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모건⑤…대통령과 담판 “재무부 금을 채워라”
JP모건⑤…대통령과 담판 “재무부 금을 채워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0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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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유출로 금본위제 붕괴위기…채권 발행으로 금보유량 확보

 

존 피어폰트 모건은 미국의 전형적인 주류계급이었다. 영국 출신인데다 백인이고, 프로테스탄트는 아니었지만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그의 종교는 영국에서 건너간 성공회였다. 피어폰트는 태생적으로 커네티컷 양키였고, 런던의 귀족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유대인들의 금융을 싫어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때로 사업상 필요하다면 유대금융인들과 손을 잡았다.

그는 당시 유럽 금융을 휘어잡고 있던 로스차일드에 적대감정을 갖고 있었다. 피어폰트는 로스차일드와 거래할 때 그들의 거만함을 매우 불쾌하게 느꼈다고 한다.

 

J.P.모건이 유대금융회사 로스차일드(Rothschild)와 손을 잡은 것은 1895년 미국 재무부의 국고에 금이 바닥날 때였다. 당시 미국엔 중앙은행(Fed)이 없었다.

미국은 남북전쟁 때 일시적으로 금본위제도를 이탈해 금과 교환(태환)되지 않는 지폐(그린백)을 찍어내기도 했지만 18791월에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했다. 연방정부는 금본위제로 복귀하면서 재무부에 1억 달러 이상의 금을 보유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1890년대초 미국의 금이 유럽으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가 곡물작황 부진에다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국가부도 상황에 처했고, 아르헨티나에 대량으로 투자한 영국 은행들이 파산 위기에 몰렸다. 이 와중에 굴지의 베어링 브러더스는 영란은행의 구제금융을 받아 겨우 회생했다. 영국 은행들은 부실을 메우기 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미국 채권을 팔아 제꼈고, 채권에 물려 있는 미국의 금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갔다.

게다가 미국 정부가 농업인과 농촌 출신 의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금본위에 은을 가미시키면서 달러 절하의 가능성이 커졌다. 금은 복합본위제는 달라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가 미국에 투자한 유럽은행들로 하여금 미국 채권 매각을 가속화시켰고, 금 유출도 늘어났다.

 

미국 재무부 청사 /위키피디아
미국 재무부 청사 /위키피디아

 

피어폰트는 금본위제를 유지해서 달러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19세기말까지만 해도 영국이 세계금융을 주도하고 있었다. 피어폰트는 미국과 유럽의 긴밀한 협조체제가 구축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금보유량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금 유출이 빨라지면서 1894년에 재무부가 약속한 금 보유량은 1억 달러 이하로 떨어졌고, 1895년 들어 그 속도가 빨라졌다. 뉴욕항에는 막대한 금을 실은 배들이 빠져나갔다.

클리블랜드 대통령 /위키피디아
클리블랜드 대통령 /위키피디아

 

당시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는 민주당 출신으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등 당내 좌파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J.P.모건에 대해 영국 자본의 앞잡이’, ‘매국노라고 규정하고 미국의 금을 영국에 헌납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미국은 금본위제를 포기하든지, 국가파산을 선언해야 하든지 선택을 해야 할 기로에 서 있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J.P.모건을 피해 유럽의 로스차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주당내 좌파들의 공격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의 요청을 받은 로스차일드는 혼자서 미국에 금을 공급할수 없어 J.P.모건의 영국 자매회사 J.S.모건과 제휴하자고 했다. 베어링 브러더스는 회생작업이 진행중이어서 동참할 여력이 없었다. J.S.모건은 로스차일드에 뉴욕의 J.P.모건이 주관사로 참여할 것을 제의했고, 로스차일드는 이를 받아들였다.

 

1895131일 뉴욕에서 윌리엄 커티스 재무부 차관보와 피어폰트 모건, 로스차일드의 뉴욕 에이전트인 어거스트 벨몬트가 만났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민주당 좌파진영은 유대자본이 개입하려 한다는 소문을 증폭시켰다.

