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①…발칸의 총소리
1차 세계대전①…발칸의 총소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1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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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 사라예보서 피살…세르비아에서 공작

 

모든 음모는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는 대위시절이던 1903년 쿠데타를 일으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고분고분하던 세르비아의 알렉산드르 국왕과 왕비를 자신의 총으로 쏘아 죽이고 친슬라브주의 왕조를 수립한 주역이었다.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Dragutin Dimitrijević)는 승승장구, 대령이 되면서 군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그는 요인 암살과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는 검은 손(Black Hand)이란 조직을 운영했다. 그는 아피스(Apis)라는 가명으로 지령을 내려보냈다.

1911년 디미트리예비치는 오스리아 황제 프란츠 요세프(Franz Josef)의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슬라브족이 발칸반도에 슬라브국가를 건설하는데 가장 큰 방해꾼이었다. 그는 방향을 바꾸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를 암살하기로 결심한다. 황태자는 남슬라브의 각국에 자치권을 대폭적으로 이양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디미트리예비치는 오스트리아가 보스티아-헤르체고비나에 자치권을 주면 남슬라브 연합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했다.

1914628일 오전 11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저격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디미트리예비치의 음모를 실행한 저격수는 20살의 보스니아 출신 세르비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였다. 당사자들은 이 총소리가 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될 줄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 /위키피디아
가브릴로 프린치프 /위키피디아

 

19세기 후반부터 발칸반도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화약고가 되었다.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쇠약해지면서 슬라브족 민족주의가 분출하고 슬라브족 종주국인 러시아가 발칸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활용하고 있었다.

1877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 분할 계획을 세웠다. 두 나라가 체결한 부다페스트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베사라비아(Bessarabia, 몰도비아)를 차지하고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했다.

곧이어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묵인 아래 흑해 함대의 출구를 열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공격했다. 전쟁은 러시아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오스만 투르크를 협박해 보스포루스 해협의 개방을 얻어냈다. 이에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을 지지하면서 보스포루스의 출구를 다시 봉쇄했다.

출구가 막힌 러시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통한 육로를 통해 지중해 출구를 모색했다. 차르 니콜라스 2세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오스트리아와 공동 점령하자고 제안했으나, 오스트리아는 단박에 거절했다. 1897년 러시아는 결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인정하게 된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공식적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했다. 러시아와 세르비아가 반발했지만 열강들의 역학관계에 의해 되돌리지 못했다. 그후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후유증으로 발칸에 개입하지 못했다.

1912~1913년 두차례의 발칸 전쟁이 발발해 오스만 투르크는 발칸반도에서 철수해 이스탄불 주변으로 위축되었다. 발칸 반도에는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그리스 등 여러나라로 분할되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차량 /위키피디아
황태자 부부가 탄 차량 /위키피디아

 

남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가장 방해되는 나라가 오스트리아 제국이었다. 그 민족주의 중심에 디미트리예비치가 있었다.

디미트리예비치는 비밀 요원들을 풀어 오스트리아 요인들과 세르비아 앞잡이들을 처형하는 일을 관장했다.

1914년 디미트리예비치의 첫 타깃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Oskar Potiorek)였다. 실행총책은 다닐로 일리치(Danilo Ilić)였는데, 거사 직전인 326일에 상부로부터 중지명령을 받았다. 타깃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 비밀조직의 새로운 타깃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승자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트였다.

세르비아 정보기관은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625일 보스티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디미트리예비치는 일리치에게 암살단을 구성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일리치는 세르비아 군사학교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을 소집했다. 그는 가브릴로 프린치프, 트리프코 그라베주(Trifko Grabež), 네델리코 카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3명으로 암살조를 편성했고, 다른 열혈 젊은이 3명을 추가했다.

이들은 작전에 필요한 권총과 폭탄을 제공받고, 베오그라드의 한 공원에서 2주동안 총을 쏘고 폭탄을 투척하는 방법을 훈련받았다. 게다가 사건후 자결하기 위해 청산가리 캡슐을 하나씩 챙겼다. 암살조에게 직접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실시한 사람은 디미트리예비치의 오른팔인 틴코시치(Vojislav Tankosić) 소령이다. 탄코시치도 디미트리예비치와 함께 1903년 쿠데타의 주역이었고 왕실 가족을 직접 살해했다. 그는 후에 자신이 사라예보 사건에서 한 역할을 언론인과 역사기술자에 시인했다.

암살조는 528일 보트를 타고 다뉴브강 지류인 사바강을 거슬러 올라가 육상에 내린 후 국경검문소를 통과했다. 이미 상부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국경에서 간단한 검문만 있었다.

 

비밀정보부의 2인자 틴코시치는 암살조가 떠난뒤 세르비아의 총리 니콜라 파시치(Nikola Pašić)에게 황태자 암살계획을 통보했다. 페시치 총리는 민족주의자였지만 테러를 통해 오스트리아를 자극하는 것을 극히 우려했다. 그는 암살조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미 그들은 국경을 넘어갔다.

