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독립기념일, 콜럼버스 동상은 왜 수난당할까?
美 독립기념일, 콜럼버스 동상은 왜 수난당할까?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07.0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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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년전 인디언 학살 원죄…인종차별 반대운동 맞물려 미국 곳곳에서 동상 파괴

 

미국 독립기념일인 74일을 전후해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동상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미국 CBS 방송에 따르면 미국 독립기념일인 4일 저녁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시위대들이 콜럼버스 동상을 로프로 쓰러 뜨린 후 내항에 던져 버렸다. 시위대들은 콜럼버스가 미합중국의 상징일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동상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했다. 볼티모어 내항 근처에 세워진 콜럼버스 동상은 1984년 당시 시장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세워졌다.

앞서 미국 오하오주 컬럼버스 시청 광장에 세워진 콜럼버스 동상이 71일 아침 작업자들에 의해 끌어 내려져 철거되었다. 이 동상은 1955년 이탈리아 제네바시가 기증한 것이었다 앤드류 긴서(Andrew Ginther) 컬럼비아시 시장은 콜럼버스는 억압과 분열을 상징한다면서 콜럼버스 동상은 더 이상 시를 상징하지 않기 때문에 철거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보스턴의 콜럼버스 동상의 목이 잘려 있다. /미 CBS캡쳐
보스턴의 콜럼버스 동상의 목이 잘려 있다. /미 CBS캡쳐

 

미국의 백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유럽인들을 이식시킨 콜럼버스를 독립과 이민자의 상징으로 모셔왔다. 하지만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s)라는 구호를 외치며 인종차별반대 운동이 확산되면서 콜럼버스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비난받고 있다. 운동가들은 콜럼버스를 식민주의자이며,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인물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 첫 식민지로 개척된 보스턴에서도 콜럼버스 동상의 목이 떨어졌다. 보스턴 경찰이 콜럼버스 동상을 손상시킨 범인에 대해 색출작업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소수민족 단체들은 차제에 동상을 영원히 철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도 630일 밤에 시위대들이 콜럼버스 동상을 무너뜨렸다.

이밖에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도 콜럼버스 동상이 훼손되거나 쓰러졌다. LA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도 평화 시위를 벌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귀국해 이사벨라 여왕을 알현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귀국해 이사벨라 여왕을 알현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그러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는 어떤 인물인가.

아메리카 대륙의 유럽인 후예들은 콜럼버스를 신대륙의 개척자라고 추앙해왔다. 미국에선 10월 두 번째 월요일을 컬럼버스 데이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그는 잔인한 살육자요, 정복자였다.

149283일 저녁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산타 마리아(Santa María) 호등 3척의 배를 이끌고 스페인 남쪽 팔로스(Palos de la Frontera) 항을 떠났다.

세 척의 배는 미지의 대서양을 건너 14921012일 새벽에 육지를 만났다. 콜럼버스는 그곳이 인도나 일본이 있는 동양의 어느 곳이라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이 나타나자 콜럼버스는 인도 사람인줄 알고 인디오라고 불렀고 그곳을 중국 해변이라고 믿으면서 동방견문록그레이트 칸과 금은보화를 찾으러 돌아 다녔다.

콜럼버스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그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상식 중의 상식이 되어 있다. 그의 아메리카 대록 발견을 통해 갓 탄생한 스페인이 패권국이 되고, 유럽에 의한 세계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대륙의 발견은 원주민들에겐 재앙의 시작이었다. 서양의 사탄이 몰려온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신처럼 군림한 콜럼버스 /위키피디아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신처럼 군림한 콜럼버스 /위키피디아

 

첫 번째 항해에 이어 1493년에 이뤄진 2차 항해는 1차때보다 규모가 컸다. 17척의 선단에 1,200명이 탔는데, 그들은 모두 금에 미쳐 있었다.

콜럼버스가 다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해보니, 식민지 개척자로 남겨두었던 선원들이 원주민들에게 몰살당해 있었다. 콜럼버스는 분노로 들끓었다. 선원들은 무자비하게 원주민을 약탈하고 강간했다. 원주민들도 저항하며 서양인들을 공격했다.

콜럼버스는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시를 건설하고, 스페인인들에게 토지를 분할해 주고 인디언들에게 금 공납과 부역을 명령했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말한 금은보화가 그곳에 없었다. 선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식민지는 난장판이 되어 갔다.

역사가들은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를 '홀로코스트‘(집단학살)라고 명명했다. 타이노(원주민)들은 조직적으로 노예화되고 살해되었다. 수백 명이 유럽으로 팔려갔고 다수는 항해 도중에 죽었다. 나머지 인디언들은 금을 가져오게 하여 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족을 잘랐다. 실제로 금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많은 원주민들은 도망갔고, 스페인인들은 이들을 사냥하듯 죽였다. 원주민들은 저항했지만 스페인의 우월한 무기에 역부족이었다.

유럽에서 옮아온 전염병은 그들의 삶을 파괴했다. 절망 속에서 원주민들은 자식과 함께 집단자살했다. 25만 명에 달하던 타이노 원주민의 수는 2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머지는 노예화되고 사망률이 높은 대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한지 60년후에 타이노 원주민은 수백 명만이 남았고, 100년 후엔 손에 꼽을 인구만 남았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에게 잔혹한 정복자였다.

콜럼버스는 두 번째 항해부터는 서서히 몰락했다. 왕과 여왕은 콜럼버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1502년 콜럼버스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부부가 마지못해 지원해 준 작은 배 4척을 타고 15025월 마지막 항해를 떠났다. 동참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콜럼버스는 이 항해에서도 금은보화를 찾지 못하고, 1년 동안 자메이카 해안에 갇혀 고생 하다가 1504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페르난도 왕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좌절감과 관절염에 시달리다가 15065215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원주민과 백인들에 의해 끌려온 흑인 후예들이 콜럼비아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의 원죄가 500년 이후에 다시 부각된 것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위키피디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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