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 예국③…만주서 동해안으로 이동
사라진 고대왕국 예국③…만주서 동해안으로 이동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4.24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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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국 멸망 후에 신라와 대치적 관계…말갈족과 혼재한 듯

 

예국의 인장, 즉 예인(濊印)에 관한 기록은 중국인 진수가 쓴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고려인 김부식과 승일연이 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동시에 나온다.

 

“[부여(夫餘)에서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편)

남해 차차웅 16(서기 19) 2,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濊王印)을 주워서 바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穢王印)을 발견해 바쳤다.” (삼국유사 마한편)

 

중국과 한국의 옛 문인이 쓴 사서에서도 예왕인(濊王印)에 대해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중국인 진수가 쓴 삼국지 동이전에서 예왕지인이 나온다는 점에서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여가 의 일원이었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나오는 북명(北溟)과 명주(溟州)는 지금의 강릉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국이 만주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것일까.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라(부여)에 옛 성이 있어 예성(濊城)이라 한다. 원래는 예맥(濊貊)의 땅이라, 부여가 그 안에서 왕 노릇을 하면서 스스로 망인(亡人)이라 하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부여가 예의 땅을 빼앗아 형성한 나라임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의 땅을 부여가 차지했기 때문에 옛성을 아직도 예성이라고 부르며, 중국으로부터 예왕의 관인(濊王印)을 받았다. 부여는 예의 땅에서 왕국을 건설했지만, 토착민인 예족을 무마하기 위해 스스로 망인이라고 했던 것이다.

부여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동으로는 읍루, 서쪽에는 선비와 국경을 접해 있는 나라였다. 위치상으로는 만주에서도 북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만주 지역의 예족이 부여에 의해 흡수되고, 잔여세력이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 일대에 옮겨와 만든 나라가 한반도의 예다. 즉 동예다.

삼국지가 편찬된 3세기말에는 만주의 예가 부여 또는 고구려에 흡수, 합병되고, 한반도의 동예가 예의 명맥을 있고 있었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예는 동예를 의미한다.

 

강릉은 예국의 수도였다. 사진은 강릉 경포호. /강릉시청
강릉은 예국의 수도였다. 사진은 강릉 경포호. /강릉시청

 

강릉의 남대천을 예전에 예강(濊江)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단군문화기행박성수교수 저)

강릉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함경남도, 남으로 영덕 또는 포항까지의 동해안 일대가 예국의 강역이었다. 이중 실직국이 예국에서 독립해 동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다 신라에 병탄된 후 강릉과 안변을 중심으로 예국은 명맥을 이어갔다.

동해안의 예국은 적어도 진수(陳壽, 233297)가 삼국지를 편찬한 3세기말에도 존속했다. 진수는 예국의 지배체제, 생활상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12~13세기에 쓰여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실직국이 망한후 적어도 200년 이상 강원도 동해안에 실재한 예국에 대한 기사가 전무하다. 실직국이 망한(104) 이후 수세기 동안에 신라는 실직 때론 하슬라를 북쪽 경계(북변)으로 삼는데, 여러 차례 말갈의 공격을 받는다는 기사가 나온다. 실직국이 패망한 이후인 2세기초에 말갈의 공세가 집중된다.

 

지마 14(125) 정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해,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지마 14(125) 7, 그들은 다시 대령(大嶺) 목책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넘어왔다.

일성 4(137) 2, 말갈이 쳐들어와, 장령(長嶺) 다섯 군데 목책을 불태웠다.

일성 6(139) 8, 말갈이 장령을 습격해 백성들을 노략질했다.

일성 6(139) 10, 말갈이 다시 습격해왔으나, 눈이 심하게 내리자 물러갔다.

자비 11(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했다.

소지 2(480) 11,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소지 3(481) 3,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狐鳴)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수가 3세기말에 삼국지 동이전을 쓸 때 강원도 영동지방의 예국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삼국사기에서는 3세기말 이전에 신라의 북변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종족은 말갈(靺鞨)이라고 기록했다. 신라는 실직을 예속화한 후 하슬라를 장악했고, 때론 예국의 또다른 본거지인 비열홀(比列忽, 함남 안변)까지 공세를 취한다.

예국이 동족인 실직국이 패망한 후 신라에 대해 대규모 공격을 가했던 것이 분명하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예국을 말갈과 혼돈해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예족과 말갈족이 동해안 지역에 혼재했을지도 모른다.

김부식이 예족을 말갈로 표현했다면, 예국은 5세기말까지 동해안 일대에 강력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소지 3(481) 말갈(예국)은 고구려와 연합군을 형성해 미질부(포항 흥해)까지 진격했다. 물론 고구려군의 소속해 공격에 나섰지만, 신라의 중심부까지 공격했으니, 그 기세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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