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의 미국 청년 스트레이트, 구한말을 찍다
풍운의 미국 청년 스트레이트, 구한말을 찍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08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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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05, 로이터 서울 특파원, 미국영사관 부영사로 재직중 촬영

 

구한말인 1904~1905,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 당시를 설명한 역사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만 사진자료는 드믈다. 이 시기에 귀중한 사진을 남긴 사람이 윌러드 디커맨 스트레이트(Willard Dickerman Straight)라는 미국인이다. 그가 찍은 을사조약 체결후 기념사진, 숭례문 앞의 일본군 행렬 등은 당시 우리 역사의 아픔을 소환한다.

스트레이트라는 인물은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취재차 로아터통신의 특파원으로 서울(한양)에 파견됐다가 19056월에 미국 공사관 부영사 직책으로 한국에 다시 들어오게 된다. 그는 한국에 머물던 기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딸 앨리스(Alice Lee Roosevelt Longworth)를 초청한 것으로 유명하다.

 

윌러드 스트레이트가 소장한 을사조약 기념사진 /코넬대 도서관
윌러드 스트레이트가 소장한 을사조약 기념사진 /코넬대 도서관

 

스트레이트는 미국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스토리를 추적해 본다.

스트레이트는 1880131일 일본과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미국인 선교사 부부에게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뉴욕주 북부 오스웨고(Oswego). 그는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고 열 살에 어머니를 잃어 고아가 되어 그와 여동생은 한 의사 집에서 양육되었다. 코넬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청제국의 난징(南京) 세관에서 일하며 중국어를 습득했다.

그에겐 풍운아의 기질이 있었다. 그는 1904년 터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로이터 통신의 특파원으로 서울에 왔다. 그가 서울에서 취재를 하던 중에 저녁만찬에서 미국 철도계의 거물 에드워드 해리먼(Edward H. Harriman)을 만났다. 해리먼은 미국 대륙횡단철도인 유니언 퍼시픽과 우편 여객선 회사를 운영하던 재벌이었다.

스트레이트는 영화배우를 뺨 칠 정도로 잘 생긴 청년이었다. 해리먼의 딸 메리가 그를 좋아 했지만, 해리먼이 둘의 결혼을 반대해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해리먼은 스트레이트가 똑똑하고 협상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간파해 언젠가 써먹을 것이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그를 서울에 주재하던 미국 영사였던 에드윈 모건(Edwin V. Morgan)이 먼저 스카웃해 부영사 자리를 주었다. 당시 25살이었다. 이 때 그가 찍은 사진들이 구한말의 귀중한 역사자료로 남아 있고, 현재 코넬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윌러드 스트레이트가 소장한 숭례문 앞 일본군대의 행렬 /코넬대 도서관
윌러드 스트레이트가 소장한 숭례문 앞 일본군대의 행렬 /코넬대 도서관

 

이 잘 생기고 똑똑한 청년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당시 미국 언론의 가십란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에셀(Ethel)과 사귄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루스벨트의 또다른 딸 앨리스를 대한제국에 초대하는데 성공했다.

1906년 미국의 철도재벌 해리먼은 중국의 철도사업에 투자하기 위해 대한제국 미국영사관에 근무하던 스트레이트를 영입해 중국 사업에 투입했다. 그런데 루스벨트 대통령도 그의 탁월한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대통령은 26살밖에 되지 않은 청년을 만주 봉천(奉天, 지금의 선양) 총영사로 발령했다. 봉천은 청나라가 만주에서 제국을 수립할 때 수도였고, 일본이 러일 전쟁 이후 중시여겼고, 러시아가 호시탐탐 노리던 각축장이었다. 루스벨트는 극동에서 중요한 곳에 겁 없는 청년을 보낸 것이다.

