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모건④…모거니제이션 통해 미국철도 지배하다
JP모건④…모거니제이션 통해 미국철도 지배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02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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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회사에 합의 종용, 철도 협회 조직…워크아웃으로 회생절차 진행

 

1880년대 철도산업은 미국 경제에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철도회사가 발행한 주식은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 주식의 60%에 해당했고, 당대의 블루칩이었다.

그런데 철도회사들은 경쟁회사가 놓은 노선 옆에 새로운 철로를 깔거나 요금을 인하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다. 경쟁회사의 열차가 자기네 노선에 다니지 못하도록 철로 궤도폭도 제각각이었다. 경쟁이 과도하게 진행되면서 수익성이 떨어지고 회사는 부채에 허덕이는 상황이 되었다. 상대방 죽이려다 오히려 자기 회사도 초죽음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경쟁은 뉴욕센트럴철도(New York Central Railroad)와 웨스트쇼어철도(West Shore Railroad)였다. 두 회사의 노선은 뉴욕시에서 출발해 뉴욕주를 가로질러 오대호까지 나란히 연결되었다. 두 철도회사는 고객과 화물을 유치하기 위해 살인적인 요금인하 경쟁을 벌였다. 웨스트쇼어는 맨해튼 건너편 뉴저지주 위호큰(Weehawken)까지 철로를 깔아 허드슨강 건너편의 뉴욕센트럴철도와 마주보게 되었다.

두 회사의 경쟁은 수익성을 떨어뜨렸고, 투자자들이 우려했다. 웨스트쇼어철도는 1877년 파산을 선언했고, 뉴욕센트럴도 수익이 줄어 철도 보수공사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뉴욕센트럴과 웨스트쇼어의 노선 /위키피디아
뉴욕센트럴과 웨스트쇼어의 노선 /위키피디아

 

존 피어폰트 모건은 두 회사를 상대로 중재에 나섰다. 1885720일 아침 피어폰트는 뉴욕 허드슨강 뉴욕쪽에서 뉴욕센트럴철도의 천시 데퓨 회장을 자신의 호화요트 코르세어(Corsair)에 태웠다. 이어 건너편 뉴저지로 가서 웨스트쇼어철도를 경영하는 펜실베이니아 철도(Pennsylvania Railroad)의 프랭크 톰슨 부회장을 태웠다.

코르세어호는 이날 하루종일 허드슨강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두 경쟁회사 경영자들은 배에 갇힌 채 선실에 마주 앉았고, 피어폰트는 두 사람에게 합의하지 못하면 배에서 내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피어폰트는 투자자들을 대변해서 두 회사의 경쟁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서로 얼굴도 쳐다보지 않던 경쟁자들은 피어폰트의 강압에 의해 대화를 나눴으나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길 싫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감정의 앙금을 풀어내고 오후 7시쯤에 합의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합의 내용은 더 이상 요금 인하 경쟁을 벌이지 않고, 상대를 죽이기 위해 부설한 노선을 매입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뉴욕센트럴은 뉴저지주 위호큰에서 뉴욕주 버펄로까지의 철도를 인수하게 된다. 이때 피어폰트의 나이는 48세였다.

 

피어폰트 소유의 코르세어호 /위키피디아
피어폰트 소유의 코르세어호 /위키피디아

 

피어폰트는 철도회사들의 경쟁이 투자자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 지역에 두 개의 회사가 철도 노선을 부설하는 것은 과잉중복투자이며 하나의 회사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 미국 산업계는 자유방임주의 그 자체였다. 법과 원칙이 없었고, 상도의라는 개념이 없었다. 기업들은 경쟁회사의 이권을 빼앗기 위해 서슴지 않고 조직폭력배를 동원했다. 업계의 조정 역할을 담당할 단체도 없었다.

석유재벌 존 록펠러와 철강재벌 앤드류 카네기는 대량의 벌크화물을 운송시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철도회사에 특별요금을 요구했다. 대형화주를 묶어두기 위해 철도회사들은 대기업에 요금을 인하해주고 그 손실을 중소기업과 일반 고객에게 전가했다. 중소기업인들과 시민들은 연방정부와 주정부에 부당한 철도요금에 대한 청원을 넣었고, 불합리한 요금체계는 정치문제화 되었다. 연방의회는 1887년 연방상업법(Interstate Commerce Act)을 통과시켰고, 그 법에 따라 이듬해 교통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피어폰트는 정부의 간섭에 앞서 업계 자율로 요금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88812월 철도회사 총수와 금융자본가들을 맨해튼 자택에 소집했다. 원수 같이 지내던 제이 굴드도 찾아왔다. 피어폰트는 요금인하 경쟁을 중단하지 않으면 더 이상 철도회사 채권과 주식을 유통시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날 모임에서 철도업계 수장들은 60일간 요금경쟁을 벌이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듬해 1월 피어폰트는 다시 총수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이날 모인 30명의 총수들은 대형사 중심으로 연방철도협회를 구성하고, 표준 요금을 책정하기로 합의했다. 표준 요금을 따르지 않을 경우 협회에서 축출한다는 정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이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중소 철도회사들이 표준 요금을 따르지 않았고, 대형사들도 여러 명목으로 요금을 할인해 주었다. 협회 자체가 무력화되었다.

