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타이지, 천연두에 걸려 서둘러 병자호란 끝냈다
홍타이지, 천연두에 걸려 서둘러 병자호란 끝냈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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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범진 교수 “1637년 1월 16일 걸렸을 가능성”…이후 청측 태도, 돌변

 

병지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홍타이지가 당시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던 천연두에 걸려 황급하게 귀국했다는 주장이 서울대 구범진 교수(동양사학과)의 논문 병자호란과 천연두’(2016, ‘민족문화’ 72)에서 제기된 바 있다. 그의 지론은 코로나19가 확산된 요즘에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구범진 교수의 논문을 읽다가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논문을 완성하고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에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눈에 띠었다. 논문은 조선을 침공한 청군 내부에 천연두가 걸렸을 가능성을 여러 사료를 통해 제시했는데, 결정적으로 홍타이지가 천연두에 걸렸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했다. 구 교수는 논문 심사를 마치고 수정원고를 넘긴 뒤에 당시 홍타이지가 천연두에 쫓기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사료를 발견했다. 귀국한 후 163775일에 홍타이지는 압록강 앞 가도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는 왕공들에게 법을 어기고 있음(失律)을 책망하면서 자신에 조선에서 귀국한 것을 지칭하며 천연두를 피해 먼저 귀국한 것”(避痘先歸)이라고 말했다. 구 교수는 인쇄를 목전에 앞둔 까닭에 본문은 뜯어고치지 못하고 마지막 167번 각주에 이 사실을 부기해 두었다.

 

남한산성 /문화재청
남한산성 /문화재청

 

만주인들은 천연두(天然痘)마마라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연두를 마마라 부르는 것은 청나라의 영향인 듯하다. 천연두는 겨울과 봄에 감염속도가 빠르다.

구범진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는 마마에 걸린 적이 없는 생신(生身)이었다. 생신은 천연두에 걸리면 치사 확률이 높았다. 청 황실에서는 16316월 다이샨의 다섯째 아들 발라마가 천연두로 사망했고, 1639에는 다이샨의 장남 요토와 여섯째 아들 마잔이 화북 원정 도중 천연두로 사망해 청 황실에서는 황제가 천연두에 걸릴 가능성을 늘 경계했다.

홍타이지는 천연두 감염을 피하기(避痘) 위해 형 망굴타이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또 천연두가 창궐할 때에는 부족장들이 방문하는 자리를 피해 대신들을 내보내거나 연회에도 참석치 않는 경우가 있었다. 원정을 논의를 하는 자리에서도 대신들은 마마가 걱정스러워 황제가 친히 가더라도 오래 머물수 없다며 홍타이지의 친정을 걱정하는 표현이 중국 사료에 나온다.

 

구범진 교수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과 청군 진영이 천연두에 노출되어 있음을 사료로 입증했다. 병자호란 기간이 163612월부터 이듬해 1월말까지 가장 추운 겨울이었으므로, 천연두 유생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계절이었다.

조선에서는 병자년(1636)에 서울에 마마가 창궐하고 있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마마가 창궐해 지방에서 올라온 군사와 유생 중에 환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병자호란을 기록한 남한일기(南漢日記)에도 병자년 1112월에 천연두를 앓는 환자를 문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청군 진영에서도 천연두 감염의 기록이 있다. 청실록에 보면 병자호란 직전인 16376월에 압록강 가도 전투에 투입한 청나라 병사들 사이에 천연두가 돌아 군령을 위반하고 귀환하는 자가 속출했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삼전도비 /문화재청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삼전도비 /문화재청

 

어쨌든 홍타이지의 지시로 청군 선봉대는 1636128일 앞록강은 도하해 이듬해(정축년) 130일까지 53일간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청군 선봉부대는 병자년 1214일 서울 근교에 도달했고, 강화도로 도망치려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홍타이지는 병자년 1229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구범진 교수는 홍타이지가 적어도 2월말까지 서울에 머물러 있을 계획이었는데 서둘러 1월말에 떠났다면서 그 이유로 천연두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구 교수는 홍타이지가 천연두에 걸렸을 날짜를 117일 이전으로 짐작했다.