 

스트레이트는 이 곳에서 미국 제국주의에 심취했다. 그는 동이사아에 대해 영국, 일본과 러시아를 배제하고 미국이 식민로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봉천에서 낭만적 모험을 즐기고 있는 가운데 부자집 여성을 만나는데 그녀가 도로시 휘트니(Dorothy Payne Whitney)였다. 도로시는 미국 해군장관을 지내고 담배, 도시철도, 자동차, 주식투자 등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한 윌리엄 휘트니(William C. Whitney)의 딸이었다.

 

이번엔 당대 미국 금융시장을 휘어잡던 J.P.모건의 존 피어폰트 모건이 이 젊은이에 눈독을 들였다.

피어폰트 모건은 미국 금융기관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중국 철도사업에 뛰어들었다. J.P.모건은 미국 금융자본을 동원하고 국무부를 앞세워 청제국과 철도사업을 협의하는데 스트레이트를 대표로 보냈다.

스트레이트의 협상력은 뛰어났다. 그는 차관 5,000만 달러를 청나라에 지원하는 대신에 서양인을 경제고문으로 앉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청나라는 차관만 빌리려 했고, 금융정책을 간섭하는 고문의 위촉을 반대했다. 밀고 당기기는 협상 끝에 청나라는 스트레이트의 조건을 수용했다. 네덜란드인이 경제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11년 청제국과 J.P.모건의 계약이 서명된 후 스트레이트는 미국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평민 출신이 집안에 들어오는데 불평하던 휘트니 가문도 스트레이트가 J.P.모건에서 일하며 큰 일을 해낸 것을 알고 도로시와의 결혼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스트레이트는 5년간의 연애 끝에 도로시와 결혼했다. 도로시는 부모가 일찍 죽는 바람에 물려받는 재산이 천문학적 수준인 700만 달러에 이르렀다. 가난한 선교사의 아들은 부잣집 상속녀와 결혼한 것이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신해혁명은 외국인 자본에 대한 반감에서 촉발되었다. 청제국이 무너지고 1912년 쑨원(孫文)이 권력을 장악했다. 쑨원은 외세배격을 선언했다.

무장 시위대가 중국 전역을 휩쓸고 다녔다. 스트레이트는 잘 때도 권총에 실탄을 장전한 채 책상 옆에 두었다.

스트레이트와 도로시 부부는 스릴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어느날 부부가 영국인의 만찬 초대를 받아 집을 나서는데 총성이 울렸다. 둘은 거치장스러운 야회복을 입은 채 이웃집으로 대피했다. 폭도들이 외국인을 겁박하고 상점을 약탈했다. 부부는 미국 공관으로 이동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공관으로 가는 길에 시위대에 포위되었다. 그들을 구한 것은 미국 해병대였다. 부부는 허겁지겁 인력거를 타고 공관으로 피하게 되었다.

 

코넬대의 윌러드 스트레이트 홀 /위키피디아
코넬대의 윌러드 스트레이트 홀 /위키피디아

 

스트레이트는 뉴욕으로 돌아와 J.P.모건 본사에서 근무했지만 오래 다니지는 않았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재벌금융회사의 조직규율에 익숙치 않았다.

1915년 그는 J.P.모건을 나와 아메리칸인터내셔널이란 금융회사 부사장을 맡기도 했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확전되고 미국의 참전 여부가 이슈로 떠오르자 그는 참전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는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기 앞서 민병대 훈련소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74월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자 스트레이트는 곧바로 군에 입대해 유럽 전선으로 갔다. 그는 뛰어난 전투실력을 발휘해 특별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 말기에 확산된 스페인 독감에 걸려 1918121일 파리에서 숨졌다. 38세였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인 1912년 코넬대에 10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가 죽은후 부인 도로시는 코넬대에 윌리어드 스트레이트 홀(Willard Straight Hall)을 건립해 그를 추념했다. 그 코넬대에 그가 조선 주재 시절에 촬영하고 수집한 구한말의 사진 174점이 남아 있다.

 

윌러드 디커맨 스트레이트 /위키피디아
윌러드 디커맨 스트레이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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