세르비아 총리는 오스트리아에도 그 정보를 알려주었다. 65일 세르비아 공사는 오스트리아 재무장관을 방문해 안전상의 이유로 황태자의 사라예보 방문을 변경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때 세르비아 정부는 정확하게 정보를 알려주어야 했었다. 또 오스트리아도 가상 적국의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황태자의 일정을 취소하거나 변경해야 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모호하게 정보를 알려주었고,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 실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4년 6월 28일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이동 방향 /위키피디아
1914년 6월 28일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이동 방향 /위키피디아

 

암살조 가운데 보스니아 출신들은 가족들을 만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사라예보 숙소에서 각기 다른 거처를 마련했다.

프린치프는 보스니아에 거주하는 농부의 아들로 세르비아인으로의 정체성을 강하게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세르비아 혁명가들을 존경했고, 1912년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학교에서 제명당했다. 퇴학당한 후 곧바로 280km를 걸어가 베오그라드의 게릴라부대에 가입해 탄코시치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탄코시치로부터 거사 명령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보스니아 총독 포티오레크는 아무 것도 모른채 황태자 영접을 준비했다. 포티오레크는 황태자 부부를 경호하기 위해 경찰 120명을 배치했다.

625일 황태자 부부는 사라예보 외곽의 온천도시 일드리지에 도착했다. 페르디난트와 황태자비 소피(Sophie)26~27일 이틀간 군사령부를 시찰하고 훈련을 주관했다.

 

628,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마지막 일정으로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오전 920분 사라예보 역에 도착한 황태자 부부는 육군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무개차에 올라탔다.

암살자들은 황태자 일행의 행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5명은 강변 도로를 따라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했고, 프린치프는 혼자 300m쯤 떨어진 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1010분 마침내 황태자 일행이 탄 차량들이 나타났다. 암살자들은 손이 떨렸다. 첫 젊은이는 우물쭈물하다가 폭탄을 주머니에서 꺼내지 못했고, 두 번째는 황태자비가 불쌍하다며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 세 번째 대기자는 근시라서 황태자를 구별하지 못해 놓쳤고 네 번째는 폭탄이 터지면 죄 없는 군중이 다칠까봐 던지지 못했다. 다섯 번째 카브리노비치는 용기를 내어 안전핀을 뽑고 수류탄을 던졌다.

폭탄이 날아오는 것을 운전수는 보았다. 운전수가 악셀레이터를 밟았고 수류탄은 황태자 부부가 탄 차량의 덥개를 맞고 도로에 떨어졌다. 폭탄은 뒷 차량에서 터졌다. 황태자 부부는 무사했지만 후미 차량에서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은 즉시 카브리노비치를 체포했다. 그는 독이 든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지만 너무 써서 토해내 버렸다. 카브리노비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프린치프는 멀리서 카브리노비치가 체포되는 것을 보고 모든 일이 틀렸다며 낙심했다.

황태자 부부는 여기서 다음 일정을 중단해야 했다. 총독은 군부대로 가든지 일정을 중단하자로 설득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고집스러운 인물이었다. 황태자는 하루에 두 번이나 테러가 있겠느냐면서 다음 일정인 시청으로 갔다. 시청에 가서 시장에게 심술을 부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무사히 행사를 치렀다.

황태자는 공식 일정을 모두 마쳤다. 그런데 그는 폭탄 폭발로 부상을 당한 메리치 대령을 위문하러 가자고 했다. 총독이든, 시장이든, 부인이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말렸어야 했다. 아무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1045, 페르디난트와 소피는 무개차를 타고 사라예보 병원으로 출발했다. 포티오레크 총독은 안전을 위해 황태자 부부가 탄 차량을 세 번재 행렬에 배치하고 군중들을 피해 병원으로 직행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그의 지시가 운전수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운전수들은 원래 지시받은 길로 차를 몰았다. 선두 두 대의 차량이 라틴교에서 우회전했다. 총독은 급히 황태자 부부가 탄 세 번째 차량 운전자에게 소리를 질러 차를 세웠다. 세 번째 차량이 정지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시청에서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 /위키피디아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시청에서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 /위키피디아

 

그 순간 그곳에 프린치프가 있었다. 프린치프는 앞서 카브리노비치의 수류탄 투척이 실패한 것을 보고 잠시 실망했으나, 황태자가 혹시 역방향으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차량이 멈춰 섰을 때 황태자 부부는 프린치프에게서 1.5m 앞에 있었다.

오히려 프린치프가 깜짝 놀랐다. 설마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총을 꺼내 그 자리에서 황태자 부부를 향해 두발을 쏘았다. 한발은 소피의 복부를 관통했고, 두 번째 탄알은 페르디난트의 목에 적중했다. 프린치프는 곧바로 청산가리를 물었지만 그도 토해내고 말았다.

황태자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황태자비의 하얀 드레스가 붉게 물들었다. 페르디난트는 비에게 소피, 죽지 마오. 아이들을 위해 반드시 살아줘하면서 숨소리가 약해졌다.

황태자비 소피가 먼저 사망했다. 10분 후인 1914628일 오전 1130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세상을 떠났다.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단트 황태자 부부 피습 장면(그림) /위키피디아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단트 황태자 부부 피습 장면(그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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