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모건③…피어폰트, 철도 조폭과 싸워 승리하다
JP모건③…피어폰트, 철도 조폭과 싸워 승리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01 15: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이 굴드와 철도 분쟁에서 이긴 후 국채 시장에서 제이 쿡 꺾어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은 아버지의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 스스로가 황태자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사업적 수완을 발휘해 미국에 금융왕국을 건설했다.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Junius Spencer Morgan)이 영국에서 사업을 한 반면에 아들 피어폰트는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 경제를 자양분으로 자신의 제국을 일구었다.

피어폰트에게 미국은 돈벌이 대상이었다. 남북전쟁 시기에 북군이 우세하면 금값이 떨어지고 남군이 이기면 금값이 올라가는 원리를 발견해 금 매집으로 큰 돈을 벌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미국이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철도였다. 철도는 광대한 미국 영토를 연결해 자원을 개발하고 산업을 부흥시키는 도구였고, 당시로는 첨단 미래산업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8년동안 미국의 철도건설은 전쟁전보다 두배나 긴 11km로 늘어났고, 1849년에는 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되었다. 유럽의 투자자들도 광풍과 같은 미국 철도 투기 대열에 참여했다. 당시 미국에는 영국계 양키자본과 유태 자본이 양대산맥을 이뤘다. 유태 자본은 독일에 미국의 철도 주식을 팔았고, 모건 부자를 대표로 하는 양키 자본은 영국에 팔았다.

초기 미국 철도 건설은 탈법과 투기, 폭력이 난무했다. 제이 굴드(Jay Gould)와 코닐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와 같은 사업가들은 정치인과 판사를 매수해 다른 사람의 철도를 뺏고 폭력배도 동원했다. 피어폰트는 이런 불법적이고 부패하기 짝이 없는 철도시장에 뛰어들었다.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의 1,000 달러짜리 채권 /위키피디아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의 1,000 달러짜리 채권 /위키피디아

 

1869년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Albany and Susquehanna Railroad) 분쟁이 터졌다. 이 철도는 뉴욕주 주도인 올버니에서 펜실베이니아 경계인 빙엄턴(Binghamton)까지를 연결했는데, 경제적 가치가 별로 없는 철도였다. 다만 펜실베이니아의 석탄광산과 연결하면 이리 철도(Erie Railroad)와 연결되어 오대호와 뉴욕주를 연결하는 이점이 있었다.

이 철도의 사업주는 조지프 램지(Joseph H. Ramsey)였고, 한해전 이리 철도 전쟁에서 승리한 제이 굴드가 폭력배 짐 피스크(Jim Fisk)를 앞세워 철도 주식을 매집해 나갔다. 램지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도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맞섰다.

철도 싸움은 폭력배간 대결로 치달았다. 굴드의 수하 피스크는 각목부대 800명을 열차에 태워 적진으로 향했고, 램지도 폭력배 450명을 동원해 상대방을 향해 달려갔다. 철로는 단선이었다. 마주보며 달리던 양측의 열차는 마침내 충돌했다. 영화의 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양측 폭력배들은 열차에서 내려 무기를 휘두르며 혈투를 벌였다. 마침내 뉴욕 주지사가 민병대를 소집해 두 진영의 육박전을 뜯어 말렸다.

주 정부의 개입으로 더 이상 폭력 행위를 할수 없게 되자 양측은 이사회에서 결론을 내기로 합의했다. 이때 철도 주인 램지는 피어몬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피어몬트의 은행은 이 회사 주식 600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당시 32세인 피어몬트는 당대 최대의 악덕자본가 또는 노상강도(Robber baron)로 불리던 제이 굴드와 맞장을 뜨게 되었다. 램지는 피어몬트를 이사로 임명했다. 186997일 열린 이사회에 양측은 자시세력을 모두 투입했다. 전기작가에 따르면 이때 피어폰트는 굴드의 하수인 피스크가 이사회 장소에 들어오자 그를 번쩍 들어 계단 아래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양측은 몸싸움을 벌이면서 별도의 이사회를 열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결국은 소송전으로 비화되었다. 굴드측은 판사를 구워 삶아 놓았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소송에 이길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피어폰트도 충분히 대비했다. 그도 판사에게 연줄을 대서 재판에 이겼다. 램지가 올버니의 한 공동묘지에 숨겨두었던 주주명부를 들이대면서 굴드측은 패배하게 되었다.

램지는 기업 강도들의 공격을 방어하게 되었고, 피어폰트는 당대 철도업계의 실력자 굴드를 꺾었다는 사실로 유명세를 타게 된다.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는 이듬해 델라웨어-허드슨철도(Delaware and Hudson Railway)와 합병, 뉴욕주의 핵심철도로 부상했다.

피어폰트는 램지에게 경영분쟁에서 이기도록 도와준 댓가로 금전적 이득을 요구하지 않고 이사 자리를 얻어냈다. 그 자체가 돈보다 중요했다. 철도회사는 피어폰트가 경영하는 은행의 고객이 되었고, 다른 은행의 개입을 차단했다. 이후 피어폰트는 경영분쟁에 개입하면서 이사직을 요구한다. 기업 경영에 참여하면서 금융거래를 하는 관계금융(relation banking)이란 개념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1882년 미국 철도 귀족들의 독점을 풍자한 만화 /위키피디아
1882년 미국 철도 귀족들의 독점을 풍자한 만화 /위키피디아

 

존 피어폰트는 자신이 1861년에 설립한 J.P.모건에 아버지의 지시로 자신보다 30살이나 연장자인 찰스 대브니(Charles Dabney)를 참여시켜 1864년에 대브니-모건(Dabney, Morgan, and Co.)을 설립해 운영해 왔는데, 1871년 대브니가 은퇴했다. 아버지는 성미가 급한 피어폰트를 제어시킬 또다른 동업자를 찾았는데, 그 사람이 필라델피아에서 은행업을 하는 앤서니 드럭셀(Anthony J. Drexel)이었다. 엔서니는 피어폰트보다 11살 많았다. 자본금은 아버지가 댔다. 드럭셀 가가 700만 달러, 주니어스가 500만 딜라. 피어폰트가 35만 달러를 투자해서 1872년에 설립한 은행이 드럭셀-모건(Drexel, Morgan & Co.)으로, 이 회사가 J.P.모건의 전신이다.

