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④…슐리펜 계획 작동
1차 세계대전④…슐리펜 계획 작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1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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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총동원령에 독일, 선전포고…프랑스-러시아와 동시 전쟁 기로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할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세르비아인 암살조에 의해 황태자 부부가 시해되었고, 사건 배후에 세르비아 군부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확인되었다. 세르비아도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할 이유가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거했고, 슬라브주의에 충만한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 피시치 총리도 이런 열기를 거스르고 합스부르크의 요구를 고분고분 들어줄수만 없었다.

하지만 세르비아로서는 적국 황위 계승자를 죽였다는 원죄를 안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가운데 가능한한 요구를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최후통첩 10개 항목 가운데 주권 침해요소가 강한 2개 항목을 제외하고 모두 수용했다. 테러 배후인물인 탄코시치 소령도 다뉴브사단 감옥에 수감시켰다. 그런데도 전쟁을 막지 못했다. 황태자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노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과의 국지전으로 끝났어야 했다. 두 나라의 전쟁으로 국지화했다면 아마도 3차 발칸전쟁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전쟁은 전 유럽국가가 참여하고 그것도 모자라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군인 전사자만 1,000만명, 민간인 사망자 800만명이란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냈다.

왜 국지전으로 끝났어야 할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었을까. 간단히 답하면, 각국에 전쟁광들, 즉 군부가 주도권을 잡고 설쳐댔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상대국을 공격했고, 동맹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했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선전포고를 전후해 전쟁을 국지전으로 끝내려는 외교적 노력이 잠시 있었다.

노르웨이로 요트 여행을 떠났던 독일 황제 빌핼름 2(Wilhelm II)는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 소식을 726일 귀국 도중 선상에서 들었다. 그는 황태자 시해사건만으로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27일 귀국한 빌헬름은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재상 베트만과 군부를 불러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중단시키라고 지시를 내렸다. 황재의 변덕은 심했다. 20일전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 특사에게 백지 수표를 주며 지지를 약속했던 그였다. 위기가 멀리 있을 때 호기를 보리던 황제는 전쟁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심장이 콩알만 해진 것이다.

황제의 갑작스런 변심에 재상 베트만도 불만을 드러냈다. 군부는 더 했다. 어느 장군은 돌아서며 불행하게도 황제가 평화를 원하다니, 전쟁을 그만두라고 하다니하며 불평했다. 재상 베트맨은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지 않고 사보타지했다.

국가의 일은 최고통치권자 혼자서 움직이지 못한다. 밑에서 거부하면 황제라도 꼭두각시일 뿐이다. 게다가 외양으로 입헌군주국을 표방한 나라에서 황제의 변덕은 극심한 혼란을 초래했다.

빌헬름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다른 방안을 내놓았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더라도 베오그라드에서 멈추라는 것이다. 베오그라드는 사바 강을 사이에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전쟁상 팔켄헤인은 이제는 사태가 황제의 뜻대로 컨트롤되지 않습니다고 완곡하게 아뢰었다. 베를린 외교부에서 빈 외교부로 숱하게 전보를 보냈지만 오스트리아 외무부 당국자는 받지 않았다. 그쪽에선 이미 전쟁 방침이 서 있었다. 7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곧바로 베오그라드를 포격했다.

 

슐리펜 계획의 구도 /위키피디아
슐리펜 계획의 구도 /위키피디아

 

독일 군부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작전계획을 꺼내들었다. 당시 독일 군부의 전략은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이었다. 슐피펜 계획은 몰트케에 앞서 독일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알프레드 폰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에 의해 만들어졌다.

작전계획의 골자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정면 돌파하지 않고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거쳐 파리를 공격하는 작전이다. 왜냐하면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이후 프랑스가 독일 국경지대를 철저하게 요새화하고 군사력을 집중 배치해 이 전선을 돌파하려면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군이 배치되지 않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국경을 통과해 침공하면 쉽게 파리로 진군할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허점이 있었다. 중립국인 벨기에가 영내에 독일군의 통과를 혀용해야 했다. 벨기에가 허용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점령해야 했다.

이 작전계획은 1905~1906년에 완성되였는데, 슐리펜의 후임인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참모총장이 이 작전계획 구상에 동참했다. 몰트케는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 재상 시절의 참모총장 몰트케의 조카였다. 그는 삼촌이 파리를 점령할 시절의 영광을 기억하고 계승할 꿈을 꾸고 있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위키피디아
헬무트 폰 몰트케 /위키피디아

 

슐리펜 계획은 또 러시아와 프랑스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 대한 작전도 준비해 두었다. 이 작전에 따르면 프랑스를 먼저 제압하고 러시아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독일이 동서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를 경우 군사력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철도가 부실하고 영토가 방대하기 때문에 군사력 동원이 느릴 것으로 예측해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하는 시간을 활용해 프랑스를 제압한다는 것이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기습공격이 필수적이었다. 프랑스와 싸우는 서부 전선에서 시간을 끌면 동부 전선이 위태로워지는 약점이 있다.

