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주인공,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
비운의 주인공,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0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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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퇴임 후 국가주석직…프랑스, 일본, 미국 돌아가며 꼭두각시

 

베트남은 황제국가였다. 군주제 시절에 베트남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국왕이라고 호칭했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면서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내세웠다.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는 응우엔() 왕조의 바오다이(保大, 재위 1926~1945). 그는 1945830일 안남(安南)의 수도 후에(Hue)에서 군중들 앞에서 퇴위 칙서를 발표했다. 그는 퇴위 연설에서 반프랑스 운동에 앞장 선 베트민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왜 퇴위했을까.

프랑스 식민시절에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은 베트민(Việt Minh)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 조직은 호치민(胡志明) 등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베트민 군은 2차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1945825일 아침 바오다이가 거처하는 후에를 장악했다. 베트민 지도자 호치민이 왕궁에 들어가 왕제와 협상을 벌였다. 바오 다이 황제는 더 이상 통치능력을 잃었음을 깨닫고 퇴위할 것임을 밝혔다. 이에 호치민은 그를 국가수반으로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호치민은 정권을 장악했지만 국민적 지지를 받는 황제를 일개 시민으로 쫓아내지는 못한 것이다.

9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명목상 국가수반으로 취임했다. 오랫동안 왕조 통치를 경험한 베트남인들은 바오 다이의 베트민 정부 지지로, 호치민은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1926년 1월 8일 바오 다이 황제 즉위식 /위키피디아
1926년 1월 8일 바오 다이 황제 즉위식 /위키피디아

 

바오 다이는 응우엔 왕조 제13대 황제로,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다. 한자로 保大帝라 한다.

바오 다이는 19131022일 응우엔 왕조 12대 황제 카이딘(啓定帝)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13살의 나이에 안남국 황제에 올랐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였고, 프랑스는 옛 베트남을 3등분해 통치했다. 남쪽 코친차이나는 프랑스가 직할령으로 통치했고, 북쪽은 통킹, 중부는 안남으로 보호령으로 두었다. 바오 다이는 프랑스의 보호 하에 안남국 2, 응유엔 왕조의 13대 황제로 오른 것이었다.

바오 다이는 국내에서보다 해외에 더 오래 머물렀다. 그는 즉위 직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32년에야 돌아왔다. 귀국후 코친차이나 출신의 기독교도 완유씨란(阮有氏蘭, 南芳皇后)과 결혼했다. 나라의 독립을 꿈꾸었지만, 프랑스의 감시 하에 할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자료: 위키피디아
자료: 위키피디아

 

그러던 중 1차 세계대전 말기에 프랑스의 비시 정부가 연합군에 의해 붕괴되고, 인도차이나에도 권력 공백이 생겼다. 이때 일본이 바오 다이에게 베트남의 독립을 약속하고 협력을 구했다. 바오 다이는 일본에 속았다.

19453월 일본군은 베트남을 침공해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바오 다이에게 제위와 독립을 보장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곧이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일본의 인도차이나 지배는 힘을 잃었다. 일본 제국군대는 마지막까지 버텼다. 하지만 베트남 북부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그해 8월 혁명을 일으켜 베트남을 장악했다. 베트민 정부는 바오 다이에게 퇴위할 것을 요구했다.

 

바오 다이는 보위에서 물러나고 이듬해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으로 망명했다.

호치민의 베트민 세력은 다시 진주한 프랑스에 대항해 전쟁을 벌였다. 이른바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2~19548)이다. 이 와중에 바오 다이는 프랑스의 제의로 1949년 베트남에 귀국해 남베트남의 코친차이나를 합쳐 수립한 베트남국의 국가주석에 올랐다. 제위에서 물러난지 4년만에 복귀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배경이 된 프랑스는 19545월 디엔비엔 푸 전투에서 베트민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 직후 제네바 협정에서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종전이 선언되고 총선거를 전제로 프랑스가 물러났다.

 

이번엔 미국이 들어왔다. 미국은 베트민을 공산주의자로 보았고, 중국에 이어 동남아시아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베트남 원조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바오 다이는 국가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했고, 민심 이반은 극에 달했다. 바오 다이는 친미적인 응오 딘 디엠을 총리로 임명했다. 곧이어 미국은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고 딘 디엠 총리를 적극 지지했다.

바오 다이는 주석 직을 내줄 생각이 없었고, 미국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1955년 베트남 국민투표에서 디엠은 대통령제를 물었고, 그 결과 디엠이 승리해 베트남은 공화제로 이행하면서 국가주석제를 폐지했다. 바오 다이도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국가주석에서 퇴진한 후 그는 곧바로 프랑스에 망명했다. 그후 1972년 프랑스 여성 모니크 보도와 결혼해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파리와 칸에서 여생을 보냈다.

 

바오 다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향락을 추구하는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고, 이에 민심이 이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식 황후 이외에도 5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왕국 시절 수도인 중부 후에 지역에 지지세력이 있었다. 그는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반대했으며, 베트남의 중립 평화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북부 베트남은 파리에 사절단을 보내 바오 다이와 연정을 제의하기도 했다.

베트남 통일후인 1992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민권을 취득했지만, 귀국하지 않고 1997730일 프랑스 파리 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무덤도 파리의 한 공원묘지에 있다. 향년 84.

 

그는 베트남의 역사에 황제와 국가주석 직을 맡았다. 그가 제위에 있을 때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명목상인 황제였으며, 국가주석직에 올랐을 때는 프랑스에 의해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진 이후였다. 그는 비운의 황제임은 분명하다. 프랑스와 일본, 미국에 의해 꼭두각시 노릇하다가 이국 땅에서 생을 마친 인물이다.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 /위키피디아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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