구 교수가 홍타이지의 감염일을 117일 경으로 보는 것은 그 이전과 그 이후 청측의 입장이 돌변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홍타이지가 서울에 도착한 이후 조선은 대표단을 보내 세시 선물을 주었지만 쌀쌀맞게 거절했다. 조선 협상팀은 상서를 보냈으나 1월 상순엔 청측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 열흘동안 아무런 접촉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 무렵 청군은 지방에서 올라온 조선의 근왕병들을 격파하고 남한산성의 포위망을 좁히고 외부와의 접촉을 완벽하게 끊어 놓았다.

정축년 조선정부는 111일 두 번째 국서를 보냈지만 청측은 접수만 하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116일 조선은 사신을 보냈지만 청측은 “7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홍이포 28문을 싣고 왔다느니 하면서 협박을 했다.

 

하지만 청측은 117일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꾸어 조선과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섰다. 구범진 교수는 청측의 태도 돌변이 홍타이지의 마마 감염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승정원일기에는 당일의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인조: 호인(胡人)이 와서 사신을 불렀다 들었는데, 무슨 의도인가.

홍서봉: 어제는 느긋느긋한 마음을 극도로 보이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와서 사신을 부르니, 필시 저들에게 급한 일이 었어서 그럴 것입니다.

 

이후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18일에는 청측이 먼저 사람을 먼저 보내 접촉을 제안함과 동시에 무력으로 강하게 압박했다. 청측은 협상을 통해 항복을 받든지, 공성전으로 남한산성을 함락시키든지를 서둘렀다.

이후의 전개 스토리는 우리나라 사료에 충분히 나온다. 구범진 교수는 117일 이후 청측은 출성(出城)과 결전(決戰)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면서 서둘러 전쟁을 끝내려 했다고 설명했다.

청군이 전쟁을 서두른 것은 강화도 공격을 앞당긴데서도 보여진다. 구 교수에 따르면 청군의 강화도 공격은 원래 2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122일로 앞당겨졌다는 것이다. 123일부터 심야에 남한산성을 향해 홍이포를 쏘아댔다. 주전파와 주화파가 싸우면서 항복이 늦어지는 것을 앞당기기 위한 강경책이었다는 게 구범진 교수의 분석이다.

 

석촌동 삼전도비의 부조 /김현민
석촌동 삼전도비의 부조 /김현민

 

구범진 교수는 병자호란 기간에 홍타이지가 천연두에 감염된 날을 1637116일로 보고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라고 했다. 홍타이지의 감염으로 청군은 전쟁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았고, 117일부터 전략을 대폭 수정했다는 것이다. 멀리까지 원정온 이상 빈 손으로 돌아갈수 없고, 이때부터 서둘러 조선을 회유하거나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선은 119일부터 국서에 조선 국왕을 청 황제의 신하로 칭하는(稱臣) 표현을 썼고, 마침내 1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었다.

홍타이지는 당초 원정 오기 전에 한양 궁궐에서 조선왕과 함께 승전식을 올릴 계획도 세웠으나 모든 것을 생략하고 서둘러 돌아갔다. 마마가 도는 한양 도성에 들어가기 싫었던 것이다. 22일 홍타이지는 서둘러 귀로에 올랐다. 심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선의 관원들이 영접에 나왔지만 홍타이지는 그들과 근거리 접촉을 피했다. 221일 홍타이지는 심양에 돌아왔고 곧이어 도르곤이 소현세자 등 조선의 인질을 데려왔지만 소현세자와의 만남을 한달간 미루었다.

홍타이지는 서둘러 귀국한 이유에 대해 왕공들에게 피두선귀’(避痘先歸: 마마를 피해 먼저 귀국했다)라고 털어 놓았다. (청실록 숭덕 275일 신미)

 

홍타이지 /위키피디아
홍타이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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