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불출의 어원이 된 두문동은 북한에서 보존급
두문불출의 어원이 된 두문동은 북한에서 보존급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0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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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반대한 고려충신 72현을 기리는 곳…350년후 영조때 복권

 

코로나19로 집에 콕 쳐박혀 있는 상황을 집콕이라고 한다. 한자화된 말로 표현하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다. 한자대로 해석하면 문을 닫아 걸고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문불출은 중국의 <국어>(國語)<사기>(史記)에도 나온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고사성어가 나오기 전에 이미 사용하던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유신들이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을 거부하고 벼슬살이를 포기한 채 은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조선 17대 영조 임금이 송도(개성) 일대를 순시하던 중 조선왕조 개국에 반대하던 선비들을 숨지게 한 두문동이라는 골짜기를 지나게 되었다. 당시엔 부조현이라 했다. 영조실록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영조 16(1740) 91일자)

 

임금이 연()을 타고 가면서 시신(侍臣)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命名)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니, 주서 이회원(李會元)이 아뢰기를,

"태종(太宗)께서 과거를 설행했는데, 본도의 대족(大族) 50여 가()가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했습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근신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했다는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칠언시(七言詩) 한 구를 쓰게 하니, 이르기를,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勝國忠臣勉繼世) 하였다. 수가(隨駕)하는 옥당과 승지·사관으로 하여금 시()를 이어서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또 직접 부조현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그 터에다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조선 시대엔 두문동이라는 말조차 없애고, 부조현(不朝峴), 즉 조정에 나가지 않은 마을이라는 비칭을 사용한 것이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해 숨진 고려의 충신 두문동 72은 영조에 의해 명예를 회복했다. 이들이 숨진 때는 조선 태조 1(1392) 7월이니, 350년의 기나긴 세월이 흐르고, 새 왕조의 임금이 16번이나 바뀐 이후에야 역적에서 충신으로 뒤바뀐 것이다.

 

두문동 /조선향토대백과
두문동 /조선향토대백과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향토대백과에 따르면 두문동(杜門洞)은 황해북도 개풍군 연릉리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향토대백과는 이렇게 서술한다.

“<개성지>에 의하면 이성계가 고려를 정복하고 정권을 잡은 후 고려의 백성들을 무마하기 위해 추동의 옛집에서 과거시험을 열고 고려 유신들을 등용하려 하였으나 조의생, 임선미 등 72명의 고려 유생들은 추동의 동쪽산(괘관고개)에 모여 우리들은 모두 조석으로 대성전의 측근자이다. 지금 과거에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관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대신 초립을 푹 눌러쓰고 개성성을 나와 만수산 남쪽골(현재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고 한다.

그때 골 입구에 하나의 사립문을 설치하였는데, 그 문은 항상 닫겨 있었고 문 옆에 하나의 가죽채를 두었다. 과거 보려는 자는 채찍매를 맞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고려 유신들의 강의한 절개가 두려워 산에 불을 놓고 그들을 모두 태워 죽였다. 현재 마을에는 조의생, 임선미를 비롯한 72명의 고려 유신들의 절개를 찬양한 두문동비가 세워져 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이렇게 생겼다. 두문동의 고려 충신들처럼 문을 걸어 닫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문동에 은거하다 숨진 72현에 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정리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라는 책자로 전해지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두문동 사람들을 미워해 개성 선비에게는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했다.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할 수 없이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게 되었다. 개성상인이 탄생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경남 창년군 물계서원 소재 두문동선생실기책판 /문화재청
경남 창년군 물계서원 소재 두문동선생실기책판 /문화재청

 

영조때 이르러 이들은 복권된다. 영조는 직접 '부조현' 세 글자를 써 그곳에 비석을 세우게 했다. 이어 두문동 72인의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고, 어필로써 "고려 충신의 명성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에 (비를)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14자를 써주고 비를 세우도록 하명했다.

두문동 72인 가운데 임(), () 두 성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후에 정조 때, 두문동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북한은 두문동비와 두문동비와 비각등 유적을 보존급 제1546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두문동실기는 현재 경남 창원군 물계서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시도유형문화재 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도 두문동이 있다. 이 곳에는 두문동(개풍군)에서 살아남은 7명이 정선 산골로 숨어들어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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