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③…최후통첩 48시간
1차 세계대전③…최후통첩 48시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14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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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최후통첩 전달…세르비아, 10개항 중 2개항 거부, 전쟁 개시

 

191471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통첩문을 작성해 베오그라드 주재 대사관으로 송달하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관하라고 했다. 그 무렵 프랑스 대통령 푸앵카레(Raymond Poincaré)와 총리 비비아니(René Viviani)가 러시아를 방문해 차르 니콜라스 2세와 회담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정상회담 기간에 세르비아 사태가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오스트리아의 판단이었다. 프랑스 대통령 일행이 러시아를 떠난 직후로 최후통첩 전달 타이밍을 맞췄다.

723일 오후 6, 베오그라드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 기즐링겐(Baron von Gieslingen)은 세르비아 정부 청사를 찾아가 파시치 총리를 만나려 했지만, 그는 선거 유세를 떠나고 없었다. 오스트리아 대사는 퇴후통첩문을 총리 대행인 재무장관에게 전달했다. 제국의 수도 빈에서는 세르비아가 통첩문에 거부하거나 이견을 달면 즉각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사는 통첩문을 전달한 후 곧바로 대사관의 비밀문서를 파기하고 짐을 쌌다.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문 /위키피디아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문 /위키피디아

 

최후통첩문은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시해사건에 대한 세르비아의 입장을 촉구하는 10개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적개심을 부추기는 출판물 금지, 단체 해산, 교육활동 중단 등의 내용과 황태자 부부 시해 배후자들의 체포,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특히 5항과 6항에선 오스트리아 경찰이 직접 시해 배후자들을 조사하도록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또 시해사건 배후 총책으로 지목된 탄코시치 소령 등 2명을 적시해 체포를 요구했다.

10개항 모두 내정간섭적 요소가 다분했다. 최후통첩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세르비아는 주권국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막강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짓밟히게 된다.

 

답변의 데드라인은 토요일인 725일 저녁 6시였다. 48시간내에 답변하라는 것이었다. 연구자들은 이 48시간이 1차 세계대전이 결정된 분기점이 되었다고 파악한다.

세르비아의 왕세자 알렉산데르는 23일 밤 늦게 러시아 대사관을 찾아 지원을 요청했다. 러시아 대사관이 본국에 회신을 요청했지만 대답은 거절이었다. 러시아 외무장관 사조노프(ergey Sazonov)는 공감한다는 말만 했고, 차르 니콜라스는 오스트리아의 통첩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러시아는 1017년을 목표로 군비증강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24일 열린 각의에서 차르 니콜라스의 신임을 받고 있던 농업장관 크리보셰안(Alexander Krivoshein)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면 독일이 참전하게 되고 러시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할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외무장관 사조노프는 외교적으로 해결하자고 했다. 전쟁상, 해군장관도 전쟁을 피하자면서, 다만 강력한 외교전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 최후통첩 데드라인을 연장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세르비아에는 최후통첩을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 전쟁이 벌어질 상황도 고려했다. 25일 각의에는 차르가 참석했다. 이날 각의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외교적 압박의 수단으로 부분 동원을 결정했다. 총동원령을 내리지 않고 부분 동원을 내린 것은 독일을 자극하지 않고 오스트리아만 압박하겠다는 의도였다.

 

1차 대전 직전 1914년의 유럽 /위키피디아
1차 대전 직전 1914년의 유럽 /위키피디아

 

이 시기에 독일에선 군부가 목청을 높였다. 황제 빌헬름 2세는 노르웨이로 요트 휴가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참모총장 몰트케(Helmuth von Moltke)와 전쟁상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는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와 동시에 러시아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특히 몰트케는 러시아의 군비확장정책이 마무리되는 1917년 이전에 러시아를 제압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른바 예방전쟁(preventive war)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러시아와 군사력 균형이 깨져 오히려 독일이 침공당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재상 베트만은 생각을 달리 했다. 그는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을 받아들을 것인지, 러시아가 개입할 것인지를 지켜보자고 했다.

 

프랑스는 사라예보 사건에 무감각했다. 프랑스에서는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후 40년 이상 유례없는 평화를 누렸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표현되는 이 기간에 알사스-로렌을 빼앗긴 것 이외에 국민들은 경제번영과 평화를 즐겼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낸 시각에 대통령과 총리가 나란히 해외 순방에 나서 북해 해상에 있었다. 비상시기에 수뇌부 두명이 동시에 해외 순방을 다니는 것은 위기대처 개념이 없는 행동이었다.

직전에 러시아 차르와의 회담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사라예보 사태는 주제에서 맨마지막 순위에 있었고, 실제 회담에선 논의조차 없었다. 프랑스 정상은 25일 스웨덴 국왕과의 만찬 자리에서 최후통첩의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독일은 프랑스 사절단이 탄 군함과 파리 사이의 교신을 방해했고, 푸앵카레 대통령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각조각 정보만 얻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전임 총리 카요의 부인이 피가로 편집장을 권총으로 살해한 스캔들에 요란을 떨고 있었다.

 

영국은 아일랜드 문제에 허우적거렸다. 허버트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 내각은 세 번째로 아일랜드 자치정부법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얼스터 의용군이 10만명의 군중을 동원해 행진하며 아일랜드 자치에 반대했다. 에스퀴스 총리는 가까스로 북아일랜드 6개주에 대해선 6년간 아일랜드 자치정부에 귀속하지 않는다는 타협안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외무장관 그레이(Edward Grey)는 외교적 중재에 나섰다. 독일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를 말리라고 요청하고, 러시아에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으라고 했다. 그레이는 또 열강회의를 열자고 했다. 하지만 독일과 러시아가 모두 영국 중재인을 무시했다. 없었던 일이 되었다.

 

세르비아는 최후통첩 마지막날인 25일에 러시아가 부분동원을 발령했다는 소식에 위안을 받았다. 파시치 총리는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수용하라는 러시아와 유럽의 요구를 의식해 타협책을 마련했다. 10개 요구사항 가운데 8개는 받아들이고, 내정간섭 성격이 강한 5항과 6항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황태자 시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한 탄코시치 소령을 구속했다.

세르비아는 동시에 전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타협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한 것이다.

25일 오후 6시 피시치 총리가 직접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관으로 직접 가서 기즐링겐 대사에게 답변서를 제출했다. 오스트리아 대사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사는 답변수를 훓어보고는 무조건 수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빈에서 내려온 지시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였다. (All or Nothing) 부분적 수용은 거절로 판단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대사는 준비해둔 외교문서를 세르비아 총리에게 전달했다. 외교 관계 단절이었다. 기즐링겐 대사는 피시치 총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곧바로 베오그라드를 떠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곧바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아니,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태자를 시해한 무리들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전쟁선포를 재가했다.

728일 오전 11,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전보를 통해 세르비아 정부에 전쟁선포를 알렸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군의 베오그라드 진입을 막기 위해 사바 강의 철교를 폭파했다. 오후 1, 베오그라드 건너편 강가에 있던 오스트리아 전함이 수도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시해된지 꼭 한달만이다.

 

10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 전보 /위키피디아
10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 전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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