 

1873년 미국 연방정부는 남북전쟁 때 발행한 국채 3억 달러의 만기가 다가오자 이자율을 낮춰 새로운 채권으로 차환발행을 추진했다.

제이 쿡 /위키피디아
제이 쿡 /위키피디아

 

당시 미국 국채 시장은 제이 쿡(Jay Cooke)이 지배하고 있었다. 제이 쿡은 남북 전쟁 당시에 북군의 전쟁 채권을 인수해 고액을 잘게 쪼개 미국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양시키며 소화해낸 인물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연방정부가 발행하는 채권물량을 독식하며 엄청난 돈을 벌었다. 쿡은 그렇게 번 돈으로 대륙횡단철도인 노던 퍼시픽 철도에 투자해 1870년대에 석유 재벌 록펠러에 버금가는 부자가 되었다.

드럭셀-모건사는 제이 쿡이 독점하던 미국 국채 시장에 뛰어들었다. 제이 쿡은 뉴욕의 셀리그먼과 런던의 로스차일드등 유태인 자본과 신디케이트를 구성했고, 드럭셀-모건은 런던의 J.S,.모건과 베어링 브러더스등 양키 자본을 중심으로 신디케이트를 만들었다. 두 신디케이트가 연방정부 채권 물량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했다. 두 그룹이 워낙 팽팽하게 경합한데다 국채물량이 많았기 때문에 연방 재무부는 두 신디케이트에 5050으로 물량을 나눠주었다. 드럭셀-모건이 제이 쿡의 독점을 와해시킨 것이다.

 

그런데 1873년에 과열된 철도투자로 인해 금융공황이 발생했다. 1929년 대공황에 버금간 이때 공황으로 5,000개의 회사와 57개의 증권사들이 문을 닫았다. 그 와중에 노던 퍼시픽 철도에 과도하게 투자했던 제이 쿡의 회사도 도산했다.

제이 쿡이 금융시장에서 퇴출되자, 미국 국채시장의 최고 강자로 떠오른 회사는 드럭셀-모건이었다. 이후 드럭셀-모건, 이어 J.P.모건은 금융시장의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된다.

 

피어몬트는 유럽은행의 최강자 로스차일드가 미국 사업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 했다. 로스차일드도 미국 시장을 타진했지만 오거스트 벨몬트(August Belmont)를 뉴욕 에이전트로 둔채 더 이상 깊이 간여하지 않았다. 로스차일드는 유럽의 세계지배가 영원할 것으로 보았고 미국은 그냥 2등 국가중 선두 정도로 클 것으로 오판했다. 로스차일드가 미국 시장을 방관하고 있을 때 피어몬트는 자신의 은행을 세계 최대은행으로 키우게 된다.

 

뉴욕센트럴 철도의 노선망 /위키피디아
뉴욕센트럴 철도의 노선망 /위키피디아

 

1870년대 들어 아버지 주니어스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서서히 일을 접고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줄 준비를 한다. 1879년엔 피어몬트 모건은 이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주요 거래를 혼자 책임지고 벌여나가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일이 밴더빌트의 철도주식 매각이다.

1877년 미국 철도의 거물 코닐리어스 밴더빌트가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소유한 철도는 11개 노선 7,200km였는데, 그중 자신이 보유한 철도 지분의 87%를 장남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William Henry Vanderbilt)에게 물려주었다.

거물이 죽자 뉴욕주 의회는 철도가 한 사람의 손에 넘어간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윌리엄이 보유한 뉴욕센트럴 철도(New York Central Railroad)의 지분을 줄일 것을 요구했다. 윌리엄 밴더빌트는 사회적 분위기를 받아들여 25만주를 매각하기로 했는데, 그 물량을 소화해낼 은행으로 드럭셀-모건을 지목했다.

당시 철도주는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블루칩이었고, 밴더빌트의 25만주가 한꺼번에 풀리면 시장이 폭락할 우려가 컸다. 피어폰트는 이 거대한 물량이 소화하는 방법으로 미국의 부자들에게 사모 방식으로 매각하고 유럽에도 물량을 분산시켰다.

1883년 피어몬트는 밴더빌트의 앙숙인 제이 굴드에게 2만주를 판 것을 비롯, 굴지의 미국 기업인들에게서 20만주를 소화했다. 나머지 5만주는 아버지 회사 J.S.모건을 통해 영국에서 소화했다. 이 거래를 통해 피어폰트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300만 달러의 수수료를 챙겼다.

피어폰트는 밴더빌트 주식을 매각한 후에 뉴욕센트럴 철도에 이사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유는 런던의 주식매입자들을 자신이 대리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에서처럼 그는 뉴욕센트럴 철도의 이사가 된다. 이후 뉴욕센트럴 철도도 모건의 영향력 범위에 들어 가게 된다.

 

뉴욕센트럴 철도의 중심역인 뉴욕맨해튼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위키피디아
뉴욕센트럴 철도의 중심역인 뉴욕맨해튼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위키피디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