몰트케는 전임이자 상관이었던 슐리펜의 매뉴얼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프랑스를 공격해야 했다. 그에 앞서 벨기에에 길을 내달라고 요구해야 했다.

독일 참모총장 몰트케는 러시아가 부분 동원을 내린 직후 군사력을 벨기에 국경을 집중배치했다. 그는 어떤 명분을 걸어서라도 프랑스를 전쟁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덕이 심한 독일 빌헬름 황제는 자신의 지시가 먹혀들지 않게 되자 무기력해 졌다. 군부는 동서 두 전선에서 모두 승리할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오스트리아의 개전을 확용해 숙원을 해결하자고 했다.

몰트케는 재상 베트만과 황제 빌헬름에게 총동원령을 내려달라고 집요하게 요청했다. 베트만은 러시아가 총동원을 내리기 전에 먼저 내릴수 없다고 했다. 몰트케는 속전속결을 하려면 기습전이 필요하므로 전쟁선포와 같은 절차를 무시하자고 했고, 베트만은 전쟁의 명분을 중시했다. 베트만도 하는수 없이 몰트케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부분 동원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부분 동원과 총동원은 개념상의 차이일뿐 실제로는 차이가 없었다. 외무장관 사조노프는 사태의 심각성을 주장하며 총동원령으로 전환할 것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요청했다. 군부는 당연히 총동원령을 지지했다. 니콜라이는 하는수 없이 총동원령으로 격상시키라고 승낙했다.

그때 독일 황제 빌헬름에게서 긴급전보가 왔다.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리면 자신도 호전적인 군부를 더 이상 제어할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빌헬름과 니콜라이는 이종사촌간이었다. 니콜라이는 망설였다. 그러자 사조노프 외무장관이 차르를 붙들고 장시간 설득했다. 부분 동원은 총동원과 다름 없다, 독일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지하면 흑해 함대의 출구가 막힌다, 등등……. 전쟁이 불가피한 이유는 수십, 수백 가지였다. 전쟁을 피해야 하는 명분도 많았을 터인데, 니콜리아는 그 이유를 대지 못했다. 결국 니콜라이는 총동원령에 재가를 했다. 1914730일이었다.

 

‘군인 벌레’라는 이름의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1914년 만평. /위키피디아
‘군인 벌레’라는 이름의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1914년 만평. /위키피디아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발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독일 군부는 쾌재를 불렀다. 베트만은 몰트케가 내민 총동원령에 서명했다. 마지막 황제의 결제만 남았다.

731일 독일은 프랑스에겐 총동원령을 내리지 말라고 요청했고, 러시아에겐 총동원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시한은 24시간이었다. 그리고 빌헬름 황제의 총동원령 서명을 받아냈다.

프랑스는 독일의 요구에 불쾌해 했다. 파리 당국은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것이라며 독일의 요구를 묵살했다. 러시아는 24시간내에 답변하지 않았다.

최후통첩 시한이 지나자 81일 정오 빌헬름 황제는 군복을 차려 입고 장군들에 둘러 싸인 가운데 전시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사실상 선전포고였다.

 

이날 오후 423, 영국주재 독일 대사로부터 전보가 날아왔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지 않는다면 영국은 중립을 지킬 것이며, 프랑스의 중립도 보장하겠다는 영국 그레이 외무장관의 메시지였다. 황제는 영국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빌헬름 2세가 또다시 변덕을 부린 것이다.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한 곳에만 집중하는 것이 유리했다. 프랑스와 러시아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상황은 빌헬름에게 악몽이었다. 빌헬름은 대신들을 불러 이제 러시아와만 싸우게 되었소. 병력을 모두 동부전선으로 이동시키시오.”라고 말했다. 몰트케는 황제에게 대들었다. “폐하, 그것은 아니되옵니다. 병력은 이미 이동 중에 있고,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일단 정하면 바꿀 수 없습니다.”

과연 몰트케의 주장처럼 병력을 이동시킬수 없었을까. 몰트케는 자신의 구상, 즉 슐리펜 계획을 바꾸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대든 것이었다.

그러자 빌헬름은 당신 삼촌이라면 달리 생각했을 것이다고 핀잔을 주었다. 삼촌에게 경쟁심을 가졌던 몰트케에게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발언이었다.

재상 베트맨도 황제의 변심에 동조했다. 빌헬름은 그 순간 몰트케를 직위 해제하고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참모총장을 앉혔어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빌헬름은 그럴 배짱이 없었다. 이후 권력은 황제에게서 군부로 이동하게 된다. 전쟁 머신이 가동된 것이다.

 

1914년 8월 1일 독일 빌헬름 2세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4년 8월 1일 독일 빌헬름 2세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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