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모건①…창업자 피바디, 런던서 금융사업 열다
JP모건①…창업자 피바디, 런던서 금융사업 열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2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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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진출한 미국 은행, 주정부 채권 중개…주니어스 모건에 양도

 

뉴욕 금융중심지 월스트리트 23번지에 무뚝뚝하게 서 있는 석조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20세기 미국 금융계를 휘어잡던 J.P.모건(J.P. Morgan & Co.)의 본사건물이다. 스트리트와 애비뉴가 교차하는 구석에 있다고 해서 더 코너’(The Corner) 또는 월스트리트 23번지’(23 Wall Street)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J.P. 모건이란 금융회사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1998년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로 신음할 때 한국의 단기외채를 장기채권으로 전환하는 중매역할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 회사는 1990년대말 이후 체이스맨해튼 은행, 뱅크원 은행, 베어스턴스, 워싱턴 뮤추얼 등과 합병해 현재는 J.P.모건-체이스 은행(JPMorgan Chase)에 이름만 남아 있다.

 

하지만 J.P.모건은 1935년까지 미국은 물론 전세계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은행이었고, 뉴욕 월스트리의 상징이었다. 월스트리트 23번지 본사건물에는 미국 대통령은 물론 유럽 각국의 총리, 백만장자들이 계단을 올랐고, 그 안에서 논의되는 비밀스런 거래는 국제정치를 좌우했다. 철도왕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화학제국을 건설한 듀폰가가 J.P.모건의 자금을 얻어 거대한 산업왕국을 형성했고, US스틸, 제너럴모터스(GM), 제너럴일렉트릭(GE), AT&TJ.P.모건의 지원으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이 개인 금융회사는 미국 연준(Fed)이 창설되기 이전에 중앙은행 역할을 했고, 뉴욕시가 파산위기에 처했을 때 세차례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도 했다. 은행 수장은 너무 많은 돈을 집중했다고 해서 정치적 압력을 받아 미 연방의회 청문회에 나가 곤욕을 겪기도 했으며, 1933년 대공황기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에 의해 은행을 일반상업거래 조직과 투자조직으로 분리하기도 했다. 분리된 이후에도 뉴욕의 J.P.모건과 모건스탠리, 영국의 모건 그렌펠, 프랑스의 모건 에 콤파니는 모건 하우스(House of Morgan)라는 금융가문 아래 함께 움직였다.

모건 하우스의 역사는 미국 은행의 역사이고, 월스트리트의 역사였다. 또 모건 하우스의 번창은 세계의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전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미국이 세계제국으로 팽창하는 시기에 유럽의 로스차일드, 영국의 베어링 브러더스를 제치고 등장한 것이 J.P.모건이었다.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 23번지에 있는 J.P.모건 본사. /위키피디아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 23번지에 있는 J.P.모건 본사. /위키피디아

 

J.P.모건의 뿌리는 모건 가문과 전혀 피를 나누지 않은 조지 피바디(George Peabody, 1795~1869)라는 인물이었다.

피바디는 메사추세츠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 어려서 겪은 가난은 그가 나중에 큰 돈을 벌어 자선사업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21살에 볼티모어로 가서 장사일을 했고, 42살이던 1837년에 당시 세계금융 중심지였던 런던으로 이주했다.

조지 피바디 /위키피디아
조지 피바디 /위키피디아

 

피바디는 런던에서 책상 하나 들어갈 사무실을 구하고 그동안에 모은 돈을 씨자금으로 조지피바디(George Peabody & Co.)를 창업했다. 그는 볼티모어에서 20여년간 장사를 하면서 맺은 인연을 바탕으로 메릴랜드주의 채권 발행을 중개했다. 주정부 채권을 팔고 사면서 공전조로 수수료를 받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영국에서 독립한지 50여년이 지난 상태여서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고 영국인들은 미국인을 깔보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에선 주정부들이 경쟁적으로 채권을 발행해 철도를 놓고 운하를 건설했다. 그 많은 자금이 주로 영국에서 조달되었다. 영국은 당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미국의 각 주정부들의 사업 성공 여부는 런던 금융시장에서 자금 유치에 달려 있었다.

피바디가 건너간 시기는 금융 불황의 시기였다. 메릴랜드주가 가장 먼저 파산을 선언했다. 파산 선언은 빚쟁이, 즉 채권자들에게 부채를 떼어먹는 것을 말한다. 펜실베이니아, 미시시피, 인디애나, 아칸소, 미시건 주도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시시피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자를 떼어먹었다. 요즘 남미 국가들이 파산할 경우 미국 은행들이 빚 독촉을 하는 상황을 보면 젖먹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꼴이라 할수 있다.

영국인들은 한때 식민지였던 곳에서 노골적으로 채무를 이행하지 않자 배은망덕하다느니, 불한당이라느니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미국의 주나 기업들이 돈을 빌리러 가면 깡패같은 것들에게 단돈 1달러도 빌려줄수 없다는 욕을 먹으며 문전박대를 당해야 했다.

