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⑤…인계철선
1차 세계대전⑤…인계철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1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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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룩셈부르크 무혈 입성, 벨기에 침공…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1차 세계대전에서 최대의 전쟁터가 되었던 프랑스는 전쟁 직전인 19147월에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푸앵카레 대통령과 비비아니 총리가 보름 동안 북유럽으로 해외 순방을 떠난 사이에 독일은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중차대한 시기에 군통수권자 두 사람이 동시에 자리를 비운 것은 큰 실수였다.

728일 대통령과 총리는 덴마크 방문을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랐을 때엔 이미 전쟁은 코 앞에 닥쳐와 있었다. 29일 프랑스의 두 수뇌는 항구에서 환영행사를 취소하고 허겁지겁 열차를 타고 파리로 들어갔다. 참모총장 조프르는 대통령과 총리를 보자마자 총동원령을 내려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그는 한시라도 급히 병력을 국경으로 출동시키지 않는다면 독일군이 총 한방 쏘지 않고 프랑스 국경을 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당시 프랑스에선 군통수권은 총리에게 있었다.

총리 비비아니는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쟁이 각국 자본가 계급의 이해가 충돌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노동자 계급은 희생될 뿐이라며 반전론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본산인 독일에선 사회민주당이 이미 전쟁을 지지하고 있었다. 민족주의 열풍이 유럽 사회주의자의 평화주의를 숨죽이게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도 국가적 위기에 사회주의자의 대의를 버렸다. 국제사회주의 운동은 와해될 조짐을 보였다.

730일 비비아니 총리는 전방 병력을 룩셈부르크 근처로 배치하도록 하되 독일 국경에서 10km 후방에 대기하도록 했다. 우발적인 교전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8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병력의 80%를 서부전선에 배치했다. 동양식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술을 취하려 한 것이 아니라, 독일 군부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슐리펜 작전(Schlieffen Plan)을 수행하려 한 것이다. 러시아가 군을 동원해 동부전선에 집결하기 전에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를 기습 공격해 제압한 후 동부전선으로 이동시킨다는 게 독일의 작전이었다. 또 슐리펜 작전에 의하면, 프랑스 국경에 소수 병력을 주둔시켜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주력 부대를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국경으로 우회해 프랑스로 진입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요새화되어 있는 프랑스 국경에서 전면전을 피하고 방비가 허술한 벨기에 국경을 밀고 나려간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벨기에를 회전하도록 짜여 있었다. 네덜란드는 다행스럽게 이 작전의 궤도에 포함되지 않아 1차 대전 전쟁의 참화에서 피해 중립을 유지할수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는 어느 진영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슐리펜 작전 /브리태니카
슐리펜 작전 /브리태니카

 

가장 먼저 중립이 짓밟힌 곳은 소국 룩셈부르크였다. 독일은 룩셈부르크에 프랑스를 공격할 터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했다. 룩셈부르크 총리 폴 하이셴(Paul Eyschen)은 항의했지만 독일군의 진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국제질서다. 82일 독일군 수만명이 룩셈부르크 국경을 넘었다. 룩셈부르크 군대는 400명에 불과했다. 대공녀 마리-아델라이드(Marie-Adélaïde)는 군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오후 2시 총리는 독일군 사령관에 완곡하게 항의했지만 대공녀와 다른 정치인들은 소국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얼마후 룩셈부르크는 독일의 일개 주로 편입되었다. 다음은 벨기에 차례였다.

 

그 무렵 영국은 전쟁 참여를 주저하고 있었다. 유럽 대륙의 문제에 영광스런 고립을 지킬 것인가, 프랑스를 도와야 할 것인가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81일 각료회의에서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레이 외무장관은 자리를 걸고 참전을 주장했지만 평화주의자들이 중립을 고수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움직이면서 영국의 분위기도 돌변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침공하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82일 저녁 6, 독일군이 룩셈부르크에 진주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룩셈부르크도 중립국이었지만, 영국이 참전해야 할만큼의 중요성이 떨어졌다. 그러나 벨기에는 달랐다. 벨기에는 영국이 프랑스와 독일과의 완충지대로 공을 들여 중립국을 보증해온 나라였다. 이날 내각회의는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할 경우 영국이 돕는다는 원칙만 정했다.

그날 저녁,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할 태새를 보이고 있다는 정보가 날아들었다. 83일 아침에 열린 내각회의에서 영국의 의무와 명예를 위해 대륙의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고립을 통해 평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급격한 상황 변화에 말도 꺼내지 못할 입장에 되었다.

 

벨기에 국왕 알버트 1세 /위키피디아
벨기에 국왕 알버트 1세 /위키피디아

 

벨기에는 룩셈부르크와 다르게 대처했다. 독일군에 비해 군사력이 상당히 열세였지만, 침략자에 당당하게 맞서기로 했다. 독일 슐리펜 작전에는 벨기에 리에주(Liège)를 우회해 프랑스 국경을 넘는 것으로 짜여 있었다.

국왕 알버트 1(Albert I)는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할 것으로 예견했다. 알버트는 731일 군대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다음날 독일 빌헬름 2세에게 벨기에의 중립을 존중해 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독일이 벨기에에 보낸 것은 최후 통첩이었다. 82일 저녁, 브뤼셀 주재 독일 대사는 외무장관을 찾아와 준비해온 문서를 읽었다. 독일이 벨기에를 경유해 프랑스를 선제공격할 것이며, 길을 열어주면 벨기에의 영토와 재산을 보전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시한은 12시간, 내일 아침까지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벨기에가 거부할 것이 뻔하니 명분을 만들자는 게 독일의 속셈이었다.

 

1914년 8월 4일 독일 침공시석을 전한 벨기에 언론 /위키피디아
1914년 8월 4일 독일 침공시석을 전한 벨기에 언론 /위키피디아

 

다음날(83) 아침, 벨기에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 소식이 바로 영국에 전해졌다. 이날 오후 그레이 영국 외무장관은 의회에 나가 전쟁 참여를 호소했고, 의원들은 열렬하게 지지했다. 중립국 벨기에가 독일군 군화발에 짓밟히는 것을 영국은 더 이상 묵과할수 없다는 컨센서스가 형성되었다. 평화주의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은 1839년 런던 조약(Treaty of London)에서 유럽 국가들이 합의한 사항이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국제조약을 무시한 행동으로 영국의 참전에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영국은 더 이상 명예로운 고립을 내던져 버렸다.

 

벨기에의 알버트 1세는 단호했다. 국왕은 6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을 총동원해 독일과 맞설 태세를 갖췄다.

벨기에가 길을 내주지 않겠다고 거절한 것은 독일의 기대를 벗어난 것이었다. 몰트케 참모총장을 비롯해 독일 군부는 벨기에가 순순히 항복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벨기에를 무사히 통과해 곧바로 프랑스로 진격할 계획이었던 독일군의 발목이 잡힌 것이다. 독일은 3일 오후 6시 프랑스에 거짓 이유를 대며 선전포고를 했다. 84일 오전 8, 독일군은 벨기에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영국은 독일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내각회의를 열어 당일 자정까지 독일군의 벨기에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독일은 데드라인까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4일 밤 11시 영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시해사건이 일어난지 한달여 만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한지 7일만에 국지전에 머물렀어야 할 전쟁은 유럽전쟁으로 확대되었다. 20살의 세르비아 청년 프린치프가 쏜 두발의 총알이 인계철선이 되어 유럽국가들을 줄줄이 전쟁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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