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모건②…아버지와 아들, 전쟁서 기회를 얻었다
JP모건②…아버지와 아들, 전쟁서 기회를 얻었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3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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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역할분담…아버지 주니어스는 런던, 아들 피어폰트는 뉴욕 경영

 

모건 가문(House of Morgan)의 원조를 추적하면 영국 웨일스 지방에서 1626년 매사추세츠로 건너온 마일스(Miles Morgan)라는 인물에 닿는다. 모건 가문은 메이플라워호가 청교도도들을 싣고 온 그 무렵에 미국에 이민와 정착했고, 사업에 성상공해 유복하게 살았다. 주니어스 모건의 아버지 조지프(Joseph Morgan)는 조지 워싱턴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커네티컷 하트퍼드에서 애트나(Aetna) 화재보험 설립에 파트너로 참여하기도 했다. 미국 초기 많은 기업가들이 가난의 상처를 안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모건 가문은 유복한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귀티나게 자랐다.

존 피어폰트의 할아버지 즉 조지프는 보험회사 경영에도 특별한 재주를 보였다. 1835년 뉴욕 월스트리트에 대형화재가 났을 때 투자자 대부분이 손해를 걱정해 보험금 지급을 망설일 때 조지프는 즉각 지급할 것을 주장했다. 조지프의 주장대로 한 결과 애트나 보험은 신뢰를 얻어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이어오고 있다.

조지프는 1847년 세상을 뜨면서 100만 달러나 되는 큰 돈을 아들 주니어스(Junius Spencer Morgan)에게 남겼다. 주니어스는 보스턴에서 J.M.비비(J. M. Beebe & Co.)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면화, 섬유류 등을 거래했다. 그의 무역회사는 보스턴에서는 최대의 회사였다. 그의 성실함과 사업의 지명도가 영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금융인 조지 피바디(George Peabody)의 인정을 받아 주니어스는 피바디의 동업요청을 받아들였다. 주니어스의 동업으로 피바디사는 피바디-모건사(Peabody, Morgan & Co)로 변경된다.

1854년 주니어스는 파트너이자 동업자로서 사실상 피바디-모건사의 경영을 맡았다. 주니어스는 유태 금융가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창업자가 아들 다섯을 유럽 각지에 파견해 함께 경영한 것을 모델로 삼아 일찍부터 아들 존 피어폰트(John Pierpont Morgan)를 경영에 참여시켰다. 존 피어몬트는 1857년에 피바디-모건사의 런던 지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때 나이는 20살이었다.

 

어버지 주니어스(왼쪽)와 아들 존 피어폰트 모건 /위키피디아
어버지 주니어스(왼쪽)와 아들 존 피어폰트 모건 /위키피디아

 

존 피어폰트는 1837년 커네티컷 하트퍼드에서 금수저로 태어났다. 피어폰트는 보스턴에서 잉글리시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상업을 배우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기숙학교 실리히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웠고,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그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일찍 죽는 바람에 사실상 외동아들로 성장했다.

피어몬트는 아버지 밑에서 런던에서 금융 인턴교육을 받고 이듬해인 1858년 피바디사의 뉴욕 대리점을 맡고 있던 던컨-셔먼사(Duncan, Sherman & Company)에서 근무했다. 그는 평은행원으로 일하면서 은행 돈으로 아무런 계약도 없이 브라질산 커피를 사들였다가 팔아 이익을 챙기는 투기행각을 벌였다. 돈은 벌었지만 위험한 일을 했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던컨-셔먼에서 쫓겨났다.

피어폰트는 24살인 1861년에 자신의 이름을 따 J.P.모건을 설립해 아버지 회사인 피바디-모건의 대리점일을 맡았다.

 

