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 고분, 복원된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부여 능산리 고분, 복원된 것보다 훨씬 더 컸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0.07.15 14: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하물리탐사 통해 고분군 본모습 확인…2기씩 짝 지워 조성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고분 크기가 현재 복원·정비되어 있는 것보다 더 컸다는 사실이 지하물리탐사 결과 드러났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부여 능산리 지하물리탐사를 실시한 결과, 고분의 경계를 나타내는 호석(護石)이 현재 복원한 지름 20m 규모보다 넓게 분포한 것을 확인했다. 호석은 무덤 봉토가 유실되지 않도록 봉분 외곽에 두르는 돌로, 고분의 경계를 나타낸다.

연구소가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묘역 중앙부와 진입부를 대상으로 지하물리탐사를 실시한 결과, 각 봉분의 외곽에는 호석으로 판단되는 이상체 반응을 확인했다. 지하물리탐사는 전기 또는 진동 등 물리적 성질 변화를 이용해 매장문화재의 분포를 판단하는 고고과학 기술이다.

탐사결과 왕릉의 배치는 동하총과 중하총, 서상총과 서하총, 중상총과 동상총이 각각 2기씩 모여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2기씩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왕과 왕비의 무덤이 함께 조성되었거나 가족단위로 무덤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 능산리 중앙고분군 지하물리탐사 결과 /문화재청
부여 능산리 중앙고분군 지하물리탐사 결과 /문화재청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사비기 왕릉군으로 백제 능원제도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다. 특히 고분군의 서쪽에 있는 능산리 사지(陵寺)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된 바 있다.

이 지역에 백제 고분들이 있다는 사실은 1757년 제작된 <여지도서>에서 능산(陵山)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는 1915년 일본인인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谷井齊一)가 처음 실시한 바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정식보고서도 없이 간단한 설명과 사진 몇 장만 남겼다. 현재는 1966년 보수공사 중 조사된 7호분과 함께 총 7기의 고분이 정비되어 있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 /문화재청
부여 능산리 고분군 /문화재청

 

올해 하반기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능산리 고분군중 동하총(1호분) 내부 관대(棺臺) 조사를 시행할 계획이다. 또 능산리 중앙고분군의 전체 시굴조사도 계획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러한 조사를 통해 고분간의 선후관계가 확인된다면,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사비기 왕릉의 주인과 백제 후기 능원의 모습을 밝혀내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부여 능산리 중앙고분군 지하물리탐사 결과 /문화재청
부여 능산리 중앙고분군 지하물리탐사 결과 /문화재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