 

피바디는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금융거래를 튼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사업 방식은 머천트 뱅크(merchant bank)였다. 정부나 상인, 부자들을 상대로 상거래를 할 경우 상품 대금을 대납하거나 채권을 인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연고지인 메릴랜드가 원금은커녕 이자도 갚지 않겠다고 나오자 피바디도 곤경에 빠졌다. 어느 사교 클럽에선 미국인이란 이유로 제명조치도 당했다.

피바디는 이런 굴욕을 당하면서도 영국인과 미국인을 상대로 설득 작업을 해 나갔다. 영국인에게는 파산한 주정부에서 돈을 받으려면 신규 대출을 주어 기력을 회복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미국인에게는 원금은 나중에 갚더라도 이자를 먼저 지급하라고 요청했다. 그는 친구와 정치인들을 두루 만나고 기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설득에 나서 그나마 메릴랜드가 이자를 갚겠다고 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돈을 모두 투자해 미국 주정부 채권을 사들였다. 어떤 채권은 발행가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주정부가 파산하면 자신의 은행도 파산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해 나갔다.

그런데 1848년부터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다가왔다. 유럽 전역에 혁명의 열기가 불어 닥치면서 유럽 은행들이 유럽 국가의 채권을 팔고 미국의 채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유럽의 앙시앙레짐 정부가 무너질 가능성이 컸고, 신대륙의 미국 정부는 적어도 살아 남을 것이란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캘리포니아에서 골드러시가 터졌다. 미국은 멕시코 전쟁에 승리해 서부에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한꺼번에 닥치면서 피바디는 그동안 마지못해 사두었던 미국 채권에서 큰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갑과 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185174일 피바디는 워털루 전투의 주인공 웰링턴 공을 초청해 미국 독립기념식을 주최할 정도로 영국에서의 지위가 상승했다.

 

런던 금융가에 있는 조지 피바디 상 /위키피디아
런던 금융가에 있는 조지 피바디 상 /위키피디아

 

이후 피바디는 승승장구했다. 그는 미국 연방정부와 다른 주의 주거래 은행 역할을 맡았다. 상거래차 런던을 방문한 미국인들은 반드시 피바디를 만나고 갔다.

찌들게 가난하게 살았던 그는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지만 검소하게 살았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도 2펜스 짜리 마차를 타지 않고 1펜스 짜리 마차를 기다리느라 옷을 젖기도 했다. 비서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거스름돈을 반드시 챙겼다고 한다.

그러던 그도 나이가 들면서 후계자를 물색하야 했다. 그는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녀가 없었다. 혼외 정사로 딸을 두었지만 끝내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후계 조건은 국제 무역에 경험이 있으며 사교적인 미국인이었다. 58세가 되던 1853년 그의 친구 제임스 비비가 미국의 금융자본가 주니어스 모건(Junius Spencer Morgan)을 소개시켜 주었다. 주니어스는 I.P.라는 약자로 알려진 존 피어몬트(John Pierpont)의 아버지다.

 

피바디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런던의 서민용 주택 /위키피디아
피바디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런던의 서민용 주택 /위키피디아

 

1853년봄 주니어스 모건은 아들 존 피어몬트와 함께 런던을 방문해 피바디를 만났다. 두 사람은 협상을 벌였다. 피바디가 내건 조건은 10년간 동업을 하되, 동업이 끝나면 자신은 은퇴한다는 것이었다. 주니어스는 피바디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주니어스 모건은 1854년 피바디의 회사에 파트너로 참여했다. 당시 피바디는 영국에서 로스차일드, 베이링 브러더스에 이어 자본금 45만 파운드로 3위의 은행이었다.

10년 동업 기간에 피바디는 명목상 대표였고, 실제 은행일은 주니어스가 책임졌다. 1864년 두 사람의 동업계약이 만료된 후 피바디는 아무런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고 자신이 투자한 자본금도 뺐다. 회사 이름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도 했다. 그래서 피바디사는 J.S.모건(J.S. Morgan & Co.)로 간판을 바꿔 단다.

 

이후 피바디는 자선사업에 힘을 쏟는다. 가난하게 살았던 과거에 대한 한풀이를 한 것이다. 그는 미국 자선사업의 원조기업인으로 꼽힌다. 피바디는 1869114일 런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74세였다.

그는 죽기 직전에 미국과 영국의 우호를 위해 영국 해군이 건조하는 전함 모나크호(HMS Monarch)에 자선기금을 댔다. 이 배는 당대 최대의 전함이었는데 빅토리아여왕은 피바디의 주검을 모나크호에 실어 미국에 운구토록 했다. 이 배가 미국에 입항 했을 때 미국의 해군제독이 나가 피비디를 정중하게 모셨다고 한다.

 

영국 전함 모나크호 /위키피디아
영국 전함 모나크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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