2월들어 재무부 금 창고의 수위는 급속하게 내려갔다. 미국이 부도날 것이란 소문이 돌면서 하루에 1,000만 달러의 금 회수 요구가 쏟아졌다. 며칠 더 버티지 못할 상황이 도래했다.

24일 피어폰트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대통령을 만나러 워싱턴행 열차를 탔다. 사전 약속도 하지 않았다. 클리블랜드는 다짜고짜로 찾아온 피어폰트를 만나주지 않았다. 피어폰트는 대통령을 만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다급한 것은 대통령이었다. 나라가 파산하면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한다. 결국 클리블랜드는 다음날 새벽녘에 피어폰트를 만났다.

피어폰트는 로스차일드와 함께 사모 방식으로 채권을 발행해 6,500만 달러의 금을 모으자고 제시했다. 클리블랜드는 좌파진영을 의식해 공모 방식으로 하자고 고집했다. 하지만 오늘내일 금고가 바닥 나는 상황에서 대중에게서 거액의 금을 끌어낼 방법은 없었다. 클리블랜드와 피어폰트가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백악관 직원이 900만 달러의 금 지급을 요구하는 청구서가 날아왔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피어폰트는 내일 또 1,000만 달러 청구서가 날아오는데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결국 클리블랜드는 피어폰트에게 졌다. 클리블랜드는 피어폰트의 요구대로 로스차일드와 공동으로 금을 조달하라고 부탁했다.

국채발행은 의회 동의사안이었다. 하지만 비상상황이어서 대통령은 남북전쟁 때 전시국채법을 꺼내들어 사모방식의 국채발행을 허용했다.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J.P.모건의 역할을 풍자한 만화. /위키피디아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J.P.모건의 역할을 풍자한 만화. /위키피디아

 

J.P.모건과 로스차일드는 30년만기 재무부채권 6.500만 달러를 인수해 뉴욕과 런던에서 금 350만 온스를 조달해 납입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6,500만 달러의 국채 발행은 시장에 업청난 압박을 주었다. 아무리 J.P.모건과 로스차일드라도 물량 부담이 컸다. 하지만 시장은 금새 소화해 냈다. 220일 뉴욕에서는 배정된 물량이 22분만에 소화되었고, 런던에서는 두시간만에 소진되었다.

재무부 창고에 다시 금이 찼다. 하지만 로스차일드가 참여했다는 사실이 좌파 포퓰리스트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유대인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맹비난했다.

 

다시 채워진 재무부 금 창고는 얼마가지 않고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1895년 여름 대량의 금이 유럽으로 빠져나가면서 클리블랜드 정부는 다시 금을 조달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해야 했다. 이번에는 민주당 좌파를 의식해 절반은 공모, 나머지 절반은 사모로 채우기로 했다. J.P.모건도 이번에는 로스차일드를 배제하고 내셔널 시티은행, 독일의 도이체방크, 프랑스 자매회사인 모건 하예스등 다국적 은행들을 참가시켰다.

 

미국의 금본위제 위기는 우연한 기회로 해결되었다. 알래스카 유콘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대량의 금이 공급되었다. 게다가 유럽에 흉년이 들어 국제곡물가가 상승하는 바람에 미국 농민들의 불만이 잦아들고 농촌을 기반으로 한 좌파진영의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189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좌파 포퓰리스트 진영의 브라이언이 현직 대통령을 꺾고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에 따라 J.P.모건 등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들은 공화당 후보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를 지지하게 된다. 그해 선거에서 맥킨리가 대통령이 되면서 피어폰트는 마치 제 세상이 온 것처럼 기뻐했다.

 

당대의 많은 비평가들은 피어폰트를 금융계의 타이탄, 나폴레옹, 제우스, 주피터라고 표현하며 비아냥거렸다. 그는 대통령을 겁박해 대규모 국채발행을 허가받아 수백만 달러의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없었던 시절에 대형은행이 중앙은행 기능을 해야 했다. 피어폰트는 중앙은행들 대신해서 금 유출을 막고 통화제도를 유지했다. 중앙은행을 대신한 그의 역할은 20세기초에도 계속되었다. 미국이 1913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를 설립하게 된 것도 J.P.모건의 역할을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인식이 켜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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