한다. 실직국 멸망후 신라가 강릉 지역으로 후퇴한 예족을 공격해 부족장을 잡아왔고, 그 부족장이 포항 일대에 억류돼 있다가 사망한 것일까. 더 이상 상상력을 발휘하지 말고,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두기로 한다.

분명한 사실은 실직국이 멸망한 후에도 실직국의 북쪽에 예국이 생명력을 유지했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 인장이 후대에 포항에서 발견된 것이다.

 

예인(濊印)이 많이 발견되고, 예왕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중국의 통치 방식을 설명한다. ()과 이어 중원을 장악한 위(,) ()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낙랑군을 통해 주변 종족을 간접 지배하는 방식으로, 인수(印綬:끈이 달린 도장)와 동경(銅鏡:구리거울) 등 권위를 세워주는 보물, 즉 위신재(威信財)를 수여함으로써 토착지배자들의 마음을 샀다. 그러다가 반란이 일어나면, 낙랑이 병력을 내어 공격을 단행함으로써 지배를 굳혔다. 낙랑군이 중원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북부에서 4백년 이상 유지했던 비밀이 바로 예인(濊印)에 있었다. 낙랑은 한반도에 산재한 동이족들에게 자치권을 주되 복속을 의미하는 예인을 수여함으로써 유화정책을 썼고, 이를 통해 오랫동안 통치할수 있었다.

낙랑군이 토착 부족장의 관직을 솔선(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의 순서로 차등을 두었는데, 리움미술관의 인장은 상당히 고위 관직을 수여받은 부족장의 것이었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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