피어폰트의 뉴욕 대리점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업무는 아버지에게 미국 사정을 상세히 보고하는 것이었다. 1861년 남북 전쟁이 터지고 미국의 상황은 급변했다. 그는 뉴욕 에이전트로서 미국의 정치상황과 금융시장 정보를 깊숙이 파악해 런던에 신속하게 보고했다. 그 자료는 미국에서 발행하는 채권 발행물량과 가격을 가늠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33년간 아버지에게 전보로 미국 정보를 보고했다. 이 방대한 정보가 런던의 피바디-모건과 뉴욕 대리점 J.P.모건 사이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했다. 정보 보고 외에도 주니어스는 겨울에 3개월간 미국을 방문해 뉴욕에 머물면서 아들과 대화했고, 아들 피어폰트는 봄마다 런던을 방문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두 회사는 모건 하우스의 시초였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65)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금융인들에겐 돈을 벌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피어폰트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개전 초기인 1861년에 홀 카빈 사건’(Hall Carbine Affair)이 터졌다. 내용인즉, 북군의 군수사령부에서 재래식 라이플(M1819 Hall rifle)을 교체하면서 5,000정을 매물로 내놓았다. 아서 이스트먼이라는 무기상이 이 총을 1정당 3.5달러에 구매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스트먼은 또다른 무기상 사이먼 스티븐스에게 12.5달러에 팔았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북군의 야전장군 존 프레몬트가 스티븐스에게 라이플을 1정당 22달러에 사기로 했다. 두달 사이에 총 1정의 가격이 6배로 뛰었다. 이 과정에서 피어폰트는 스티븐스에게 2만 달러를 빌려주고 고리의 이자를 받아 먹었다.

사건은 리플리(J. W. Ripley)라는 군수담당 장군이 야전에서 자신들이 판 소총이 몇갑절 비싼 가격에 되사서 사용되는 것을 알게 되면서 터졌다. 피어몬트는 무기거래인지 모른채 돈을 빌려주었다며 어물쩡 넘어갔다.

피어폰트는 또 징집영장이 나왔지만 3백달러를 주고 다른 사람을 대신 군에 보냈다. 그는 존 피어폰트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나간 대리인의 가족들에게 전쟁 기간에 먹고 살 것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전쟁은 그에게 돈벌이 기회였다. 북군은 그린백 지폐를 찍어냈다. 금본위 시절이었기 때문에 대량으로 발행되는 지폐와 금 사이에 가격 차가 커졌다. 피어폰트는 금을 대량으로 매집해 해외로 빼돌렸다가 금값이 오르면 파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는데, 그렇게 해서 번 돈이 16만 달러였다고 한다.

 

M1819 홀 라이플 /위키피디아
M1819 홀 라이플 /위키피디아

 

1864년 조지 피바디가 동업계약을 끝내고 은퇴를 하면서 은행에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했다. 이에 따라 피바디-모건사는 J.S.모건(J. S. Morgan & Co.)으로 간판을 바꿔 달게 된다.

런던의 J.S.모건사에게 도약의 큰 기회가 왔으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이었다.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로 진격해 개전 한 달만인 187091일에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았다. 파리에서는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프로이센 군대는 파리를 포위했다. 11월초가 되면서 프로이센 군에 포위된 파리에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이듬해 1월 베르사이유궁에서 독일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프랑스인들은 굴욕감에 치를 떨었지만 프랑스 공화정은 더 이상 전쟁을 끌고 나갈 기력이 없었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에 협상을 제의했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프랑스는 알사스-로렌을 양도하고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가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위키피디아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가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위키피디아

 

문제는 배상금 지급이었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배상금을 모두 갚기 전에는 군대를 철수하지 않겠다고 배짱을 부렸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배상금을 갚지 못할 것으로 보고 이를 핑계로 프랑스에 독일군을 주둔시킬 요량이었다.

프랑스는 국채발행을 계획했다. 전란 중이어서 영국에서 국채를 소화해야 했다. 당시 영국의 금융권은 로스차일드, 베어링 브러더스가 주도하고 J.S.모건은 뒤쳐져 있었다. 베이링은 프로이센과도 거래를 했기 때문에 프랑스 국채 매입을 꺼렸다. 로스차일드는 중립적이었고, 결국 프랑스 정부는 미국인 은행인 J.S.모건에 손을 내밀었다.

주니어스 모건은 프랑스가 과거에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채권을 갚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여러 은행들를 불러 신디케이트를 조직해 프랑스 국채를 소화했다. 덕분에 프랑스는 곧바로 배상금을 갚을 수 있었고, 독일군은 철수했다.

채권 발행 이후에도 파리 코뮨 사건이 터져 프랑스 국채는 액면가의 80~55%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주니어스는 은행의 돈으로 프랑스 채권을 샀다. 얼마나 샀던지 은행 잔고에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국채는 곧바로 회복했고, 전쟁이 끝난지 2년후인 1873년에 프랑스 정부는 액면가로 국채를 상환했다. J.S,모건은 프랑스 국채에서 150만 파운드나 되는 돈을 벌엇다.

돈을 번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도였다. J.S.모건은 모두들 기피하는 프랑스 국채를 매입한 은행으로 명성을 쌓게 되었다. 프랑스 채권 거래를 계기로 J.S.모건 은행은 1870년대에 비즈니스의 중심지 런던에서 주류로 부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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