 

미국의 철도회사들은 1893년 불황기에 대거 파산했다. 과도한 경쟁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된데다 지나치게 신설노선을 까는 바람에 빚더미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철도회사의 3분의1이 경기침체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때 피어폰트는 파산한 철도에 대한 회생작업을 진행했다. 파산한 회사를 은행의 부채를 인수해 새로 설립한 회사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다. 이를 모거니제이션(morganization)이라 불렀다.

모건, 즉 모건의 방식은 기업의 경영권을 잠정적으로 빼앗고 부채비율을 줄이는 것이다. 은행에 의한 워크아웃(workout)인데 이 방식은 후에 법정관리 이전의 은행관리 방식으로 많은 나라에서 채택된다. 파산 직전의 주주들은 은행에 의결권을 신탁했다. 의결권 신탁(voting trust)은 대략 5년간 진행되었다. 이 기간에 은행은 파산 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해 채권자들에게 부채를 줄이거나 낮은 이자율의 채권을 받도록 강요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돈을 다 떼이는 것보다 어느 정도 돌려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방식의 모거니제이션으로 회생한 회사는 이리철도, 체사피크-오하이오, 필라델피아-래딩, 산타페, 노던퍼시픽, 그리이트노던, 뉴욕센트럴, 리하이밸리, 저지센트럴, 서던레일웨이 등이었고, 당시 미국 철도 53,000km 가운데 6분의1이 모거니제이션을 거쳤다. 피어폰트의 드럭셀-모건도 모거니제이션 작업을 통해 100만 달러의 수익을 챙겼다.

모거니제이션 과정에서 철도회사는 드럭셀-모건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피어폰트는 모거니제이션을 거치는 회사의 본사를 뉴욕으로 옮기도록 했다. 드럭셀-모건사 은행원이 지방까지 찾아가서 작업을 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는데, 1900년대가 되면 미국 철도회사의 3분의2가 뉴욕에 본사를 두게 된다. 월스트리트 23번지 드럭셀-모건의 본사는 미국 철도회사의 총사령부가 되었고, 피어폰트는 미국 철도계의 대부로 군림했다.

 

젊은 시절의 존 피어폰트 모건 /위키피디아
젊은 시절의 존 피어폰트 모건 /위키피디아

 

189048일 모건 하우스의 창립자이자 피어폰트의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Junius Spencer Morgan)이 숨졌다. 그는 마차를 타고가다 기차 소리에 말이 놀라 뛰어오르면서 떨어져 뇌진탕을 당한 후 며칠후 생을 마쳤는데, 77세였다.

피어폰트는 아버지의 부동산과 자산 1,240만 달러를 물려받아 재산이 두배로 불어났다. 게다가 이버지의 런던 회사 J.S.모건의 경영권도 물려받았다.

1893년 동업자인 앤서니 드럭셀이 사망했다. 드럭셀 가문은 드럭셀-모건의 경영권을 피어폰트에게 넘겨주고 필라델피아 은행과 파리 은행만 갖겠다고 했다. 하지만 앤서니 드럭셀의 아들은 복잡한 은행 업무를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인생을 즐기며 살겠다며 필라델피아와 파리 은행을 피어몬트에게 넘겼다.

피어몬트는 파트너들과 합의해 뉴욕의 드럭셀-모건 은행의 이름을 J.P.모건으로 바꾸기로 했다. 파리의 은행을 모건 하예스로 바꾸되 필라델피아 은행은 드럭셀 은행으로 그대로 두기로 했다.

피어폰트는 아들 잭을 뉴욕과 필라델피아, 파리의 모건 은행에 파트너로 참여시켰다. 아들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인데 아버지와 구별하기 위해 J.P.모건 2세 또는 J.P.모건 주니어라고도 하고, 애칭 잭(Jack)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 언론과 서적에는 잭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피어폰트는 아버지를 잃은후 아들 잭을 런던으로 보냈다. 주니어스 시대에 모건 하우스는 런던이 중심이었지만 피어폰트 시절에는 뉴욕이 중심이 되었다. 뉴욕 맨해튼의 '더 코너'(the Corner)의 석조건물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연결하는 글로벌 금융의 총본부가 되었다.

 

J.P.모건의 서명이 들어 있는 뉴저지 철도 채권 /위키피디아
J.P.모건의 서명이 들어 있는 뉴저지 철도 채권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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